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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14. 2022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문학의 세계를 열었지만,

자신을 억누르던 정신질환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다.

233번째 대가의 이야기.


1882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옥스포트 인명사전을 제작했던 문학평론가 레슬리 스티븐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자녀 셋 딸린 미망인 줄리아 덕워스와 재혼해 자녀를 넷이나 더 낳았는데, 그중 셋째가 바로 그녀였다. 

아버지와 함께 한 그녀

집안의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지적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정신질환 증세를 보일 정도로 매우 예민한 성격이었던 그녀에게는 오히려 그 지나치게 지적인 분위기가 압도한다고 생각하여 상당히 억압적이고 우울하게 여기기도 했다. 


아울러 의붓 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녀가 평생 성(性)과 남성, 심지어 자신의 몸에 대해서까지 병적인 수치심과 혐오감을 지니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추정되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영국 고전과 빅토리아 문학을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배웠고, 1897년부터 1901년까지 런던 킹스 칼리지의 여성부에서 고전과 역사를 공부하였다. 또한 대학에서 여성 고등교육과 여성 인권 운동의 초기 개혁가들과 접촉하였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격려와 지원을 받으며 1900년대 초부터 전문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1895년에 어머니가, 1904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언니, 오빠와 함께 런던의 블룸즈버리에 있는 집으로 이사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재학 중이던 친오빠 토비는 클라이브 벨, 리튼 스트래치, 레너드 울프 같은 친구들을 집에 데려온다.

이때의 인연으로, 친언니인 모더니스트 화가 바네사 벨 등을 포함한 친구들, 훗날 ‘블룸즈버리 그룹’으로 알려진 젊은 지식인들의 모임이 결성된다. 소설가 E.M. 포스터와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역시 이 모임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권위를 조롱하고 파격적인 행동으로 명성, 또는 악명을 얻어 나갔다. 당시 여성에게 강요되는 규범에 따라 정식으로 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던 그녀였지만, 독학으로 쌓은 지식과 뛰어난 지성으로 당당히 ‘그룹’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20세기 영미 모더니즘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이자 의식의 흐름 기법을 고안한 선구자로 평가되는 몇 안 되는 여성 문호이자, 20세기 서양 문학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는 애덜린 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의 이야기이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26명의 서양 문학 정전(Western Canon)’에 울프를 포함시켰다.


1970년대 페미니즘 비평의 대두에 따라, 이전까지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간과되었던 페미니즘 작가로서의 측면들이 재조명되었고, 후대의 페미니즘 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명으로 재평가되었다.

하지만 이런 지적 자극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의 처지는 점차 불안해졌다. 늘 의지하던 언니 바네사는 클라이브 벨과 결혼해 독립했고, 오빠 토비는 병에 걸려 사망했다. 일종의 돌파구가 필요하던 바로 그 시기부터, 버지니아는 레너드 울프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훗날 버지니아의 ‘자살’로 인해 졸지에 그녀의 자살 원인을 제공했던 ‘나쁜 남자’라는 편견과 누명(?)을 뒤집어쓴 레너드지만, 그 둘의 부부관계가 안 좋았다거나 그녀가 남편 때문에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는 어떤 의미 있는 증언이나 증거가 나온 사실 없다. 

오히려 그녀의 마지막 편지에서처럼 정신질환 병력까지 있던 불안정한 버지니아를 30년간 지극정성으로 돌본 사람이 바로 레너드였으며, 그녀의 유작과 일기를 편집하고 출간한 인물 역시 레너드였다는 점에서 레너드가 받은 오해에 대해서 누명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지나쳐 보이지 않는다.


물론 두 사람의 관계가 그때 당시나 지금으로서나 ‘일반적’이라고 평가 내리기에는 상당히 특이한 면이 없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부부관계라고는 없는 결혼생활, 사랑보다는 우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어울릴 법한 특별한 유대관계를 가진 결혼생활이었기 때문이다.


워낙 남성과 결혼과 아기에 대한 혐오 감정을 가지고 있던 버지니아가 그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 자체가 굉장히 특이한 것이었고 그런 그녀를 배우자로 받아들이겠다고 결혼을 결심한 레너드 역시 상당히 독특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미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버지니아의 태생적인 정신질환은 그녀가 살아있는 내내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을 힘겹게 만들었다.


결혼 직후인 1913년, 버지니아는 수면제를 과다하게 복용하는 방식의 자살을 시도하지만 다행히 미수에 그친다. 레너드는 생계수단 겸 아내를 위한 소일거리를 마련해주고자 수동식 인쇄기를 구입해 직접 출판사를 차린다. 당시 두 사람이 살던 집의 이름을 딴 ‘호가스 출판사’는 이후 버지니아의 작품 대부분은 물론이고, T.S. 엘리엇의 <황무지> 등 유명 작가들의 소품을 출간해 명성을 얻은 출판 명가로 자리 잡게 된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미 결혼하기 전인 1905년부터 여러 잡지나 신문에 문예비평과 에세이를 기고했으며, 결혼 후에도 주로 <타임스>의 문예면에 서평을 발표했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 버지니아는 이미 런던 문예계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언니 버네사가 그려준 초상화

1915년 첫 소설 <출항 (The Voyage Out)>을 출간한 후, 그녀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인 <댈러웨이 부인(Mrs. Dalloway)>(1925), <등대로(To the Lighthouse)>(1927), <올랜도(Orlando)>(1928)를 연달아 출판하였다.


그녀의 소설들은 서술에 대한 비선형적인 접근으로 장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의식의 흐름'에 따른 서술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묘사하고 몽타주 같은 기억의 각인을 묘사하였다. 또한 마르셀 프루스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후기 인상파 화가 등 그 시대 예술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울프의 작품은 잠재의식, 시간, 인식, 도시와 전쟁의 영향을 포함한 모더니즘의 핵심 모티브를 탐구하였다.


특히 케임브리지 대학 뉴넘 칼리지에서의 강연을 토대로 한 에세이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 Own)>(1929)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훗날 페미니즘의 교과서로 추앙된다.

하지만 버지니아의 삶이 오로지 영광과 행복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예민한 신경은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안정적이기는커녕 더욱 날카롭고 힘겹게 큰 고통을 가차 없이 생산해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울프 부부는 런던을 떠나 서식스 주 로드멜의 우즈 강 근처 별장에서 지내기로 한다.


전원생활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의 불안 증세는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보다 못한 레너드가 억지로 병원에 데려가 의사와 상담을 하게 해 주고 돌아온 1941년 3월 28일 점심께, 그녀는 우즈 강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유작이 된 소설 <막간>을 탈고한 지 겨우 한 달 뒤의 일이었다.


행방불명되었던 그녀를 찾으러 나선 사람들은, 강가에서 그녀의 지팡이와 발자국을 발견하였다. 그녀의 시체는 20일이나 지나서 발견되었는데 당시 입고 있던 코트에서 돌이 발견되었고 서재에는 남편과 언니에게 남기는 유서가 있어서 입고 있던 코트에 돌을 가득 채운 후 강으로 들어가 자살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유서로 추정되는 그녀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Tuesday.


Dearest,


I feel certain that I am going mad again. I feel we can't go through another of those terrible times. And I shan't recover this time. I begin to hear voices, and I can't concentrate. So I am doing what seems the best thing to do. You have given me the greatest possible happiness. You have been in every way all that anyone could be. I don't think two people could have been happier till this terrible disease came. I can't fight it any longer. I know that I am spoiling your life, that without me you could work. And you will I know. You see I can't even write this properly. I can't read. What I want to say is I owe all the happiness of my life to you. You have been entirely patient with me and incredibly good. I want to say that—everybody knows it. If anybody could have saved me it would have been you. Everything has gone from me but the certainty of your goodness. I can't go on spoiling your life any longer. I don't think two people could have been happier than we have been. V.


그대에게,


내가 다시 미쳐가고 있는 것이 확실해요. 그 끔찍한 시간들을 다시 한번 되풀이할 수는 없어요. 이번에는 회복하지 못할 거예요.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고 집중력을 잃었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어요. 당신은 내가 받을 수 있는 모든 행복을 주었어요. 누가 했더라도 당신보다 낫지 않았을 거예요. 이 병이 오기 전까지의 우리들보다 어느 두 사람도 더 행복하진 못했을 거예요. 이제는 견딜 수 없어요. 당신의 삶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 없이도 잘 해낼 거예요. 곧 알게 될 거예요. 있잖아요 이제 글도 제대로 못 쓰겠어요. 읽을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내 모든 행복을 당신에게 빚지고 있다는 거예요. 지극정성으로 나를 더할 나위 없이 잘 대해 주었죠. 이 말은 하고 싶어요-누구나 아는 사실이라고. 누군가 나를 구할 수 있었다면 그건 당신이었을 거예요. 당신이 남긴 상냥함 외에 내게 남은 것은 없어요. 계속 당신의 삶을 망치며 살 수는 없어요. 어느 두 사람도 우리보다 행복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V.




자살의 원인은 우울증과 허탈감, 환청, 어린 시절 의붓오빠들로부터 받은 성적 학대, 정신 이상 발작에 대한 공포심 등의 복합적인 문제들이 쌓였을 것으로만 추정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유해는 화장되어 서식스 로드멜에 있는 몽크 하우스 정원의 느릅나무 아래에 묻혔다.

버지니아 울프는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소설 기법의 개척자로 평가된다. 즉 특별한 줄거리가 없고, 등장인물의 의식, 즉 두서없이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이며 느낌을 고스란히 서술하는 기법이다. 


지금은 오히려 버지니아의 소설을 ‘지루하고 어렵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말았지만, 이 기법을 처음 도입한 버지니아의 대표작들은 당시에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큰 성공을 거두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버지니아가 제임스 조이스를 그다지 호의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영미권에서는 사실상의 금서 처분을 받은 <율리시스>를 출간하겠느냐는 제의에 대해서는 단둘이 하는 출판사이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다는 이유로 정중히 사절했다.


하지만 버지니아를 실력 없는 소설가, 마치 난해함을 미덕이자 자기 과시로 착각한 부르주아 지식인에 불과한 것처럼 깎아내리는 시각도 있다. 허마이오니 리는 그것은 그녀의 유명세가 오히려 그녀의 발목을 잡은 것뿐이라며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비록 (버지니아의) 많은 작품이 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의 정전으로 당당하게 자리를 잡았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이 또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읽히고, 과소평가되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초기 소설과 에세이처럼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작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버지니아가 남긴 여러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흥미롭고 개성적인 것은 바로 ‘에세이’다. 거기 드러난 명쾌함과 예리함만 보아도 결코 소설의 난해함을 이유로 들어 그녀의 작가적 재능 자체를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상대에 특강을 왔던 허마이오니 리

허마이오니 리는 버지니아에 대한 평가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녀는 누가, 언제, 어떤 맥락에서 읽는가에 따라서, 형식의 문제에 사로잡힌 난해한 모더니스트의 모습, 일종의 익살꾼, 신경증에 걸린 지식인 심미가, 창의력이 풍부한 환상적인 작가, 심각한 속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삶의 역사가, 성적 학대의 희생자, 레즈비언 여주인공, 또는 문화 분석가의 모습을 띤다.... (오늘날) 그녀의 지위는 자신의 업적을 강하게 의식했던 본인조차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높아졌다. 그리고 광기, 모더니즘, 결혼 등에 대해서 그녀가 불러일으킨 논의들은 결론을 얻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T.S. 엘리엇과 함께

영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던 학도라면, 그녀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오늘 그녀의 비극적인 삶을 당신에게 가져온 이유는 그녀가 여성문학을 대표하는 몇 안 되는 문호급 작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그런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꽃 피우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영원한 실패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동정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그녀가 처음 공식적으로 정신이상증세를 보였던 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두 번째 투신자살로까지 이어졌던 공식적인 정신이상증세는 1904년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맞다. 그녀는 그만큼 여리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섬세한 영혼을 가진 존재였다. 그녀의 작품이 보여주는 ‘의식의 흐름’은 그녀의 연구와 끊임없는 노력에 의한 산물이라기보다 그녀의 삶이 그린 궤적에 가까운 것이 표출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좌절할 만큼 슬픈 일은 온다. 여러 문학평론가들이나 정신분석을 시도했던 이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그녀의 자살에 여러 복합적인 원인을 투영한다. 하지만, 의붓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그렇게 의지하던 정신적인 보루이던 부모님의 사망이 힘겹지 않은 영혼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좌절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랴?


왜 모르겠는가? 그 갈가리 찢겨나가는 고통과 슬픔을. 그녀 역시 그녀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힘겨웠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한 번뿐인 자신의 생에 실패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처럼 되지 말라고, 그녀가 그렇게 사랑스러운 마음을 담아 쓴 유서 같지 않은 편지를 당신에게 원문과 번역까지 보여준 것이다.


지지 마라. 스러지지 마라.


당신이 의지하고 사랑하던 이가 사라져 갔다고 하여 그를 따라간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결정은 없다. 반대로 생각해보라. 당신이 사랑에 마지않는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죽음으로 인해 당신을 따라가겠다는 마음으로 스스로 인생을 마감하겠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두 팔 벌려 안아주며 환영할 것인가?


남겨진 자는 ‘불가피하게’ 먼저 간 이들의 몫까지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 슬픔을 모두 짊어지고 그들이 누렸어야 할 행복한 시간과 마음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결코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그들을 기려줘야지 그들을 여윈 슬픔으로 무너져내려서는 안된다.


당신에게는 아직도 당신을 세상에 내어준 부모님이 계시고,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가족들이 있으며, 당신이 죽으면 당신이 지금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좌절과 황망함을 느낄 사랑하는 이들이 있단 말이다.


가슴에서 돋아나는 슬픔을 잘라 칼을 만들어 그 슬픔들 모두 잘라내고 눈물을 삼키며 살아내라. 당신이 살아내며 가슴에서 슬픔 아닌 사랑과 감사함이 함께 돋아나고 있음을 확인하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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