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Jun 03. 2022

오디션 떨어지고 트럭 운전하며 자비 음반이나 냈지만-1

‘로큰롤의 제왕’이라 불리며 대중음악의 판도를 뒤바꾸다.

231번째 대가의 이야기.


1935년, 미시시피주 투펄로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이른바 ‘힐빌리’로 불리는 남부의 가난한 백인 계층이었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그의 아버지가 임시로 만든 두 칸짜리 샷건 하우스에서 자라야만 했다. 어머니는 목화밭이나 공장에서 일해 생계를 유지했고, 아버지는 한때 밀주 판매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원래는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그의 쌍둥이 형, 제시 가론 프레슬리(Jesse Garon Presley)는 그보다 35분 일찍 세상에 나왔지만 바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어머니의 외모와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아버지가 무능하고 폭력적인 까닭에 모자관계가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돈독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성회 교회를 다녔는데, 대부분의 사춘기 소년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그곳에서 초기의 음악적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경제적인 능력이 뛰어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변변치 않은 벌이 때문에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자주 이웃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정부로부터의 음식 원조를 받아 연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네 살이 되던 1938년, 그의 아버지가 수표를 위조한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임시 집마저도 잃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8개월간 감옥에 들어가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고 졸지에 그의 어머니와 아기였던 그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유랑 아닌 유랑을 해야만 했다.

엘비스의 생가

1941년 9월 그는 이스트 투펄로 콘솔리데이티드라는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곳의 교사는 그를 ‘보통(average)’이라는 평가로 그를 그다지 눈에 띄는 아이로 여기지 않았다. 아침 기도 때 레드 폴리의 컨트리 노래 〈Old Shep〉를 워낙 잘 불러 교사를 감동시킨 것으로 장기자랑대회에 출전하라고 종용당하여 대회에 나갈 준비를 하게 된다.


1945년 10월 3일 미시시피 앨라배마 페어 앤드 데어리 쇼에서 열린 대회 참가가 그의 첫 공식 무대 데뷔였다. 10살짜리 꼬마 소년은 카우보이 차림을 하고 나섰다. 그는 의자 위로 올라서서 마이크로폰에 대고 〈Old Shep〉을 멋지게 불렀지만, 결과는 5등이었다. 몇 달 후 소년은 자신의 생일을 맞아 첫 기타를 선물 받게 된다.

미국의 가수 겸 배우. 로큰롤의 탄생과 발전, 대중화에 앞장섰던 ‘로큰롤의 제왕’으로 불리며, 팝·컨트리·가스펠 음악에 이르기까지 대중음악 전반의 판도를 뒤바꿔놓았다고 일컬어지는 엘비스 에런 프레슬리(Elvis Aaron Presley)의 이야기이다.


처음 대중들에게 각인되었을 때는 ‘흑인음악을 구사하는 백인’이라는 독특함으로 음악을 시작하게 된 엘비스 프레슬리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문화적 아이콘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인종간 관계의 변혁기의 와중에 열정 넘치는 노래 소화능력과 성적으로 도발적인 공연 스타일, 인종 장벽을 넘나드는 그 영향 받음으로 인하여 엄청난 성공을 이룩한 대중음악계의 전설로 불린다.


대표곡으로 <하트브레이크 호텔(Heartbreak Hotel)>(1956), <하운드 독(Hound Dog)>(1956),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1956), <제일하우스 록(Jailhouse Rock)>(1957), <버닝 러브(Burning Love)>(1972) 등이 있다.

원래 다른 아이들처럼 생일선물로 자전거나 소총 같은 다른 선물을 바랐던 그가 기타를 받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의 시작이었다. 기타를 선물 받은 이듬해 프레슬리는 자신의 두 삼촌과 가족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에게 기본적인 기타 레슨을 받게 된다. 프레슬리는 후일 이렇게 말했다.


“기타를 들고, 사람들을 쳐다보고서는, 연주하는 법을 조금이나마 배웠답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하지 못했어요. 제가 원체 수줍음이 많아서요.”


1946년 9월 프레슬리는 새로운 학교인 밀람로 전학하게 된다. 그때가 그가 6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그는 외톨이로 통했다. 이듬해부터는 매일 학교에 기타를 들고 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점심시간에 노래하고 연주하고 있으면 힐빌리 음악이나 연주하는 ‘저질’이라며 힐난받기 일쑤였다. 당시 프레슬리 일가는 대체로 흑인을 이웃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프레슬리는 투펄로의 라디오 방송국 WELO의 미시시피 슬림의 방송의 애청자였다. 프레슬리는 슬림의 남동생에게 ‘음악에 미친놈’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 남동생은 프레슬리의 학교 친구여서 방송국까지 그를 데려가기도 했다.


슬림은 프레슬리에게 코드 테크닉을 직접 가르쳐주는 음악적인 스승이기도 했다. 프레슬리가 12살이 되었을 때 슬림은 그를 2회의 생방송 공연에 출연시키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프레슬리는 첫 회 출연에서는 긴장감에 압도당해버렸지만, 그다음 주에는 아무런 문제 없이 공연하면서 방송 울렁증을 금세 극복할 수 있었다.


1948년 11월 프레슬리 일가는 테네시주 멤피스로 이주하게 된다. 근 1년간을 빈민가에 속하는 루밍 하우스에서 전전한 끝에 이들은 ‘로더데일 코츠’라고 하는 공공주택단지의 침실 두 개짜리 아파트에 겨우 들어가서 살 수 있게 된다. L. C. 흄스 고등학교에 입학한 프레슬리는 8학년 당시 음악 수업에서 무려 ‘C’라는 점수를 맞았다.


당시 음악 선생이 프레슬리에게 ‘넌 음악에 전혀 재능이 없구나!’라는 폭탄선언을 하자 프레슬리는 다음날 기타를 가져와 그렇지 않음을 증명하고자 당시 히트하며 인기 있던 곡인 〈Keep Them Cold Icy Fingers Off Me〉를 노래했다. 당시 한 반 친구가 ‘그 음악 선생은 엘비스가 자신이 노래 부르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라고 말하자 모두가 그 말이 옳다고 인정하였다고 한다.


프레슬리는 보통은 너무 숫기가 없었던 성격이었기 때문에 공공연한 장소에서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학교에서는 ‘마마보이(mama's boy)’라고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1950년 프레슬리는 자신보다 세 살이 많았던 리 덴슨에게서 정기적으로 기타 지도를 받기 시작한다. 이들과 3인의 다른 멤버(이 중에는 조니 버넷 형제가 있다.)들이 의기투합하여 나름 음악을 함께하는 동아리 같은 것을 조직하여 자주 단지 내에서 공연하기 시작했다. 그해 9월 프레슬리는 로우스 스테이트 시어터에서 좌석 안내원으로 취직하였다. 이후 프리시전 툴, 다시금 로스에서, MARL 메탈 프로덕츠를 전전하며 일하였다.


학생 시절 격동의 사춘기를 거치면서 프레슬리는 학교에서 왕따에서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백조 학생으로 변모되어갔다. 워낙 눈에 띄는 출중한 외모 덕분이었다. 그때부터 프레슬리는 구레나룻을 기르고 장미 기름과 바셀린으로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겨 정돈한 스타일을 유지했다.


자유시간이 되면 멤피스의 왁자지껄한 블루스 신(scene)의 중심부인 빌 스트리트로 내려가 랜스키 형제의 쇼윈도에 나와있는 와일드하고 현란한 옷들을 침을 흘리며 구경하고는 했다. 최고학년이 되었을 때 비로소 프레슬리는 이 옷들을 입어보게 된다. 로더데일 코츠 밖에서의 공연이라면 질색을 하던 프레슬리는 큰 마음을 먹고 용기를 내어 1953년 4월 흄스의 ‘민스트럴 쇼’의 오디션에 출전하게 되었다.


기타를 치고 노래 부르며 프레슬리는 당시 히트했던 테레사 브루어의 〈Till I Waltz Again with You〉를 출전곡으로 삼았다. 프레슬리는 이때의 공연이 그전까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평판을 크게 높여주었다고 회상했다.

“저는 학교에서 그리 유명하지 못했어요. 음악에서는 낙제였지, 그것도 음악만 그랬어요. 하지만 다들 장기자랑에 나가보라고 저를 떠밀더군요. 제가 무대에 오르니 사람들이 웅성이고 소곤거리고 하더군요. 제가 노래할 거라고조차 생각을 못했던 거죠. 그때 이후로 학교에서 어찌나 유명해졌는지.”


프레슬리는 제대로 된 음악 공부를 받은 적이 없어 악보도 제대로 읽지 못했으나 그저 귀동냥과 어깨너머로 악기를 연주하고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프레슬리는 당시 음악이 그저 좋아 음반점에 자주 들러 주크박스와 고객용 청취 부스에서 음악을 듣고는 했다. 행크 스노의 전곡을 꿰고 있었으며 로이 아커프, 어니스트 터프, 데트 다팬, 지미 로저스, 지미 데이비스, 밥 윌스 등 컨트리 가수의 음반도 사랑했다.


남부 가스펠 가수 제이크 헤스는 프레슬리가 가장 사랑한 아티스트 중 하나로서 이후 그의 발라드 가창 스타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는 매월 진행된 올 타이트 싱잉스 다운타운의 정기적 청중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다. 여기서 많은 백인 가스펠 그룹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영가에 영향을 받은 공연을 펼치곤 했다.

프레슬리는 흑인 가스펠 가수 시스터 로제타 타프의 음악에도 푹 빠져 있었다. 당시의 여느 또래들처럼 프레슬리도 블루스 공연을 보러 공연장을 찾았다. 물론 남부의 인종분리정책 때문에 밤에만 백인 한정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지방 라디오 방송국의 방송을 듣는 것도 즐겼었는데, 당시 WDIA-AM 같은 곳에서는 ‘인종 음반’이라는 것을 틀어주고는 했는데 영가, 블루스, 모던하고 백비트 강한 사운드의 리듬 앤드 블루스가 바로 그것에 해당했다.


훗날의 프레슬리의 많은 음반들은 이 당시 자양분으로 흡수했던 아서 크루덥이나 루퍼스 토머스 같은 현지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에게 영감을 얻은 것이다. B.B. 킹은 자신이 프레슬리가 유명해지기 전부터 알았다면서 둘 다 빌 스트리트를 자주 들르고는 했다고 말했다. 1953년 6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프레슬리는 이미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확고한 미래의 그림을 그려두고 있었다.


1953년 8월 프레슬리는 선 레코드 사무소에 들어섰다. 그는 두 장의 아세테이트 디스크에 〈My Happiness〉와 〈That's When Your Heartaches Begin〉의 두 곡을 녹음하여 자비 음반을 제작하기 위해 돈을 내고 스튜디오를 잠시 대여한 것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후일 프레슬리는 어머니에 대한 생일선물 겸 자신의 노랫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확인할 겸 음반을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사실 그 근방에는 아마추어가 녹음하기 좋은 더 저렴한 녹음 스튜디오가 있었다. 전기작가 피터 구랄닉은 그가 선 레코드를 일부러 들른 것은 자신이 혹시 발탁되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스튜디오 접수담당자 마리온 키스커가 프레슬리에게 어떤 장르의 가수냐고 묻자, 그는 당당하게 “저는 모든 종류를 다 불러요.”라고 답했다. 그의 태도가 재미있어 보였던 그녀가 누구처럼 노래를 부르냐고 다시 구체적으로 물으니, 이번에는 “저는 누구의 노랫소리와도 같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녹음을 끝내고 나서 선 레코드의 사장 샘 필립스는 키스커에게 그 젊은이의 이름을 써 놓으라고 명령했고, 그녀는 자신만의 생각을 믹스하여 메모장에 ‘좋은 발라드 가수. 꼭 붙잡을 것(Good ballad singer. Hold)’이라고 메모했다.

1954년 선 레코드에서 찍은 사진

1954년 1월 프레슬리는 선 레코드에서 두 번째 아세테이트 음반을 만든다. 이번에 선택된 곡은 〈I'll Never Stand in Your Way〉와 〈It Wouldn't Be the Same Without You〉였는데,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번째 자비 음반을 만들고 난 뒤 그리 오래지 않아 프레슬리는 현지의 보컬 콰르텟 더 송 펠로스의 오디션에서도 참가했지만 탈락하고 만다.

당시 프레슬리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제가 노래를 못한다 하더군요.”


송 펠로의 짐 해밀은 나중에 술회하기를 프레슬리를 탈락시킨 것은 하모니를 간파하는 귀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하며 그를 잡지 못했던 사실을 아쉬워했다. 그렇게 두 번의 자비 음반을 만들며 스튜디오 사장에게 발탁되려던 꿈도, 오디션에 합격하여 가수로 데뷔하겠다는 꿈도 모두 좌절된 그해 4월, 프레슬리는 크라운 일렉트릭 컴퍼니에서 트럭 운전사로 취직한다.

프레슬리의 친구 로니 스미스가 현지에서 몇몇 공연에서 그와 같이 한 후로 자신의 프로페셔널한 밴드의 리더인 에디 본드와 계약해보라고 권했다. 본드는 오디션을 보고서는 그를 탈락시키면서, 프레슬리에게 트럭 운전사나 계속하라고 조언했는데 그 이유로 콕 찝어 그에게 “너는 절대로 가수로 성공하지 못할 테니까”라고 말했다 한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1192


매거진의 이전글 암이란 시련을 극복한 '인간 승리'의 대명사로 불렸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