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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10. 2022

일본으로 건너가 귀화하여 일본인으로 살았지만-1

한국인이라는 의식을 일본어 이름에 새기고 한국인으로 남다.

232번째 대가의 이야기.


일제강점기였던 1923년,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 와룡리에서 6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농의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에 어린 시절엔 공부엔 관심이 없고 골목대장을 하는 등의 천방지축 문제아로 유명했다. 그는 9살 때부터 차비(chabi)라는 무술을 익혔으며 그의 아버지가 고용한 북한 출신의 농꾼으로부터 소림 쿵후(少林工夫)를 배웠다. 그렇게 그는 어려서부터 무도에 관심을 가졌다.


1932년 아버지가 세운 김제의 용지 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택견·씨름 같은 고유 무술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마을과 그 지역에서 하도 사고를 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에 화가 난 그의 아버지가 사고뭉치 아들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경성(서울)의 경성 영창(중) 학교로 입학시켜 유학을 보내 버린다.


그의 부모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으나 경성 영창 학교는 서양식 기독교 학교였기에 그는 서양식 신식 교육과 서적에 큰 자극을 받게 된다. 민감하던 사춘기 시절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를 잃고 큰 감명을 받아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라는 구절을 평생 수없이 인용하며 자신의 인생 모토로 삼게 된다.


이 시기에 같은 기독교 단체가 설립한 YMCA의 복싱 클럽에서 복싱을 익혀 대회에서 우승했고 보디빌더 와카키 다케마루의 <괴력법>을 읽고 감명받아 홀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몸을 단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타고난 기질 탓이었던지 경성 영창 학교에서마저 사고를 치고 퇴학당하고 그에게 기대가 컸던 아버지와의 감정에 골이 더 깊어져 당시 자신이 꿈꾸었던 파일럿이 되기 위해 부친의 반대에도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난다. 그리고 일본에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들른 부산에서 이후 그를 키운 스승이자 친우였던 강유류(剛柔流) 가라데의 조영주를 만나게 되고 야마나시 소년 항공학교(山梨少年航空學校)에 입학할 때까지 그에게 가라데를 지도해주게 된다.


그리고 항공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송도관 가라데와 강도관 유도를 배워 유도는 초단을 사사하고 1940년 4월에는 다구 쇼쿠 대학(拓殖大學)에서 공수 2단을 받았으며 대동류 합기유술을 수련하기도 한다. 다양한 무술을 두루 섭렵하며 종합 무술가로 성장의 기반을 닦은 그는 이후 1944년 태평양 전쟁의 학도병으로 차출되게 된다.


하지만, 끌려갔던 치바 항공대에서 다행히 전쟁의 막바지였던 터라, 끌려가서 건설현장 함바 노동자로 일만 잔뜩 하다가 일본이 패전하면서 본격적으로 무도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1945년 8월 도쿄에 공수도연구소를 열었고, 이듬해 4월에는 와세다(早稻田) 대학 체육과에 입학했다.

한국계 일본인 무도가로 극진공수도의 창시자로, 한국에서는 고우영의 <대야망>이라는 만화책에서 그의 일대기가 그려지면서 ‘최배달(崔倍達)’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진 귀화 전의 이름 최영의, 일본 본명 오오야마 마스터츠(大山 倍達; おおやまますたつ)의 이야기이다.


일본이 패전한 이듬해 ‘치야코(智弥子)’라는 일본인과 결혼한 후에 일본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이후 무도가로서 성장하여 극진공수도를 창시한 것으로 유명해졌는데, 그를 모델로 한 격투 만화 <공수도 바보 일대>가 일본에서 대히트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최영의의 일본 이름은 한국 독음으로 읽으면 ‘대산 배달(大山倍達)’이다. ‘대산(大山)’은 그의 성인 ‘최(崔)’의 파자(破子)이며, 한국인임을 잊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이름을 ‘배달(倍達)’로 했다.


그의 일대기를 방학기는 장편 무도 극화(劇畫) <바람의 파이터>를 스포츠서울에 무려 5년에 가까운 기간 인기리에 연재했다.(1989~1993). 연재 당시 1일 신문판매를 1백만 부에 이르게 한 유래 없는 인기를 누렸던 화제작이었으며 단행본 만화(전 5권ㆍ1994~1995)로도 나왔다.


1964년 실전 무도를 주창하며 극진회관을 설립, 지금도 일본을 대표하는 무도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해있다. 극진공수도를 넘어 공수도계 전체의 위상을 끌어올린 사람 중 한 명으로 일본인들에게도 존경받는 인물이다.(엄밀하게 말해 귀화하였으니 명백히 일본인들이 추앙할만한 일본위인에 꼽힌다.)

1945년 8월 동경에 공수도연구소를 창설하여 공수도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1946년 4월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체육과에 입학하는데, 그의 무도 인생에서 중요한 전기는 23세 때인 바로 그해, 1946년이었다.


그 해 9월 최영의는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1584~1645)의 <오륜서(五輪書)>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쌍검을 사용하는 니토류(二刀流)를 창시해 60여 번의 결투에서 모두 승리한 에도 시대 초기의 전설적 사무라이로, <오륜서>는 그가 자신의 무도 비법을 정리하여 기록한 책이다.


와세다 대학 고등 사범부 체육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는 와중에 같은 조선인이자 자신에게 가라데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던 스승이자 친구였던 조영주에 의지하고 어울린다. 이때 일본의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도 이념 갈등이 시작되었고, 민단 소속의 조영주는 최영의를 조총련과의 투쟁의 중심으로 데려간다.

조영주의 당시 사진

조영주는 최영의를 민단의 청년조직인 재일 조선 건국 촉진 청년동맹의 간부, 훈련부장, 건설 대대장 등으로 끌어올렸고, 싸움의 최전선에 있어야 할 최영의에게 조영주는 본격적으로 강유류(剛柔流) 가라데를 가르친다. 이때 강유류 초대 사범인 야마구치 고겐을 만나 사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조선인과의 싸움을 통해 실전 가라데의 기반을 쌓게 된 것이다. 그런 가슴 아픈 배경 때문인지 최영의는 이 시절의 이야기를 절대 이후에도 무용담이라며 늘어놓지 않았다고 전한다. 같은 민족끼리 싸운 것이 자랑스럽지 못하다는 그만의 원칙 때문이었다.

젊은 시절의 최영의

이 시기 최영의는 길에서 남자의 항문에 경찰봉을 밀어 넣는 미군을 때려눕힌 것을 시작으로 미군과도 잦은 싸움을 벌이곤 했다. 최영의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전후 당시 미군에 대한 일종의 원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최영의는 이런저런 싸움이 더해져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기 시작했고, 곤란에 처한 최영의에게 스승 조영주와 야마구치 고겐은 입산수도를 제안하게 된다.


최영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3년을 목표로 삼고 같은 조영주의 제자인 야시로와 함께 야마나기 현의 미노부 산에서 1차 입산하여 무도 수행을 시작한다. 판잣집에서 각종 수련 도구를 갖춰놓고 살았는데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의 저자 요시카와 에이지가 개인적으로 후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못가 야시로는 외로움과 격한 수련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 날 밤 사라지듯 도망쳐버렸고, 시간이 흐를수록 최영의도 회의감에 빠졌으나 조영주가 편지로 그를 격려하였고 하산의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한쪽 눈썹을 미는 걸 제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이 아득해지는 수련을 계속하던 차 요시카와 에이지가 더 이상 후원해 줄 수 없다는 통보를 전해오고 최영의는 14개월 만에 재정적인 곤란함을 이유로 하산하게 된다.


하산 몇 개 월 후인 1947년(쇼와 22년) 교토에서 개최된 전후 최초의 전 일본 공수도대회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우승 후 첫 입산수도 당시 약속한 3년을 채우기 위해 1948년 4월 치바 현의 기요즈미 산으로 들어가 1년 8개월간 입산수도를 마치고 내려온다.


이때 최영의는 기존 가라데의 슨도메 룰에 의문을 품고 있었던지라, 가라데 관계자들에게 직접 타격제를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에 대한 반말로 ‘현대 가라데는 무도도 격투기도 아닌 가라데 댄스다.’ 같은 발언들로 인해 일부 가라데 유파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최영의는 일본 각지의 유명 도장들을 찾아가 일명 ‘도장깨기’를 신청하며 전국을 돌기 시작한다. 그렇게 대표 사범들이 최영의에게 패배하고 도장을 그만두는 인원들이 많아지면서 그의 이름이 일본 무도계에서 알려지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그에게 역으로 도전장을 내밀며 결투의 나날로 채워나가게 된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도전 신청과 무도계의 비난에 난감해하던 최영의는 영화 <쿼바디스>에서 소와 주인공이 싸우는 장면에 영감을 받아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소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퍼포먼스로 어쭙잖은 자들이 자신에게 감히 도전장을 내밀지도 못하게 하겠다고 결심한다.

여담으로 이 소 잡은 일화가 원체 유명하다 보니 실제냐 연출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한데, 최영의 본인도 직접 설명하고 있듯이 가족들에게 직접 말했고, 최영의의 제자 겸 만화가 카지와라 잇키가 최영의의 30대 시절 일화를 <사나이의 성좌>에서 그린 적도 있는 걸 보면 아예 없던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메구로(目黑)에 있는 자기 집 아래에 오야마 도장을 개설하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아 오야마의 제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격투 형태의 가라데를 가르쳐 후일 극진가라데의 원형을 이루었다. 오야마 도장은 1956년 6월 릿쿄우대학(立敎大學) 뒤편으로 이전하였다.


이때 최영의는 사기를 당해 돈이 쪼들려 푼돈이나마 만져보려고 젊은 시절 했던 소 잡는 이벤트를 다시 시도했는데, 소가 도대체 덤비지를 않고 죽어라 도망만 다녀서 대결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관객들은 사기라며 돌을 던지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카지와라는 이때 수모를 당하는 최영의의 낙담한 얼굴을 보면서 안타까움에 ‘차라리 소뿔에 받혀서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적어도 저런 모욕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측은한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1950년에는 47마리의 소와 대결하여 이겼으며, 그중 4마리는 즉사시켜 용맹을 떨쳤다. 1952년 3월 일본 대표로 미국에 가서 미국 전역 32 군대서 11개월에 걸쳐 무술 시범 및 지도를 했다. 1953년 4월 미국을 다시 방문하여 시카고에서 소와 격투, 수도(手刀ㆍ손날)로 소뿔을 자르고 사나운 소를 한 방에 쓰러뜨림으로써 공수의 위력을 평가받았다.


<What is Karate?>(1958)라는 영문판 번역본이 미국에 시판되면서, 책 선전 겸 오야마 스타일의 가라테 극진회의 선전을 겸해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Madison Square Garden)에서 경기를 추진하기도 했다. 이후 하와이에 지부를 개설하였으며, 워싱턴 FBI 본부와 미국 육군사관학교(West Point)에서 가라데를 지도하였다. 그는 유럽ㆍ남미ㆍ아프리카 등까지 극진회의 조직을 확장했고,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 후세인 요르단 국왕, 모로코의 하산 왕이 그에게 가라테를 배우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소와 대결하는 장면의 영화를 촬영하였다.


1959년 7월 하와이에서 제1회 하와이 공수도 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고, 1960년 미국과 유럽 등 16개 국 72개 지부 도장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196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 도장을 개설하고, 하와이에서 제1회 북미 공수도 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다.

1962년 11월 외국인 유단자 20명을 배출하였으며, 1963년 10월 국제 공수도연맹 극진회관을 결성하고 도장 건설에 착수하였다. 1964년 4월 오야마 총재의 요청에 따라 사토(佐藤榮作, 후일 총리대신) 회장과 모리(毛利松平, 후일 국무대신) 부회장의 취임식이 있었고, 같은 해 6월에는 극진회관 총본부를 준공하고 국제 공수도연맹 극진회관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특히 그는, 1963년 상대방 몸 앞에서 공격을 멈추는 일본 가라테에 싫증을 느껴 손에 의한 얼굴 공격을 제외한 모든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한 실전 가라테인 한국계 극진회관을 창설, 세계챔피언 문장규를 배출하기도 했다. 그는 수련자에게 펀치에 사명감을 갖고, 몇 년이고 일편단심 연습하면 언젠가는 그 펀치에 자신감을 얻게 되고, 자유자재로 펀치를 날릴 수 있게 된다고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1965년 캐나다 지부, 1966년 북미 연맹과 남미연맹, 1968년 유럽연맹, 중근동(中近東) 연맹, 남태평양 연맹, 1969년 남아프리카연맹, 동남아시아연맹 등 조직을 확대하였다. 1969년 9월에는 제1회 전 일본 공수도 선수권대회를 동경 체육관에서 개최하였다.


특히 이 대회는 가라데 이외에 유도, 킥복싱 등 다른 종목의 격투기 선수들이 참가하여 직접 타격제(直接打擊制)의 성격을 지닌 최초의 대회가 되었다. 그의 직접 타격제 가라데는 격투기의 역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여 그 뒤 격투기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그로 말미암아 극진회관이 융성하게 되었으며, 그 뒤 가라데 올림픽이라 불리는 세계대회를 개최하여 해외조직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71년 6월 뉴욕 맨해튼에 미국본부도장을 개설하고 세계 각지구 연맹장을 임명하여 세계 조직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1975년 11월 제1회 오픈 토너먼트 전 세계 공수도 선수권대회를 동경 체육관에서 개최하였는데 36개 국 128명의 선수가 출전하였다. 제2회 대회는 1979년 11월에 일본 무도관에서 개최하였는데 45개 국 150여 명의 선수가 참가하였고, 관중도 3만 2000명이나 되었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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