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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May 24. 2022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1

결국 현실로부터 유리된 이상주의자라는 평가로 얼룩지다.

225번째 대가의 이야기.


1466년 네덜란드 로테르담 하우다(Gouda)에서 성직자인 아버지와 의사의 딸이지만 가정부였던 어머니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년도가 1446년인지 아니면 1469년인지 논쟁이 지금도 그치지 않듯이, 그는 그의 아버지가 자기를 가졌을 때에는 성직자가 아니었다는 식의 뉘앙스를 담은 모호한 서술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4살에 학교에 입학하여 9살 때 그의 아버지가 라틴어 학교였던 성 레빈 문법학교에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라틴어 시를 지을 만큼 높은 학문적 재능을 보였다. 14살 무렵이던 1483년 흑사병으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후견인은 그를 ‘‘공동생활 형제단(Fratres Vitae Communis)’가 운영하는 수도원에 맡겼다.


이곳의 엄격한 훈육은 함께 있으면서도 형제의 정을 나눌 수 없었던 형에게 쓴 편지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데, 그는 세상과 절연된 삶, 강요된 절제와 혹독한 체벌, 그리고 연일 계속되는 예배와 강독을 무척 괴로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시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과 혹독한 생활을 겪으면서, 수도원의 타락과 부정 축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우기 시작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는 기독교 교육에 보다 인간적이고 지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곤 했다.

1483년부터 그는 스헤르토헨보스(s'Hertogenbosch)에 있는 또 다른 ‘공동생활 형제단’으로 옮겨 보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사실상 그의 아버지는 주변에서 종적을 감춘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관리하던 후견인들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문법학교와 수도원에서 라틴 고전학과 신학을 공부한 그는 21살 때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테인에 있는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에 입회,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 1492년 에라스뮈스는 위트레흐트(Utrecht)의 다비드 대주교(David van Bourgondie)가 실시한 시험을 통해 사제의 서품을 받은 것인데, 수도원 생활에 회의를 느낀 그는 이듬해 수도원을 떠나 캉브레(Cambrai)의 주교였던 앙리 베르겐(Henry de Bergen)의 라틴어 비서로 일하게 된다.


일시적이긴 했지만, 베르겐 주교의 밑에 있는 동안 그는 수도원의 지루한 삶에서 벗어나 세속적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라틴어 실력을 눈여겨 본 베르겐 주교는 그가 프랑스 파리에 가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당시 앙리 베르겐은 추기경이 되고자 했는데, 앙리의 꿈은 그가 파리 대학의 몽테귀(Collège de Montaigu)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1495년 즈음에 좌절된 것으로 보인다.


1495년 유럽 최고의 학문 기관인 파리 대학 신학부에 들어가 1499년까지 머물렀다. 그 덕분에 그는 파리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며 당시의 지식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네덜란드의 인문주의 학자이자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당대 유럽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일컬어지는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의 이야기이다.


그는 흩어진 여러 사본을 수집해 온전한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구성하고 이를 직접 다시 라틴어로 번역해서 당시 가톨릭에서 권위있던 불가타 성경의 오역을 지적했는데, 이를 통해 성서해석을 놓고 갈등이 벌어지면서 종교개혁의 시발점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대표적인 저서로는 <우신예찬>, <격언집> 등이 있다.

파리 대학의 스콜라적 교과과정은 에라스뮈스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그는 수도원과 다를 바 없는 규율에 환멸을 느꼈고, 세속적 가치에 대한 학문적 열정은 동료들과의 대화도 따분하게 만들었다. 대신 그는 프랑스 인문주의를 이끌던 고갱(Robert Guaguin)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자신의 문장과 지식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의 이름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회자될수록, 그는 네덜란드 수도원으로 되돌아가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1517년 교황으로부터 수도사의 직분을 영원히 면제받기까지, 그도 중세의 그림자로부터 해방되기를 열망했던 르네상스 사람들 중 하나였다.


베르겐 주교의 재정 후원이 흔들리면서 에라스뮈스는 부유한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해야 했는데, 가정교사로 맺은 몽트조이 공 윌리엄 블룬트와의 인연으로 1499년 영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영국 방문은 에라스뮈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유학했던 당시 파리대학

그는 영국에서 토머스 모어, 윌리엄 그로신, 존 콜레트 등 휴머니스트들과 만났고 장래의 헨리 8세와도 만났다. 그는 특히 그리스 문화를 숭배하는 영국 휴머니스트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고전 그리스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여 당대 최고의 그리스 문헌학자가 되었다.


대륙의 분위기와 달리 학문적 관용이 상대적으로 넓은 영국 방문을 계기로, 그는 고전에 담긴 자유로운 인간적 이상과 기독교의 융합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게 되었다.


그 과업은 구체적으로는 그리스 및 라틴 고전과 기독교 문헌의 번역과 편집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성 히에로니무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집을 편찬하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대역 성경 번역서를 펴냈고, 라틴 고전과 그리스 고전에서 인용한 격언들을 모아 <격언집(Adagia)>(초판 1500년)으로 펴냈다.


단순히 격언을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 구절의 의미를 설명하는 일종의 논평을 덧붙이고, 비슷한 구절을 찾아 제시했으며, 당시의 종교, 정치, 사회 상황과 관련 있는 논평도 덧붙였다. <격언집>은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휴머니스트들의 중요한 참고서 역할을 했고, 에라스뮈스의 명성을 유럽 전역으로 퍼뜨렸다.

그는 1506년 그리스어와 인문주의를 더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탈리아로 넘어간다. 에라스무스는 이곳에서 그리스인들에게 직접 그리스어를 배운다. 그는 헨리 8세가 즉위한 1509년 영국으로 향했다.


영국행 도중 알프스를  넘으면서 그는 수도원 생활을 풍자한 작품을 구상했다. 영국에 도착한 뒤 토머스 모어의 집에 머무른 일주일 동안 그는 작품을 완성했다. 바로 1511년에 출간된 <우신예찬>(Moriae Encomium)이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1515년에는 한스 홀바인 2세가 이 책에 삽화를 그려 넣기도 했다.

토마스 무어

어리석음의 여신인 모리아가 화자(話者)로 등장하여 어리석음을 통해 진정으로 현명한 것이 무엇인지 밝히는 글이다.


“아마도 신학자들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지나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거만하고 화를 잘 내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600개에 달하는 논거를 한 조(組)로 묶어 내 주장을 취소하도록 몰아세울 것이다. 내가 그것을 거절하면 그들은 즉각 나를 이단자로 선언할 것이다. 스콜라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방법은 난해한 것들 가운데 가장 난해한 것을 더욱 난해하게 만들 뿐이다.”


<우신예찬>에서 그는 우신(愚神, 바보 신)을 내세워 교황, 성직자 뿐만 아니라 군주와 학자들등 그 시대의 지식인과 지도층을 모두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한 이유로 <우신예찬>이 금서(禁書)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대 유럽의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은 불온하다고 지목될 수 있는 부분이 삭제되거나 저자의 이름이 지워진 상태로 널리 유포되었다. 금서로 지정되지만 유럽에서 이 저서의 파급력은 엄청났고,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가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게 된다.

1517년 교황 레오 10세는 에라스뮈스를 수도사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이런 영구적인 면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것은 그의 학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이 로마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그만큼 그가 로마 교회와의 관계에서 슬기롭게 처신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저의 노작으로 오래되고 널리 받아들여진 텍스트를 폐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몇몇 부분에서 오류를 바로잡고, 몇몇 곳에서 모호한 것을 설명했을 뿐입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개혁적 열정이 반(反) 교회적 인상을 주지 않도록 조심했다. 위의 그의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레오 10세에게 보낸 헌사에서 자기가 새롭게 편집한 <신약성경>(Novum Instrumentum omne, 1516)의 그리스어 판본과 기존 라틴어 번역(Vulgate)의 수정이 불러일으킬 논쟁에도 미리 대비했던 것이다.


에라스뮈스의 신중한 태도는 정치적 판단만큼이나 자신이 견지했던 신앙적 자세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인문학적 열정을 기독교 신앙과 조화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1499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에 콜렛(John Colet)과 모어(Thomas More)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굳어진 것이기도 했다. 


즉 그는 인문주의의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잘못된 성경 이해를 바로잡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훼손된 기독교 신앙을 회복하는 데에 자신이 꿈꾸던 개혁의 일차적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에라스뮈스의 이른바 ‘진정한 신학’(vera theologia)은 신앙의 회복에 초점을 둔 기독교 인문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한편으로는 자구에 매달려 성경의 정신을 외면한다는 이유에서 ‘신(新)문학파’(neoterici)를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과 신앙의 구분에 천착해 바람직한 성경 이해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와 같은 스콜라 철학자들과도 거리를 둔다.


<교본>(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 1503)의 말미에 기술하듯, 그는 신앙이 ‘규례나 예배와 같은 형식이 아니라 성경에 기술된 신의 명령을 따르는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고 진정 믿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의 논제를 못 박아 걸었다. 교회의 면죄부 판매 행위를 규탄하면서 루터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펼친 이 논제는 종교개혁의 중요한 역사적 계기로 일컬어진다.

루터는 에라스뮈스를 비롯한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을 자신의 지원 세력으로 확보하려 했다. 그래서 1519년 3월 에라스뮈스에게 공개적인 지지를 당부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이에 대한 에라스뮈스의 답장의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그리스도 안의 내 소중한 형제여! 당신의 책들이 이곳 루뱅에서 얼마나 큰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당신의 저작들이 저의 후원으로 쓰였다고도 하고, 또는 내가 당신 파당의 지도자라 하기도 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증언하기를, 당신의 책은 읽은 적도 없고, 당신의 주장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는 중립을 지킬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할 수 있는 한 학문의 부흥에 기여할 생각입니다. 나는 격렬한 언동보다는 정중한 중용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에라스뮈스는 루터가 박해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루터의 안전을 위한 진정서를 대주교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루터가 온건한 태도를 취하기를 바랐다.


그는 교회에 대한 루터의 비판이 옳다고 보았지만, 은총, 자유의지, 예정설 등의 중요한 교리에서 루터와 의견을 달리했다. 무엇보다도 에라스뮈스는 루터의 격렬한 언동이 교회 내 강경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키게 되리라 우려했다.


1520년 여름 교황은 루터를 이단자로 선언했고 루터는 교황의 칙서와 교회법을 불태워버렸다. 이후 에라스뮈스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교회 측은 루터에 반대하지 않는 것이 곧 루터에 동조하는 것이라 보았고, 종교개혁 진영은 그가 보다 분명하게 루터 편에 설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루터가 ‘노예의지론’과 함께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귀하의 오만하고 무례하고 반골적인 본성으로 인해 온 세상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귀하는 폭풍이 잠잠해지는 것을 저지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라도 되는 듯이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에라스뮈스는 루터의 종교 개혁에 대해서도 반기(反旗)를 든다. 최초에는 그 역시 온건한 방식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했다. 교회의 부패, 성경의 오독, 그리고 만연된 불신앙에 대한 비판에 은연중 공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가 ‘믿음’(fide)을 앞세워 교회의 질서조차 부정한다고 판단되자, 그는 ‘자유의지’(libero arbitrio)를 전면에 내세워 혁명적 움직임의 자제를 촉구한 것이었다. 그의 기독교 철학(Philosophia Christi)에서 볼 때, 신의 섭리에 ‘동참’(cooperatio)하려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초래될 비(非)이성적 집단주의가 로마 교회의 부패보다 더 위험스럽다고 느꼈던 것이다.

에라스뮈스는 루터파로 살지도, 그렇다고 기성 교회에 종속되어 살지도 않는 자신의 생각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깊은 고뇌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했던 에라스뮈스의 제자들을 포함한 많은 휴머니스트들이 루터파에 가담했고 에라스뮈스는 점차 고립되어 갔다. 교회와 보수파는 에라스뮈스가 루터에 대한 관용을 주장하고 교회의 물질주의와 부패를 지적한 것을 두고 에라스뮈스를 공격하고 탄압했다.


이러한 상황들은 후대 학자들에게 있어 에라스뮈스가 어떤 의미에서는 지독한 이상주의자였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보편적 인간성에 기초한 미덕에 대한 믿음, 중용과 관용을 통한 개혁이 가능하다는 믿음, 위대한 고전 저작을 읽고 이해하는 것을 통해 인간이 좀 더 사려 깊고 선해질 수 있다는 믿음. 이보다 더 이상적인 믿음, 그래서 실현되기 힘든 믿음이 또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실천하려 했던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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