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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13. 2022

일본으로 건너가 귀화하여 일본인으로 살았지만-2

한국인이라는 의식을 일본어 이름에 새기고 한국인으로 남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201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무도를 지향한 극진가라테의 창시자답게 그는 가장 위대한 실전의 고수로 평가된다. ‘신의 손(God's Hand)’이라는 칭호는 그런 평가를 집약하고 있다.


1951년 3월 도쿄에서 유도·검도의 고수와 대결한 것을 시작으로 그는 세계를 돌며 사바트(프랑스 무술)·복싱·타이복싱·레슬링·카포에이라(발리 무술)·쿵후 등 수많은 무도의 고수들과 100번이 넘는 대결을 펼쳤다. 톰 라이스(미국 레슬러, 1954년)·보몬(프랑스 사바트 고수)·무이슈킨(무체급 레슬러)·블랙 코브라(태국 무에타이 웰터급 챔피언. 이상 1957년) 등이 그 대표적 상대로 손꼽힌다. 1954년 현풍관 도장에서 유도 고단자 100명과 대결한 것도 그를 유명하게 만든 일화 중에 손꼽히는 일화이다. 그것은 모두 격투에 가까운 실전이었고, 한 번도 패배하지 않는 신화를 남겼다.

해외의 격투기들을 체험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자신의 공수도 도장인 대산 도장(大山道場)을 열었지만 이 최초의 도장은 부지 사기사건을 당하며 문을 닫았다. 그전까지는 미국에서 모은 재산으로 꽤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사기사건 이후에는 전기도 끊긴 초라한 달동네에서 생활하며 힘든 시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듣고 알음알음 찾아오는 젊은이들 때문에 다시 도장을 열었고, 이때 영문으로 쓴 가라테 기술서 <What is Karate?>, <This is Karate>를 출판했는데 이것이 해외에서 히트를 치면서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이전의 상태로 빚을 다 갚고 회복하고, 덕분에 일본인 제자들 뿐 아니라 해외에서 온 외국인 제자들까지 모여들면서 도장은 날로 번창했다.


일본에서는 그냥저냥 한 수준의 인지도였던 최영의가 오히려 해외에서 먼저 인지도를 얻은 셈. 젊은 시절 미국 등 세계에서 싸우고 다녔던 덕분에 입소문과 마케팅 효과가 덕을 톡톡히 본 셈이기도 했다.


이 당시의 도장 풍경은 변두리의 허름한 도장에 다양한 인종의 덩치들이 우글우글 몰려 거의 싸움 수준의 무지막지한 수련을 하는 살벌하고도 이색적인 모습이었다고 한다.

1971년 일본의 유명 스포츠 만화가인 카지와라 잇키(梶原一騎)가 원작을 맡은 만화 <공수도 바보 일대(空手バカ一代)>의 대히트로 최영의는 단순히 격투기 관련 인물만이 아닌 일반 대중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본 내에서 초 유명인사가 되어버린다.


이때 최영의는 상당한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극진 공수를 단순한 무술도장 수준을 넘어서 사실상 거대기업 수준으로 성장시켰고, 사회적인 인지도와 함께 그 영향력도 상당한 수준으로 거대해진다.


하지만, 조직이 이렇게 극진공수도가 성장하면서 자연히 이런저런 잡음도 생기게 되는데, 최영의가 살아있을 때는 워낙 총수로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던 탓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최영의 사후 극진공수도가 파벌 싸움 등으로 분열되는 과정을 보면 최영의의 카리스마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반증한다.

<공수도 바보 일대(한국명 ‘무한의 파이터’)>는 지금도 일본에서 격투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억의 만화지만 작가가 멋대로 최영의의 출생 배경에 대한 설명은 빼면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옹호를 집어넣거나 실제 수련이나 대련 과정과는 관계없이 판타지적인 내용을 마구잡이로 그려 넣어 사실 왜곡이 많다는 비판도 받았다. 심지어 날아오는 총알을 잡는 묘사까지 그려 넣는 바람에 그것과 관련한 질문을 최영의가 받았을 때 매우 난처해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후 한국에서도 전술했던 <바람의 파이터>나 <대야망> 같은 만화책들이 히트를 치면서 ‘최영의’라는 이름이 많이 알려지게 된다. 만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현실성을 초월하는 판타지적 요소에 대해서는 굳이 실화였냐 아니었냐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다.


나중에 오야마의 실제 생애를 다룬 자서전 등이 발간되어 그가 한반도 태생이며 작가의 왜곡에 의해 판타지적으로 과장된 부분들도 있음이 알려졌으나 여전히 극진회관의 대스승으로 존중받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도 잘못 알려진 일화들을 실제라고 믿는 경우도 존재한다.


어쨌든 이들 만화의 영향으로 이후 일본 매체 등에서 다뤄지는 격투기 바보 캐릭터는 최영의가 모티브인 경우가 압도적이 되었고, 가상의 실전 공수 유파는 극진회관을 모티브로 삼는 경우가 많게 된다.


만화 <바키>의 ‘오로치 돗포’ 같은 경우는 아예 대놓고 이미지를 차용하기도 했다가 후반부로 가면 강력한 주먹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하나야마 카오루를 이용해 최영희의 명언까지 인용하고 있어 최영의의 일본 내 격투가 이미지는 그야말로 넘사벽인 셈이다.

격투 만화 <바키>에서 호랑이도 때려잡는 오로치 돗포

40대 이후로는 제자들을 키우는데 매진하여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격투가 기질이 어디 가진 않았는지 하루에 최소 10명 이상과 대련 연습을 계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본인 몸을 혹사시키다 보니 이후 정형외과 의사인 장남 최광범도 증언했듯 말년에는 관절염 등으로 이래저래 상당히 고생을 했다고 알려졌다.


밖에선 절대 무술가 이미지가 있으니 격파도 하고 정정하게 돌아다니는 듯했지만 집에 오면 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며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평생 현역을 추구했기에 사망 4~5년 전까지도 자기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는 폐암에 걸려 치료를 받다 호흡부전으로 1994년 도쿄도 츄오구에 있는 세이 루카 국제병원에서 향년 만 70세로 사망하였다.


이틀에 걸쳐 일본인으로 귀화했던 ‘최영의’라는 무도인의 삶을 당신에게 소개한 이유는 그를 막연하게 국뽕 의식으로 가지고 한국인 ‘최배달’로 추켜세우는 이들이나 일본에 귀화하여 일본인들에게 존경받는 무도인이니 한국인이 존경하면 안 된다고 망발을 내뱉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고,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통해 그 판단을 명확하게 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함이다.


최영의가 일본에 귀화했지만 한국 국적도 포기하지 않았던 복수국적(이중국적) 자라고 아는 사람들이 있고 롯데 신격호 창업주와 비슷한 케이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는 모두 사실이 아니다.


애당초 신격호는 귀화 여부조차 불분명해서 의혹을 받고 있는 케이스고, 한국의 경우 2010년 5월 3일까지는 자동으로 바티칸 국적이 부여되는 추기경 정도를 제외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복수국적을 허용하지 않았던 나라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 전의 사안들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최영의는 단지 귀화 후 한국 대사관에 국적상실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국적 말소 처리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고 사실 최영의가 일본에 귀화한 순간 한국의 국적법상 한국 국적을 자동 상실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 글의 제목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실제 국적 여부를 떠나 최영의 본인은 상기했듯 일본인들에겐 어색한 오오야마 마스타츠(대산 배달)라는 특이한 이름을 고집한 것이나 후계자로 재일 한국인 문장규를 선택한 점, 본인 스스로 한국계에 대한 자부심이 남아있다는 인터뷰를 공공연히 일본 언론들과 한 내용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정체성은 분명하게 세운 올곧은 무도인이었다.

최영의는 전 세계 140여 개 가맹국을 관할하는 국제 가라테 연맹(1964년 발족) 총재이면서도 한국 태권도의 세계 진출에도 보이지 않게 협조했다. 1970년대 최배달의 활약상을 묘사한 수많은 국내 만화, 소설, 애니메이션에서 그의 무술은 극진공수도가 아닌 ‘태권도’란 이름으로 세상에 소개되었다.


태권도를 위해 그가 기여한 또 다른 업적은 올림픽에 진출하고자 하는 일본 가라테의 통합이 지연되었던 일화로도 유명하다. 생전에 그는 자신의 극진류 경기 방식을 배제한 어떤 가라테 룰도 올림픽에 채택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의 사후에는 한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이 수여되었다.


최영의의 세 아들 또한 학창 시절엔 주먹에 일가견이 있어 다들 큰 싸움으로 한 번 이상은 정학을 당했다고 한다. 큰아들인 최광범은 고등학생 때 1살 위 복학생을 포함한 3명을 상대로 싸움을 했는데 압도적으로 3명을 때려눕혀 전설이 되었는데, 실제 당시 사진을 보면 아버지를 능가하는 피지컬을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후 의대에 진학하여 정형외과 의사의 길을 걸었다.


둘째 아들인 최광수는 2022년 기준 만 46세이지만 여전히 현역 주짓수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여담으로 최광범의 장남, 즉 최영의의 장손자의 경우 최광범에 따르면 태권도를 배우고 있다고 전해졌다. 그는 자신이 극진공수도의 창시자였지만 극진공수도만 최고라는 식의 편협한 사고관을 갖진 않았던 태도를 보였는데, 아들 중 한 명이 가라테를 배우고 싶다고 아버지인 그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제일 좋은 도장이라면서 집 근처 킥복싱 도장에 보냈다고 한다.


실제로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을 키운다는 따위의 행동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무도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의 대를 잇는 정치인들에게 귀감으로 소개되곤 한다.

그의 한국 국적 세 아들

최영의의 세 아들은 한국 호적에 올랐다. 한국인 부인과의 정식 결혼에서 태어난 장남 최광범은 최영의가 52살에 본 아들이다. 이외에도 현역 가라테 선수로 활동 중인 차남 최광수를 포함하여 3명의 아들은 한국에서 출생하여 활동 중이다. 일본 호적에서는 치야코(智弥子) 사이에 딸 3명이 있다고 알려졌다.


일본에는 중혼죄가 있는데, 그의 경우 일본 법원에서 한국 호적과 일본 호적에 기록된 생일이 다르므로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현재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그에 대한 면죄부를 주기 위한 방편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020년 최영의의 장남인 최광범의 회고에 따르면 1993년 자신이 재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 최영의는 “최선을 다해서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해라. 최선을 다해서라는 것은 한 발 빼는 것이다.”라고 했었다고 한다. 삼수를 하여 1995년 최광범이 의대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의 입학 한 해전에 최영의는 세상을 떴다.


당시 최광범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일본 도쿄에 가려했으나, 최영의는 이를 거부하고 부인만 오라고 했다고 한다. 나중에 최광범은 자주 한국에 와서 본인들과 놀아주던 아버지였지만 그런 그였기에 마지막에 약한 모습은 더 아들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할 때, 그가 일찌감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으로 귀화했던 것은 편의를 위한 것이었지 한국인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가 그의 이름이 한국임임을 표방하고 당당히 방송과 언론의 인터뷰에서 공공연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례적으로 그의 그 당당한 모습 때문에 더욱 그를 올곧은 무도인으로 인정했다.

그에게 나라라는 개념과 범주가 크게 의미가 없었던 것은, 유도가 출신 프로레슬러 기무라 마사히코와의 우정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기무라 마사히코가 쇼와의 간류지마 당시 역도산에게 처참하게 깨지자, 친구의 원수를 갚겠다고 한동안 역도산을 쫓아다니기도 했다. 그에게는 일본인 친구가 같은(?) 일본인이라고 의미를 가졌다거나 하는 따위의 개념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정체성을 무엇으로 확인하는가? 당신의 국적이나 당신의 이름 등은 당신이 선택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제도권에 의해 불가피하게 당신에게 규정되어 있는 것들이라면 그것을 당신의 정체성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정체성이란 당신의 내면을 형성하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하고 당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것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핵심에 해당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몇 글자의 글로 정의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르겠으나 최영의의 말을 빌자면 다음과 같은 간략한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무술의 완성은 곧 인격의 완성이다.’


당신이 적당히, 그저 그렇게, 비겁한 변명과 가식으로 양심적인 소시민 코스프레를 한다고 해서 당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연기가 성공한 것이 아님을 당신이 알고, 내가 알며, 하늘이 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 조금이라도 옳은 것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실천을 보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저 한 덩어리 움직이는 고깃덩어리로 인생을 마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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