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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09. 2022

오디션 떨어지고 트럭 운전하며 자비 음반이나 냈지만-4

‘로큰롤의 제왕’이라 불리며 대중음악의 판도를 뒤바꾸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195


당신이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기회를 마련한 것은, 당신을 포함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가 벼락스타가 되어 하루아침에 스타의 기회를 잡아 화려한 일생을 누렸다고 막연히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고작 4달러를 들여 자비 음반을 만든 지 1년이나 지나도록 아무런 기회를 잡지 못했고, 트럭 운전이나 하라는 소리를 듣거나 ‘너는 결코 가수로 성공할 수 없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라는 욕설에 가까운 혹평까지 들어야만 했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준 선 스튜디오의 사장에게 픽업되었지만, 정작 음반을 녹음하려 하는데 특별한 것이 없다며 그대로 묻힐 순간에 밤샘 녹음으로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모두가 포기하고 돌아가려 할 때 자신의 초보자용 기타를 들고 그만의 시그니처를 만들어냈다.


그가 단순히 세계적인 스타였기 때문에 이 시리즈에 200여 명이 훌쩍 넘은 시점에 가져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의 인생은, 어렵고 어려웠던 시기를 이겨냈던 그가 결국 자신의 인생을 슬기롭게 고난과 위기를 극복해낸 해피엔딩으로 만들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된다. 그야말로 이 시리즈에는 너무도 맞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게 불우한 가정환경을 딛고 일어서 자신만의 노력으로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되었는데 그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인생에 실패한 대가로 오늘 당신에게 소개되어야만 하는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다. 앞서 촘촘히 그의 인생을 살펴보았지만, 그의 인생은 롤러코스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의 인생이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 이유들은 너무도 명확했다.


그는 1955년 공연 프로모터였던 톰 파커 대령을 만난다. 그의 권유로 필립스의 엘비스 판권을 RCA에 팔았다. 이후 엘비스는 국내외적으로 크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엘비스의 매니저를 맡으며 엘비스의 성공을 이끄는 키맨으로 이른바 ‘멤피스 마피아’라는 이름으로 엘비스를 망쳐가는 주범이었다. 그는 매니지먼트 보수로 엘비스 수익금의 50%를 가져갔다. 그는 엘비스를 이렇게 추켜세웠다.


“그는 천재이다. 그가 없었다면 나도 없었다.”


곰은 재주가 부리고 돈은 떼놈이 가져간다는 말을 실현하며 그는 자신의 이익만을 챙겼다. 그나마 제대로 된 떼놈이었다면 그는 엘비스의 비위를 맞춰가며 그가 망가져가는 것을 방관하기보다는 철저한 관리자 역할을 했어야만 했는데, 그는 그저 그 순간의 이익만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물론 가장 큰 잘못은 그런 자를 곁에 두었던 순진한(?) 엘비스에게 있다.

‘멤피스 마피아’라고 불리며 엘비스의 눈을 가리고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데 일조했던 ‘친구’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던 똥파리들이 대개 그러했다. 매니지먼트를 총괄했던 톰 파커 대령을 필두로 조 에스포지토와 찰리 호지들이 그러했다.


조 에스포지토는 엘비스의 20년 지기 친구이자 로드 매니저를 맡았던 자였다. 말 그대로 조는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엘비스와 함께 했다. 찰리 호지는 기타리스트로 엘비스의 무대에는 항상 그가 뒤를 받쳐주고 있었다. 매일 만나 함께 밥 먹고 술 마시고 같이 놀러 다니고, 어렸을 때 그런 여유 있는 생활을 친구들과 함께 해보지 못했던 엘비스에게는 그것이 정말로 해보고 싶었던 생활이고 꿈꾸던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결핍에서 오는 것을 채우겠다는 보상심리로 자신이 망가지는지도 모른 채 파멸로 걸어 들어갔던 것 또한 엘비스의 선택이었다.


진정한 우정은 뒤로 한 채, 자신들의 쾌락과 이익만을 위해 그에게 붙어 있던 자들이 과연 친구라고 불릴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러한 진실을 굳이 외면하며 그들의 입에 발린 찬사와 아첨에 둘러싸여 자신의 왕국을 허물어뜨리고 싶지 않았던 엘비스의 모습은 망국의 길을 걸었던 동서양 중세 봉건제의 군주들의 모습을 꼭 닮아 있다.


엘비스는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했고 그 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무려 5가지 타입의 음악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Rock and Roll, Pop, Country and Western, Gospel, Rhythm and Blues.


그때도 지금까지도 이렇게 다양하게 5가지의 서로 다른 장르를 다 소화하며 부르는 가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마약이나 무분별한 술 담배 등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왕’(The King)이라는 별명처럼 엘비스는 로큰롤의 역사에서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며, 그 장르의 폭발적인 인기를 선도한 최초의 슈퍼스타였다. 빌보드 차트 10위권 안에 36곡, 1위에 17곡을 올렸고, 미국 내 1억 장 이상, 전 세계 10억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한 엘비스의 기록에 버금가는 음악인은 비틀즈뿐이다(참고로 비틀즈의 기록은 각각 29곡, 20곡, 1억 7천만 장 이상, 10억 장 이상이다).


엘비스의 흑인 창법은 한때 ‘흑인 음악을 훔친 백인 가수’라는 비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평론가들은 인종차별이 심하던 시절에 그나마 엘비스의 인기 덕분에 흑인 음악인의 운신 폭이 더 넓어졌다는 긍정적인 면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런 그의 음악적인 영역을 더 다양하게 키워나가지 못하고 돈을 위해 인기를 활용하자고 하면서 그의 인생은 차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엘비스의 초기 활동에서는 음악 못지않게 영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엘비스는 1956년부터 1969년까지 모두 31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부분 뮤지컬이거나 노래를 중요한 소재로 삼은 영화고, 어디까지나 가수로서의 인기에 편승해 졸속으로 제작된 것이다 보니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혹평을 받기 일쑤였다. 말 그대로 반짝 인기를 그때만 활용하자는 한탕주의의 대표적인 예였다.


이러한 행보는 이후 엘비스의 인기가 음악성 때문인지, 아니면 한때의 유행 때문인지 하는 논란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논란이 될 정도로 그는 음악 못지않게 ‘논란 마케팅’을 자신의 주요한 무기로 삼았다. 목소리 하나만큼은 훌륭한 엘비스였지만, 악기 연주나 작곡 능력을 비롯한 전반적인 음악성에서는 뚜렷한 한계를 지닌 것이 사실이었다.


초기의 폭발적 인기가 수그러진 다음, 오로지 음악성으로만 승부해야 할 시점에 내놓은 작품의 완성도가 높지 않았던 점은 이런 그의 태생적 한계로 지적된다. 비틀즈를 위시한 다른 후배 음악인들이 새로운 실험과 변모를 시도했던 것에 비하자면,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고 변화를 기피한 엘비스의 태도는 큰 아쉬움을 남겨주는 면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그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춤에도 그가 사실 능숙하지 못했다는 점이 나중에서야 알려졌다. 영화 촬영 중에도 종종 안무가가 가르쳐 준 스텝을 까먹고 쩔쩔맸다는 증언이 다수 나온 것이다. 그가 종종 무대에서 선보인 ‘엉덩이 춤’이 몰고 온 센세이션을 생각해 보면 그가 얼마나 부족한 부분들을 위해 노력했고 연기로 커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자신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엘비스를 연출하고 연기했다는 증거는, 엘비스의 인기과 더불어 당시 미국 틴에이저 문화를 대두시켰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빙 크로스비와 프랭크 시내트라의 감미로운 스탠더드 팝이 대세일 때 청천벽력처럼 나타난 로큰롤은 기성세대와의 단절과 반항을 상징했다.


젊은이들은 로큰롤에서 억눌린 욕망의 분출구를 발견했다. 엘비스의 ‘엉덩이 춤’은 성적 암시를 담았다는 이유로 언론과 학부모에게 뭇매를 맞았고, 데뷔 초 TV에 출연했을 때는 공연 내내 카메라가 그의 상체만 비추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십 대들, 특히 소녀 팬들은 그 모습에 열광했다.

엘비스야말로 오늘날처럼 십 대 팬을 대중음악의 중요한 소비계층으로 만든 장본인인 셈이다. 비록 반항아 이미지를 적극 차용하여 우상이 되긴 했지만, 엘비스 본인은 오히려 반항아와는 거리가 먼 모범생이었고, 자신의 10대를 우울하기 그지없이 보냈다는 점에서 그의 슈퍼스타로서의 모습이 연출된 연기라는 점을 증명한다.


마약에 대해서는 철저했다고 하지만, 엘비스의 약물남용 문제는 오래전부터 숱한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주로 암페타민 등의 각성제를 남용했던 일이었다. 그가 사망할 즈음에는 재정 상태 역시 적잖은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워낙 계획적이지 못했던 무절제한 사치생활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엘비스가 수입의 절반 이상을 매니저인 ‘대령’에게 뜯기는 전형적인 노예계약의 희생자였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이후에 밝혀졌다.


제아무리 로큰롤의 슈퍼스타라 하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연예계의 비리 앞에서는 무력했던 셈이다. 엘비스 사후에 유족들은 결국 ‘대령’을 상대로 법정 투쟁을 벌여 고인의 권리를 일부나마 회복했다. 오늘날 엘비스 관련 산업은 매년 수천만 달러의 수익을 내고 있다.


한때나마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막대한 부와 명예를 거머쥔 엘비스였지만, 그의 내면에는 그 모든 것이 졸지에 물거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군 복무 시절, 그는 자신의 인기가 뚝 떨어져서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예전과 같은 빈털터리가 되는 악몽을 자주 꾸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불안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며 눈물을 보인 바 있다.

“힘든 일, 눈물, 잠 못 이루는 밤이 얼마나 많았는지 사람들은 몰라요. 엘비스 프레슬리로 존재하는 데 너무 지쳤단 말이에요.”


이런 이유로 그는 지병을 앓아왔었음에도 평소 자신의 지병을 말할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그로 인해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밝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군대를 갔지만, 자신을 평생 지지해주던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어 휘청거려야만 했고, 그 부족한 애정을 쏟겠다고 10대였던 소녀를 만나 그녀에게 의지하며 결혼했지만, 결국 사랑스러운 딸아이를 낳은 직후부터 전쟁 아닌 전쟁으로 5년 만에 이혼을 하고 다시 방황하고 불안했어야만 했다.

아내 프리실라

제대로 준비를 시켜주고 그를 꾸짖어줄 친구나 스승은 곁에 있지 않았고, 그저 그를 이용하고 자신만의 사욕을 채우겠다는 방탕한 이들만이 가득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모든 것을 조절하는 것은 그 자신이어야만 했다. 그가 그렇게 어렵게 자신이 잡고 있던 꿈을 이뤘다면 그는 그다음을 위해 준비하고 노력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앞서 예를 든 바와 같이 동서양의 다양한 나라를 말아먹은 중세의 군주들이 보인 모습을 그는 연예계의 ‘제왕’으로서 똑같이 보여준다. 훌륭한 신하를 두는 것은 운이 아니다. 훌륭하지 않은 왕에게 훌륭한 신하가, 친구가 있기는 상당히 어렵다.


훌륭한 왕은 자신의 주변에 꼭 필요한 친구와 신하를 두기 마련이지만, 훌륭하지 못한 왕은 훌륭한 친구나 신하가 있어 가슴이 뜨끔한 조언을 하더라도 그를 내치고 듣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떠한가? 그저 첵바퀴도는 일상을 살면서 ‘나는 열심히 살고 있다’라는 자기 최면을 걸면서 적당히 다른 사람보다는 보람찬 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위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회정의 구현 같은 건 고사하고 내 가정이나 나 자식 하나도 제대로 추리지 못하면서 그저 소시민 코스프레를 하면서 이번 생에는 망했으니 다음 생에 재벌 3세 정도로 태어날 것을 꿈꾸며 그런 꼴사나운 민낯은 감춘 채 브런치 작가 입네 하면서 그럴싸한 글을 쓰는 척하고, 그저 괜찮아 보이고 싶어 서평이랍시고 줄거리를 맞춤법 다 틀려가며 써놓고 자신의 글을 읽는 구독자가 많다고 ‘내가 글을 좀 쓰긴 하나보다’라며 착각 속에 살고 있지는 않은가?


무엇보다 당신이 발전하기 위해 어떤 반성을 하고 어떤 실천을 하며 어떤 공부를 하는가? 엘비스는 슈퍼스타로 등극한 이후, 새로운 모습을 위한 노력을 통해 발전된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했다. 모두가 안된다고 손가락질할 때 특유의 목소리와 노력과 간절함으로 슈퍼스타가 된 이후, 그는 그다음을 이어나가지 못했고, 자신을 관리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당신이 이 전설의 슈퍼스타가 그 젊은 나이에 속이 다 썩어문들어져 죽어간 인생을 보면서도 자신의 삶에 반추하여 가슴 뜨끔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얼마나 더 크고 아픈 회초리를 들어야 할지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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