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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02. 2022

암이란 시련을 극복한 '인간 승리'의 대명사로 불렸지만

끝내 그 추악한 민낯을 드러내고 몰락해버리고 말다.

230번째 대가의 이야기.


1971년 미국 텍사스주 플레이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어렵게 살았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그의 부모는 10대의 어린 나이였으며, 부부 관계도 좋지 못했다. 결국 그의 부모는 그가 2살 때 이혼했고, 그의 양육권은 모친이 가져오게 된다. 그 후 그의 어머니는 테리 암스트롱과 재혼했고, 생부가 그의 친권을 포기하고 그는 암스트롱 집안에 입적되어 계부의 성인 암스트롱 성씨를 쓰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재혼한 어머니는 계부와의 관계도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면서 다시 이혼을 했고, 결국 그는 편모슬하에서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가 시련을 극복한 스포츠 스타로 한창 포장되어 마케팅할 때 나온, 어린 암스트롱 형제와 자전거 경매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제법 유명하긴 한데, 그 이야기는 아름답게 윤색된 유럽의 동화에 그의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일 뿐, 그의 어린 시절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다.


어머니의 거듭된 결혼 실패로 그는 같이 살며 지내는 형제가 없는 외동으로 자랐으며, 그의 생부는 다른 여성과 재혼한 후 자녀를 낳아 그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이복형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그의 생부 및 이복형제와 평생을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구기운동을 전혀 못한다는 이유로 시작하게 된 자전거로의 전향은 트라이애슬론을 거쳐 사이클로 이어진다. 그가 사이클 분야에서 영재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집요할 정도의 헌신적인 지원 덕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미국을 대표했던 세계적인 前 사이클 선수로, 고환암 수술 이후 처절한 재활을 거쳐 투르 드 프랑스 7연패를 달성하며 인간 승리의 대명사격 존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존경을 받았던 선수로, 한국에서는 ‘암 본좌(?)’라는 애칭으로까지 불렸던 랜스 에드워드 암스트롱(Lance Edward Armstrong)의 이야기이다.


스스로의 암 투병 경험을 바탕으로 암환자들에 대한 지원 및 암 예방과 치료 연구를 후원하는 리브스트롱 재단을 설립했다. 상징색은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노란색 리브스트롱 암밴드는 자덕(자전거 덕후)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끄는 아이템이었다.


암을 극복하고 사상 최초로 7년 연속(1999년~2005년) 투르 드 프랑스를 우승하면서 이전의 기록이었던 5회 우승 기록을 갈아치우는 등 세계적인 인기까지 누린 사이클 계의 전설이었으나, 도핑 위반 혐의가 드러나 모든 기록을 박탈당하고 기록은 말소되었으며 사이클계에서 영구 추방되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텍사스주 대표 선수로 청소년 트라이애슬론 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주목받기 시작했고, 결국 전문 사이클 선수가 되기로 했다. 모토로라 사이클 팀에 입단했고, 이후 미국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1993년 세계 선수권 대회 개인도로 부문에서 우승했다.


그 후 유럽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며, 당시 유럽 선수들이 주도하는 도로 사이클계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는 미국 선수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유소년 시절에는 철인 3종 선수였는데, 암 걸리기 전 사진을 보면, 몸 자체가 굉장히 근육질의 거구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우람한 어깨는 수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현역, 퇴역 올라운더, 클라이머 류 선수들 중에서는 체격이 건장한 편에 속했다.


한창 잘 나가던 때엔 ‘그의 자전거에는 프레임 안에 시멘트를 넣는다. 시멘트를 넣지 않는다면 그가 날아서 달까지 가기 때문’이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인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진담일 리가 없는데 왜 그렇게까지 말하는가 싶은 사람은 그의 전성기 시절 시합 영상을 한번 보면 이해가 된다.


전성기 그의 클라이밍 하이라이트를 보면 과연 사람인가 싶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보여준다. 암투병에서 복귀 후 2009 시즌 투르 드 프랑스 스테이지 16에서도 전성기 때와 비교했을 때 전혀 녹슬지 않은 클라이밍 실력을 보여주었다.

라이벌이 없이 독주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유럽의 전설로 불리던 에디 메르크스와 비교해서 진정한 자전거계의 본좌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좀 있다. 왜냐하면 에디 메르크스가 한 시즌에 투르 드 프랑스, 지로 디탈리아, 부엘타 아 에스파냐를 모두 정복했던 것에 반해 랜스 암스트롱은 오직 투르 드 프랑스만을 노리고 달렸기 때문이다. 각 대회들의 간격이 한 달이 채 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자덕이라면 본좌는 추호의 의심 없이 에디 메르크스의 손을 들어준다.

에디 메르크스

이런 가운데 1996년 10월 갑자기 고환이 커지는 등 건강에 이상 징후를 보여 진단을 받은 결과 고환암이라는 사실과 이미 말기여서 세포 종양이 뇌와 폐로 퍼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는, 고환암 자체가 워낙 희귀한 병이었던지라 심지어 암 말기에서 생환한 자가 드물어 담당의사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고 한다.


“솔직히 살 수 있을지도 자신하기 힘들고, 정말 운이 좋아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자전거를 타실 수 있을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그는 바로 모든 선수 활동을 중단하고 암 치료를 위해 수술을 받고 화학 요법을 병행하여 그다음 해 완치가 되었다. 고환을 적출하는 수술까지 감행했지만, 하나만 적출했기 때문에 불임이 된 것은 아니라고 전한다. 참고로 그는 자녀를 세 명이나 보았다. 항암치료를 개시하기 전 정자를 냉동 보관하는 방식으로 인공수정을 하는 방식으로 자녀를 얻게 된 것이다.

불굴의 의지로 시련을 극복한 스타로서의 마케팅이 한창이던 시기 출간한 자서전, <이것은 자전거 이야기가 아닙니다.(It's not about the bike.)> 에는 어릴 적부터 전성기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물론 본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 외에도 책을 보다 보면 어머니와 아내에 대한 사랑, 암 투병기, TDF로 복귀를 거치며 하나의 인격이 만들어져 가는 내용이 상당히 재미있게 그려져 있어 자전거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상당히 감동적인 휴먼스토리로 사람들의 눈물과 감동을 자아낸다.


청소년기까지는 어머니가, 결혼 이후에는 부인 킥이 랜스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어머니와 킥의 랜스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과 그에 응답하려는 랜스의 눈물겨운 노력을 읽을 수 있다.


워낙 드라마틱한 요소를 위해 전문작가에 의해 집필되었을 것이 다분한 내용을 보면, 젊었을 적 랜스는 불우한 가정환경 탓인지 거의 막 나가는 망나니 수준의 청소년기를 보낸 것으로 묘사된다. 자신이 사이클을 타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구기 운동을 워낙 못해서 수영, 사이클, 달리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겸허한 표현으로 자신이 사이클 선수로 클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한다.


중병으로 투병한 전력 때문에 다시 전문 선수로 일어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를 깨고, 눈물겨운 지옥(?) 재활 훈련을 통해 1998년 선수로 복귀하고 미국 우편 공사 팀에 입단했다.

이후 1999년 ~ 2005년 투르 드 프랑스에 사상 최초로 7 연속 우승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1999년 그는 ABC가 선정한 올해의 세계 운동선수로 선정되었고, 2002년 <Sports Illustrated> 지는 그를 올해의 남자 스포츠 선수로 뽑기도 했다. AP 통신은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그를 올해의 선수로 ESPN이 주관하는 ESPY 시상식에서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그를 수상자로 지목하는 등 미국 최고의 스포츠 선수 중 하나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2005년 시즌부터 미국 우편 공사 팀이 디스커버리 채널 팀으로 스폰서가 변경되어, 그는 디스커버리 채널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펼쳤고(2007년 다시 미국 우편 공사로 변경됨) 그는 2005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통산 7회 우승한 후 7월 24일 그는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은퇴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암스트롱은 자신이 설립한 재단 활동과 기타 스포츠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자신의 암 투병 경험을 살려, 암 치료와 회복을 위한 재단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7년 앤드리 애거시, 무하마드 알리, 앤드리아 예거, 알론조 모닝, 제프 고든 등의 스포츠 선수들과 "애슬리츠 포 호프"(Athletes for Hope) 재단을 설립했으며 수많은 시민들의 봉사 활동 및 후원을 받게 됐다.


은퇴를 했었지만 2008년 9월 9일 현역 복귀를 선언했으며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 팀에 입단했다. 아스타나 팀 소속으로 2009 투르 드 프랑스 대회에서 3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3위를 차지하였다. 2010년 시즌, 라디오셱 팀으로 소속팀을 옮기며 계속 활약하지만, 도핑 논란이 부각되면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투르 드 프랑스는 래디오섁 팀으로 출전한 2010년이 마지막이다. 개인 우승은 없으나, 팀 우승으로 포디엄에 올라 은퇴 경기 체면은 세웠다. 2011년 라디오섁 팀으로 호주에서 열리는 투어 다운 언더를 마지막으로 공식 은퇴 선언을 한 상태(2011년 2월 16일 현재)이다.

암스트롱은 이미 암에서 완치된 후 복귀할 때부터 도핑 의혹에 시달렸다. 프랑스 등 유럽 언론들은 그의 도핑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했으나, 미국 쪽에서는 사이클 계를 주도하는 유럽의 편견과 음모라며 이런 의혹을 일축했다.


그러나 2010년 팀 동료 플로이드 랜디스가 암스트롱이 금지약물인 에리트로포이에틴(EP0)과 테스토스테론을 투약하는 사실을 목격했다고 증언해 도핑 의혹이 다시 크게 부각되었고, 이로 인해 2년 가까이 미 연방 경찰의 내사를 받으며 지루한 법정 공방이 계속되었으나, 기소 없이 수사가 종결되었다.


하지만, 2004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지만 도핑 혐의로 메달을 박탈당한 또 다른 팀 동료 타일러 해밀튼이 2011년 CBS 방송 프로그램 〈60분〉에 출연해 암스트롱의 도핑 사실을 고발했으며 2012년에는 자신의 저서 <비밀의 레이스>에서 암스트롱이 투르 드 프랑스 출전에 앞서 금지약물을 투약했다고 폭로했다.


법정에서는 기소 없이 수사가 종결되었으나, 도핑을 했다는 증언이 계속 이어지면서, 암스트롱은 2012년 8월 24일 오랫동안 진행된 도핑 혐의에 대한 법정공방을 포기하고 미국 반도핑 기구(USADA)의 영구 제명 징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2012년 10월, 국제 사이클 연맹(UCI)은 최종적으로 암스트롱이 1998년 8월 1일부터 대회에서 세운 모든 성적을 박탈하는 처분을 내려, 그의 투르 드 프랑스 7회 우승 기록도 모두 삭제되었고, 동시에 사이클 선수 자격을 영구히 제명하여 그는 국제 사이클 계에서 완전히 퇴출되었다. 2013년 1월에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에서 2000년 하계 올림픽 당시 획득한 동메달도 박탈한다고 발표했다.


그 후 미국 정부는 도핑으로 실력을 속이고 1998∼2004년 미국 우편공사로부터 후원금을 받은 암스트롱에게 최대 1억 2,000만 달러(약 1,300억 원)를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정부가 대놓고 시작한 소송이었기에 랜스가 벗어나긴 어려웠고 만약 그대로 판결이 나오면 그는 알거지가 될 판이었다.


하지만 그는 또 뒷거래를 통해 벗어난다. 이후 2018년 4월 19일에 500만 달러라는 크게 감액된 금액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후 사람들은 고환암 발병 자체도 데뷔 초부터 계속해오던 성장호르몬 도핑과 관련 있는 게 아니냐는 합리적인(?) 의심까지 하기 시작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선수가 사실은 적극적으로 불법 행위를 일삼았을 뿐 아니라, 사실상 부하나 다름없는 팀 동료들에게 본인의 권력을 이용해서 도핑을 강요했고, 이를 견디다 못해 언론이나 사법기관에 제보한 이들에게는 소송과 언론플레이로 사회적 매장을 선사해왔다는 사실에 그에 대한 이미지는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렸다.


ESPN이 최근 랜스 암스트롱과 함께 도핑의 고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 여기에서 랜스는 애초에 고환암이 도핑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며 그동안의 긴 의혹을 인정했다.


모든 것이 사실로 밝혀지자 미담으로 덮여 있던 그에 대한 진실들이 하나둘 들려오기 시작했다. 랜스에 대해 칭송 일색이던 미국과 달리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사이클 레이싱계에선 오래전부터 이미 랜스의 부정에 대해 비난이 많았었다.

특히 UCI 등 관련 업계 인사들을 매수하고 언론에 압력을 넣는 등, 부패의 정도가 이미 도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도핑 사실이 터졌을 때 미국 언론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던 것에 반해, 유럽 사이클링계는 ‘당연히 도핑도 했을 줄 알았다.’는 식의 냉소적인 반응을 보여 대비되었다.


2015년에는 약쟁이라는 오명에 더해 ‘음주운전+뺑소니+거짓말’의 3종 세트를 동시에 터트렸다. 술을 마시고 여자 친구를 태운채 SUV를 몰다가 세워져 있는 자동차 2대를 들이박고는 그대로 뺑소니쳤는데, 그걸로도 모자라 여자 친구가 운전했다고 덮어 씌우는 짓이 발각된 것이다.




오늘 랜스 암스트롱의 이야기를 당신에게 가져온 이유는, 거짓으로 만들어진 모래성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져버리는지를 알려주는 것에서 그치는 뻔한 스토리가 아니다. 과연 그의 부정이 개인적인 부정이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손해배상 소송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까지 돋보기를 들이대고 자세히 보여준 것이다.


아직 무슨 이야기인지 영문을 모르겠나?


그가 독보적인 전설로 무려 7년 연속의 누구도 깨지 못할 기록으로 유럽 선수들이 주류이던 유럽 사이클계에 미국의 성조기를 날릴 때, 미국이 과연 그 사실을 몰랐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데이비드 월시 스포츠 선임기자는 랜스 암스트롱의 도핑 여부에 대해서 무려 13년간이나 조사를 이어나갔다. 그의 취재 기록과 분석 이야기는 <Seven Deadly Sins: My Pursuit of Lance Armstrong>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이후 <The Program>이라는 영화로 2015년 9월에 개봉했다. 즉, 알만한 사람들은 그 사실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챔피언 프로그램>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다.

랜스의 도핑을 설계하고 주도했던 의사는, 일명 ‘페라리 박사(Dr. Ferrari)’라고 불리던 이탈리아의 스포츠 전문의 ‘미켈 페라리(Michele Ferrari)’라는 사람이었다. EPO 도핑 전도사로 사이클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거물급 전문의였으며, 에디 메르크스의 아들인 악셀 메르크스(Axel Merckx)와 마리오 치폴리니 역시 페라리와 함께 일한 바 있다. 랜스의 도핑 스캔들이 터지면서 2012년 UCI에서 영구 제명되었으며, 이듬해인 2013년 랜스가 “페라리 박사로부터 PED를 처방받은 사실이 있다.”라고 자백함에 따라 도핑 혐의가 사실상 확정되었다.


심지어 랜스 암스트롱의 현역 시절 만년 2인자로 불리던 독일의 사이클 스타 얀 울리히마저도 2012년에 도핑이 걸려서 올림픽 메달을 깡그리 박탈당한다. 이미 그 분야는 모두의 암묵적 동의하에 집단 범죄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얀 울리히

모두가 도핑을 한다면 굳이 약물을 투여하면서까지 기록을 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A.I.가 인간에게 바둑을 이기고 이제 도저히 사람이 A.I.에게 이길 수 없음에도 바둑 대회가 명백을 유지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 간의 대결이기 때문이다. 즉, 기계나 약물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면 올림픽에는 영화에서나 보았던 기계인간들이 출전하면 그만인 것이다.


미국 정부에서 쇼맨십에 해당하는 1억 달러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소송임에도 배상액이 500만 달러로 확 줄어들어 소리 소문 없이 끝나버린 것은, 모종의 막후 거래가 있었음을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다.


미국은 유럽이 장악한 사이클계에 다크호스처럼 출전하여 미국의 영웅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할 수 있는 랜스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실제로 그는 수많은 증인과 증거들로 기소되어 형사처벌을 받아야만 했지만, 은퇴를 하고 나서야 절묘하게 그 사실이 터졌고, 모든 그간의 기록을 말소하고 불명예를 지는 대신, 기소는 피하는 거래(?)를 하고 또 처벌을 빠져나갔다.


세상이 썩어가는 데에는 단 한 사람만의 일탈이나 비리로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돈이 없어 밥을 못 먹었다고 구멍가게에 가서 라면 다섯 개를 손에 움켜쥐고 나온 자는 형사처벌을 받지만 재벌 친구에게 병풍이 되어주겠다며 수백억의 돈을 챙겨 먹은 법비는 무죄로 나오는 대한민국의 현실처럼 말이다.


랜스의 부정과 그 진실을 밝히겠다던 이들은 랜스의 돈과 랜스와 결탁한 미국 정부와 돈 많은 스폰서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오히려 공격받아 사그라들어가야만 했다.


불과 10년밖에 안된 일이다. 대한민국은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지저분한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정치인이나 기업가, 정부가 썩기까지는 그 조직을 구성하는 한 명 한 명의 개인, 바로 당신과 같은 평범한 자들의 공조와 묵인이 자양분이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언제나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껌벅거리며 말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해하지 않고 소시민으로 양심적으로 살아왔다고.”


정말 그러한가? 당신이 보고 듣고, 묵인하고 동조해온 거악(巨惡)이 이렇게 썩은 내를 온천지에 진동하게 만드는데도?


아래 글을 보며 당신의 양심에게 다시 물어보라.

https://brunch.co.kr/@ahura/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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