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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07. 2022

오디션 떨어지고 트럭 운전하며 자비 음반이나 냈지만-2

‘로큰롤의 제왕’이라 불리며 대중음악의 판도를 뒤바꾸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181


한편 필립스는 항상 흑인 음악인의 음악으로써 폭넓은 청중을 불러올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흑인 음악인의 음악이야말로 선 스튜디오에서 집중하며 녹음해왔던 작업한 것이었다. 당시 함께 일했던 키스커의 증언에 의하면 필립스는 종종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내가 만일에 흑인 사운드와 흑인의 기분을 가지고 있는 백인을 찾아낸다면 나는 백만장자가 될 테지.”


그해 6월 필립스는 지미 스위니의 발라드 〈Without You〉의 데모 녹음을 손에 넣는다. 그는 이것이 청소년들을 위한 가수로는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프레슬리가 스튜디오까지 찾아와 이 노래를 불렀지만 결과는 영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스는 프레슬리에게 부를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곡을 불러보라며 뭔가를 확인하고자 했다.


필립스는 자기가 소개를 받아 알고 있던 현지의 두 음악인들, 윈필드 스코티 무어와 업라이트 베이스 연주자 빌 블랙을 초대하여 프레슬리와 녹음 세션에서 무언가 만들어낼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불려 온 세션과 함께 7월 5일 저녁에 시작된 녹음은 늦은 밤까지 이어졌지만 전혀 이렇다 할 소득을 얻지 못했다. 이들이 지쳐 작업을 접고 집으로 떠나려고 할 때 프레슬리가 혼자서 기타를 들더니 1946년의 블루스 넘버, 아서 크루덥의 〈That's All Right〉를 부르기 시작했다. 무어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난데없이 엘비스가 그 노래를 시작하더군요.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이며 완전 천방지축 망나니 흉내를 내기도 하고. 그러자 빌도 가만히 베이스를 잡고서 똑같이 프레슬리의 흐름을 맞춰주며 똑같이 천방지축의 흉내를 내지 뭡니까? 저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끌려 그들과 함께 연주했지요. 샘은, 아마 조정실의 문을 열었던 거 같은데... 그는 머리를 문틈으로 들이내밀고 ‘지금 뭣들 하는 거야?’라고 물었고 우리는 ‘우리도 잘 몰라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눈치를 보다가 ‘그럼 다시 해! 시작할 곳을 찾아야 하니까.’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필립스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그 무언가를 찾았다는 표정으로 재빨리 녹음을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그가 기다리며 찾고 있던 사운드였던 것이라는 확신이 온 것이었다.


3일 후 유명 멤피스 DJ 듀웨이 필립스는 자신의 《레드 핫 앤드 블루 쇼》에서 그렇게 녹음된 〈That's All Right〉를 틀었다. 방송국은 난리가 났다. 청중들은 전화를 마구 걸어 그 가수가 누군지 알아보고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었다. 반응이 폭발적으로 나오자 필립스는 남은 방송시간 2시간을 그 음반을 반복해서 트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생방송으로 프레슬리와 인터뷰한 필립스는 그가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를 자연스럽게 물어봄으로써 가수가 흑인이라고 잘못 짐작하는 사람들의 편견을 확실하게 깨 주려고 했다. 이후 며칠 동안 녹음에 참가했던 그 3인조는 빌 먼로의 블루그래스 노래 〈Blue Moon of Kentucky〉를 추가로 녹음하였으며, 이번에도 이전과 달리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었고 또 임시변통한 에코 효과까지 시험적으로 적용하였다.


샘 필립스는 이 효과를 이후 ‘슬랩 백’이라고 이름까지 붙였다. 그렇게 〈That's All Right〉를 A면에 싣고 뒷면에 〈Blue Moon of Kentucky〉를 실은 프레슬리의 싱글 앨범이 세상에 발표되었다.


세 사람이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서 공연한 것은 그 녹음을 한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은 7월 17일 본 에어 클럽에서였다. 프레슬리는 그때까지도 자신이 사용하던 초보자용 기타를 고집하였다. 7월 말 그들은 슬림 휘트먼이 헤드라이닝을 하는 오버튼 파크 셸에서의 공연에 출연했다.


여기서 엘비스는 자신의 전매특허이자 자신의 가장 잘 알려진 춤 동작인 건들거리는 이른바 ‘고무다리’를 대중들에게 처음 선보이게 된다. 리듬에 대한 그의 강한 반응과 많은 관중 앞에서의 긴장한 마음이 음악을 타기 시작한 프레슬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자신의 다리를 약간 떠는듯한 그만의 시그니처 동작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었다.

프레슬리의 펑퍼짐한 바지는 그의 작은 움직임마저도 큰 동작인 듯 강조시켰고 젊은 여자들은 잘생긴 그의 외모에서 나오는 그 특유의 동작 하나하나에 비명을 질러댔다. 무어는 당시 그 광경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기악 파트 도중에 그가 마이크에서 물러나서 연주하며 몸을 흔들어대더군요. 그러자 관중들은 미친 듯 환호했어요.”


타고난 쇼맨이던 블랙은 ‘와우’라는 소리로 프레슬리의 퍼포먼스에 호응하며 베이스에 올라탔고, 더블 릭을 때리며 또 새로운 비트를 선보이며 프레슬리에게 인상을 남겼다. 프레슬리는 나중에 블랙의 당시 연주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말 와일드한 사운드였어요. 꼭 정글 드럼 같이요.”


오래지 않아 무어와 블랙은 자신들이 종래 재적하고 있던 밴드 더 스타라이트 랭글러스를 탈퇴하고 프레슬리와 정기적으로 공연하게 되었고, DJ 겸 프로모터 밥 닐이 이 3인조의 매니저가 되었다. 8월에서 10월까지 이들은 이글스 네스트 클럽에서 공연하다가 녹음 세션이 있을 때마다 선 스튜디오에 들렀다.


아울러 프레슬리는 점차 무대에 익숙해져 가며 원숙한 퍼포먼스와 음악 실력을 갖춰갔다. 무어는 당시 변화를 거듭하며 성장하던 프레슬리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의 움직임은 실로 자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 한편 관객들에게 어떤 반응을 받는지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의식을 하고 있었지요. 프레슬리는 무언가 하나를 시도하면 아주 빠르게 그것을 발전시키고는 했어요.”


프레슬리는 10월 2일 내슈빌의 《그랜드 올 오프리》 무대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게 되었다. 관중들은 정중하게 그에게 반응하였고, 오프리의 매니저 짐 데니는 필립스더러 ‘나쁘지는 않지만 오프리에 맞는 가수는 아니다’라며 그를 평가했다.

1954년 11월 프레슬리는 오프리의 최대 라이벌이자 보다 모험적인 방송으로 인기를 몰아가던 《루이지애나 헤이 라이드》에서 공연하게 된다. 슈리브포트를 기반으로 한 이 프로그램은 28개 주 198개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되었다. 프레슬리는 첫 번째 세트에서는 신경과민으로 생각보다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두 번째 세트에서는 차분하고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후 하우스 드러머 D. J. 폰타나가 새로운 준비를 해왔는데, 프레슬리의 움직임을 자신이 스트립 클럽에서 마스터한 강세 있는 비트로 보완해주는, 특별히 준비된 것이었다. 공연을 하고 온 지 얼마 안 되어 헤이 라이드는 프레슬리와 1년 치 토요일 밤 공연 계약을 맺어놓는다.


원래 가지고 있던 기타를 8달러에 처분해버리고 마틴사의 악기를 175달러에 구입한 프레슬리는 텍사스주 휴스턴, 아칸소주 텍사캐나 등지에서 공연의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하게 된다.


미니 펄, 조니 호튼, 조니 캐시 등 많은 신출내기 퍼포머와 함께 프레슬리는 헤이 라이드의 스폰서 서던 메이드 도넛의 큰 지원을 받으며 성장해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도넛은 프레슬리가 평생에 걸쳐 사랑해 마지않은 음식이기도 했다. 프레슬리는 이 도넛 회사를 위해 ‘따끈한 글레이즈드 도넛 한 박스를 받는 대가로’라는 라디오 징글을 녹음하여 광고를 만들기도 했지만 결국 그것은 공개되지 못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첫 텔레비전 출연은 《루이지애나 헤이 라이드》의 KSLA-TV 텔레비전 방송을 통하여 성사된다. 이후 CBS 텔레비전 방송국의 《아서 고드프리의 탤런트 스카 우츠》에서 오디션을 보았지만 다시 탈락하고 만다.


1955년 초 프레슬리는 정기적으로 헤이 라이드에 출연하고 계속하여 투어를 돌고 평이 좋은 레코드를 출반함으로써 테네시에서 웨스트 텍사스에 이르는 점차 그 지역 스타에서 인지도를 높여갔다.

1월 닐은 프레슬리와 정규 계약을 맺으며 이것은 프레슬리를 톰 파커 대령이 주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대령은 닐이 생각하기에 누구보다도 음악 업계에서 프로모터로서는 뛰어난 사람이었다. 파커는 스스로를 웨스트 버지니아 출신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네덜란드 출신이었다.


대령은 컨트리 가수에서 루이지애나주 주지사가 된 지미 데이비스의 덕으로 명예 대령에 임관하였다. 최고의 컨트리 스타인 에디 아놀드를 성공적으로 매니지먼트하면서 파커는 새로운 넘버원 컨트리 가수 행크 스노와 같이 일하고 있었다.


파커는 프레슬리를 스노의 2월 투어에 공연할 수 있게 끼워주었다. 투어가 텍사스주 오데사에 닿았을 때 당시 19세 로이 오비슨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는 당시 자신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의 에너지는 엄청나더군요. 그의 본능은 그야말로 대단했어요... 저는 그 모습에 사고가 정지되어버렸습니다. 그것과 견줄 수 있는 문화적 레퍼런스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거든요.”


8월 선은 ‘엘비스 프레슬리, 스코티와 빌(Elvis Presley, Scotty and Bill)’로 크레디트 된 곡 10개를 발표한다. 최신 레코드에서는 드러머를 채용하여 취입을 진행했다. 이들 곡 중에서 〈That's All Right〉 같은 것은 멤피스의 기자에게 ‘흑인 재즈 필드에 속하는 R&B의 어법’으로 포장되어 표현되었고, 〈Blue Moon of Kentucky〉 같은 경우에는 ‘컨트리 필드 쪽에 더 가까운 것이지만 두 곡 모두 두 가지 다른 음악의 이상스러운 배합이 존재한다.’라는 마케팅 용어로 포장되어 대중에 공개되었다.


단순히 포장이 아닌 말 그대로 그런 음악 스타일이 그만의 스타일로 버무려짐으로 인하여 프레슬리의 음악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송출되기가 어려워진다. 닐의 회고에 따르면, 컨트리 음악 디스크자키는 소리가 너무 흑인 아티스트처럼 들려서 트는 것을 꺼렸고, 리듬 앤 블루스 방송국에서는 ‘너무 힐빌리스럽게 불러서’ 전혀 틀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이 음반 스타일이 전설이 되면서 이 같은 조합을 ‘로커빌리’라고 일컫게 된다.


이 음반 이후 프레슬리는 다양한 별칭으로 불렸는데, ‘웨스턴 밥의 제왕(The King of Western Bop)’, ‘힐빌리 캣(The Hillbilly Cat)’, ‘멤피스 플래시(The Memphis Flash)’ 등이 당시 그를 일컫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1956년 6월, 엘비스는 NBC 텔레비전의 《밀튼 벌 쇼》에 출연해 엉덩이와 다리를 흔들며 기타를 메고 히트곡 〈Hound Dog〉을 불렀다. 1956년 7월에는 NBC의 《스티브 앨런 쇼》에도 나왔다. 흰나비넥타이에 검정 연미복 차림으로 출연한 엘비스는 〈Hound Dog〉를 불렀지만 방송에 나간 시간은 채 1분도 안 됐다.


앨런은 녹화 뒤 ‘재능도 없고 바보 같은 가수’라고 그를 혹평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방송에 잠깐 나온 그 이튿날 싱글 레코드로 녹음된 이 노래는 공전의 초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1956년, 《에드 설리번 쇼》의 리허설 중인 에드 설리번과 프레슬리

엘비스가 경쟁 쇼에 먼저 나간 것에 화가 난 설리번은 “내 쇼에는 절대로 그 자를 출연시키지 않겠다”라고 선언했으나. 폭발적이 반응에 2주 만에 말을 바꿔 엘비스에게 5만 달러를 주고 3회 출연시키는 계약을 맺었다. 1956년 9월, 《에드 설리번 쇼》 첫 출연 때 엘비스는 〈Hound Dog〉와 〈Love Me Tender〉를 불렀다.


설리번 쇼의 명성에 한창 떠오르던 엘비스의 이름값이 합쳐져, 무려 5,500만에서 6,000만 명의 사람들이 공연을 시청했고, 미 TV 역사상 가장 높은 82.6%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이 상황에 대해 분석한 전문가들은 ‘프레슬리의 쇼 출연은 대공황과 2차 대전을 겪은 구세대와 베이비붐 신세대 간의 갭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였다.’고 설명한다.


방송사가 엘비스의 허리 윗부분만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당시 화면에 절반밖에 나 오지 못했다. 연출자 말로 루이스는 ‘그가 춤을 출 때에 여성팬들의 눈길을 끌려고 바지 속에 콜라 병을 넣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듬해 1월, 설리번은 마지막으로 출연한 엘비스에게 무려 7곡을 부를 수 있도록 시간을 내줬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1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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