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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08. 2022

오디션 떨어지고 트럭 운전하며 자비 음반이나 냈지만-3

‘로큰롤의 제왕’이라 불리며 대중음악의 판도를 뒤바꾸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192


1956년 10월 엘비스는 싱글 <러브 미 텐더>(1956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발표해 히트시켰고, 11월 자신이 처음 주연을 맡은 로버트 D. 웹(Robert D. Webb) 감독의 영화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1957년 <투 머치(Too Much)>, <올 슉 업(All Shook Up)>, 유명 작곡·작사가 팀인 제리 리버 앤드 마이크 스톨러(Jerry Leiber And Mike Stoller)가 만든 <제일 하우스 록>(이상 1957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 등의 노래를 히트시켰다.

1958년 3월 24일, 아칸소 주 포르 샤피에서 선서하는 프레슬리


1957년 말, 미국 국방부로부터 육군 병 징집영장을 받았다.(미국은 1973년까지 징병제를 실시했다). 본래 1958년 1월 징집 대상이었으나, 영화 스케줄과 겹쳐지자 팬들의 성화로 당국에서 특별히 60일 징집 연장을 허락했다. 이 상황은 대통령 아이젠하우어에게까지 보고 되는 사건이었다.


육군에서는 그의 인기를 활용하기 위해 연예병으로 복무하기를 권했지만, 엘비스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기왕 가는 군대인데 일반 전투병으로 복무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다지는 계기로 활용할 것을 결정한다. 1958년 3월에 포마드 기름을 발라 넘기던 머리를 짧게 깎고 군복을 입는다. 가을, 엘비스는 육군 기초 훈련을 마치고, 독일 연방 공화국 내에 소재하는 제1기갑사단 소속 미군기지에 소총병으로 18개월이나 복무하였다.


수만 명의 여성 팬이 엘비스의 근무지 독일까지 따라갔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여전히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군에 있는 동안이던 1958년 8월 그의 어머니가 46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자, 엘비스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는 실의에 빠졌지만, 1959년 9월 파티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소녀 프리실라 보리외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60년 3월 2일, 엘비스는 독일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미국 뉴저지의 미 육군 포트 딕스 기지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1960년 3월 5일, 제대한 지 불과 보름 만에 내슈빌의 RCA 스튜디오 B에서 뽑아낸 싱글 〈Stuck on You〉는 발매와 동시에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가장 상위권을 점령했다. 곧이어 〈It's Now or Never〉, 〈Are You Lonesome Tonight?〉 같은 발라드곡이 포함된 포함된 《Elvis is Back!》도 음반 차트 2위에 등극하면서 성공을 거뒀다.  


〈It's Now or Never〉, 〈Are You Lonesome Tonight?〉은 차례대로 미국 빌보드 차트의 넘버원 싱글로 자리했다. ‘엘비스는 섹시하게 노래하지 않았다. 외설적으로 노래했다’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데뷔 시절의 인기 요인이었던 빠른 템포의 곡에서 벗어나 스탠더드 팝 계열의 곡으로 변신을 꾀했다.


1960년 3월 12일 프랭크 시나트라 쇼가 마련한 《Welcome Home Elvis》 프로그램에 엘비스는 록 가수답지 않게 턱시도와 정장 차림으로 출연해 자신이 국민가수로 지향점을 조정하고 있음을 알렸다. 이 프로그램에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히트곡 <위치 크래프트(Witchcraft)>를 그와 듀엣으로 불렀다. 이때부터 음악적 방향을 로큰롤에서 스탠더드 팝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중반 엘비스 프레슬리는 가수로서의 활동보다는 영화배우로서 활동했고, 그의 복귀 후 첫 번째 영화는 미국 군인으로서의 공익적 이미지를 옮겨온 《지아이 블루》였다. 1961년에는 영화 《블루 하와이》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61년 6월에 발표한 또 하나의 히트 음반 《Something for Everybody》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그해 10월에 발표한 동명 영화의 사운드트랙 《Blue Hawaii》는 빌보드 차트에서 20주간 1위, TOP 10 차트에서 39주간 머무는 성공을 자랑했다. 음반에 수록된 발라드 넘버 〈Can’t Help Falling in Love〉도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군 복무 중에도 여전했던 인기는 엘비스가 과거의 반항아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보다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주면서부터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십대외에 장년층에게도 인정받으며 인기의 폭은 넓어졌지만, 그 열기는 예전만 못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엘비스는 음악보다 영화 쪽에 전념했고, 촬영이 없을 때에는 멤피스의 저택 그레이스랜드에 은거했다. 이른바 ‘멤피스 마피아’로 통하는 그의 친구들이 일종의 친위대 노릇을 하며 갖가지 향락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까닭에 종종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데뷔 시절의 인기 요인이었던 빠른 템포의 곡에서 벗어나 It's Now or Never, Are You Lonesome Tonight 같은 스탠더드 팝 계열의 곡으로 변신을 꾀했지만, 팬들의 반응은 이전만큼 열광적이지 않았다. 비틀즈를 위시해 크림, 지미 헨드릭스, 도어스 등이 줄줄이 등장해서 로큰롤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던 그즈음, 엘비스는 3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물 간 스타로 여겨졌다. 특히 비틀즈는 1965년의 미국 투어 도중에 그레이스랜드에서 엘비스와 역사적인 만남을 갖는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우상 엘비스는 1961년 이래 영화 말고 음악 공연은 한 번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할리우드 배우로서의 활동에 집중한 1960년~1967년에 엘비스 프레슬리는 음악적으로 심각한 슬럼프 시기를 겪었고, 1965년 비틀즈가 엘비스의 캘리포니아 자택을 방문해 잼 세션을 나눴다는 것이 호사 거리가 됐을 뿐, 영화 출연 외에는 은둔과 칩거 생활이 계속되었다. 1967년 5월 1일, 엘비스는 독일 군 복무 중에 만난 22세 소녀 프리실라 보리외와 7년간의 연애기간을 접고 라스베이거스 한 호텔에서 10분 만에 결혼식을 끝낸다. 당시 엘비스의 나이 33살이었다. 결혼하게 된다. 결혼 후 2개월 후 프리실라는 임신을 발표했고, 딸 리사 마리를 낳은 후 부부는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에 외동딸 리사 마리가 태어났지만, 결혼 생활은 5년 만에 파경을 맞는다.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마이클 잭슨의 첫 배우자였으므로 엘비스 프레슬리는 마이클 잭슨의 장인이 되면서 세기의 결혼이라는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1968년 12월, NBC 방송국은 엘비스의 복귀 프로그램을 특집 방송으로 편성했다. 가수로서 복귀를 선언한 엘비스는 컴백 공연을 통해 재기에 성공했다.


1969년 7월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4주간 총 57회의 공연을 선보였고, 13만 명의 관객이 동원됐다. 그해 8월에 발매한 싱글 〈Suspicious Minds〉는 엘비스의 18번째 넘버원 싱글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 곡은 엘비스가 기록한 마지막 빌보드 넘버원 싱글곡이다. 그는 1969년에 연속 출연한 《차로》, 《습관의 변화》를 끝으로 더 이상 영화 출연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70년 6회에 걸친 투어 중 총 2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고, 존 레넌, 밥 딜런,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보위, 아트 가펑클 등이 함께 출연한 1972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4회 공연도 완전 매진을 기록했다.

1970년 12월 21일,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만난 프레슬리


엘비스 프레슬리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만남은 프레슬리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1970년 12월 21일, 프레슬리는 자신의 리무진을 타고 백악관을 찾았으며 자신의 경호원을 통해 닉슨 대통령과의 만남을 요청하는 편지를 백악관측에 전달했다. 록스타로서 정부의 ‘마약과의 전쟁’을 돕고 싶다는 게 만남을 요청한 이유였다.


재미있게도 프레슬리는 이 편지에서 마약 남용의 폐해와 공산주의 세뇌 기술을 심도 있게 연구했다면서 마약국 연방 요원 배지를 요구했다. 그는 ‘연방요원증을 받을 때까지 백악관 앞에 있을 것’이라며 배지를 받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다. 백악관 비밀경호국 요원들은 당시 닉슨 전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던 버드 그로그에서 이를 보고했고 프레슬리의 팬이었던 그로그는 프레슬리와 만난 뒤 그가 진심이라고 판단하여, 대통령과의 만남을 주선하기에 이른다.


프레슬리는 2시간 30분 뒤 검은색 벨벳 오버코트, 금도금 벨트, 검은색 가죽 부츠 등 특유의 화려한 의상을 입고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다. 그로그는 프레슬리가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갈 때 긴장으로 굳어졌다면서 프레슬리가 자신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대통령 책상 앞까지 갈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프레슬리와 닉슨은 30여 분간 환담을 나눴으며 프레슬리는 자신의 딸 사진과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으로부터 받은 셔츠 소매 단추 등을 닉슨에게 보여줬다. 또 미 전역의 경찰 배지 등을 보여주며 마약국 배지를 갖고 싶다고 말했고 닉슨을 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줬다. 이 내용은 프레슬리의 요청에 따라 1년 이상 극비에 부쳐지다 1972년 1월 27일 워싱턴 포스트에 의해 기사화된 내용이다. 1970년 12월 21일에 백악관에서 악수하는 기념사진은 미국 국립 기록 관리처 문건 중 최다 열람 요청을 기록한 사진이다.

1973년 1월 하와이주 호놀룰루 인터내셔널 센터 아레나(Honolulu International Center Arena)에서 전 세계로 위성 생중계되는 쿠이 리 암 기금(Kui Lee Cancer Fund)을 위한 자선 공연 《엘비스: 알로하 프롬 하와이(Elvis: Aloha From Hawaii)》에서 다시 한번 슈퍼스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 공연은 40개국 15억 명이 시청한 것으로 추정됐고, 무려 8만 5천 달러이나 기금을 모았다.


두 장의 LP, 4면에 담긴 이날의 공연 음원은 《Aloha from Hawaii via Satellite》이라는 타이틀로 발매했고, 음반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이 화려한 하와이에서의 위성 생중계 이후 엘비스 프레슬리는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해 10월 9일에 그는 아내 프리실라와 합의 이혼을 하게 된다.  


그는 이혼에서 오는 상실감으로 인해 폭식을 하기 시작했고, 한때 74kg이던 몸무게는 117kg에 이르렀다. 그는 잠들기 위해 수면제를 복용하고, 잠을 깨기 위해 각성제를 복용하며 8개월 동안 9000개의 약을 먹은 것으로 전해진다. 멤피스의 마피아라 불리던 호위병 친구들은 엘비스의 추락을 부추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레이슬랜드에 세워진 프레슬리의 묘비


1973년부터 엘비스는 각성제, 진정제 등 각종 약물 남용으로 인해 몇 차례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항간에 알려졌다. 별 이유 없이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1977년 8월 16일, 엘비스 프레슬리는 미국 테네시주의 멤피스에 위치한 자택 그레이슬랜드의 욕조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향년 42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지만, 일각에서는 그의 약물 남용이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한편, 관계자들은 어째서인지 극구 말을 아끼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종종 논란이 되고 있다. 갑작스러운 타계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오늘날 멤피스는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팬들이 순례하는 엘비스의 성지가 되었다.


2010년대 후반에 이르러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망한 진짜 원인이라는 주장이 언론에 공개된 바 있다. 그것은 엘비스 프레슬리는 평소에 변비를 지병으로 앓고 있었으며 특히 항문에 문제가 많아 제대로 화장실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때문에 엘비스 프레슬리는 1975년경부터 대변을 거의 보지 못해 이로 인해 심하게 고통받았으며 그 때문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몸이 변 중독으로 인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으며, 주치의가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항문 이식 수술을 권유했으나 그가 연예인이라는 신분으로 인한 중압감 때문에 이를 망설였다는 것이다.  

결국 엘비스 프레슬리는 변비로 인한 대변 중독으로 인해 그로 인한 여러 가지 합병증을 앓아왔고 결국 그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 아주 오랜 후에 밝혀졌다. 실제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구를 부검한 결과 대변이 대량으로 검출되었고 대장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데다가 중독으로 인한 붓기 증상이 발견되었음이 기록에 남아 있다.


엘비스는 1972년에 열린 제14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고, 사후에도 198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1998년 컨트리 음악 명예의 전당(Country Music Hall Of Fame), 2001년 가스펠 음악 명예의 전당(Gospel Music Hall Of Fame), 2007년 로커빌리 명예의 전당(Rockabilly Hall Of Fame)에 헌액 됐다. 2006년 그가 살았던 그레이스랜드는 미국 국가유적(National Historic Landmark)으로 등록되었다.  

한편 2002년 네덜란드의 디제이 JXL이 리믹스한 엘비스의 노래 <어 리틀 레스 컨버세이션(A Little Less Conversation)>은 2002년 영국 싱글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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