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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23. 2022

오디션만 49번을 떨어지고 개성이 없다 무시당했지만-4

20세기 대중음악을 상징하는 뮤지션들의 전설이 되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234


레논은 1980년 10월에 싱글 〈(Just Like) Starting Over〉을 발표하며 복귀했고, 그다음 달에 오노와 함께 공동으로 정규 음반 <Double Fantasy>를 발표했다. 이 음반에는 6월에 43피트 크기의 항해선을 타고서 버뮤다를 여행하는 동안 쓴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곡은 레논이 새롭게 안정된 가족을 가짐으로써 느끼는 만족감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충분한 곡들이 다음 음반 <Milk and Honey>를 위해 녹음됐다(사후인 1984년에 발표됨). <Double Fantasy>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1980년 12월 8일, <Double Fantasy>를 제작하고 활동을 다시 시작하려던 때였다. 존은 뉴욕에 있는 자택 앞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정신질환자에게 사인을 해 주었고, 불과 5시간 즈음 후 총을 맞았다.


녹음 스튜디오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마크 채프먼이 쏜 차터 암즈 사의 언더커버 38 구경 리볼버의 할로 포인트 총탄 4발을 왼쪽 가슴과 어깨 부분에 맞아 쓰러졌다고 한다. 그는 병원으로 즉시 이송되었고 피격 당시에는 살아 있었지만, 도착할 즈음에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40세였다. 20세기 최고의 싱어송라이터라 칭송받던 사람의 최후라고 하기엔 너무도 허망했다.

생전 마지막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 뒤에 사인을 받고 있는 선글라스 낀 남자가 범인 마크 채프먼이다. 이 사진이 찍히고 불과 5시간이 지난 후 그는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

마크 채프먼이 존을 죽인 이유를 놓고 과거에는 비틀즈와 존을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존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결국 자신이 진짜 존 레논이며 저기 있는 존 레논은 가짜라는 망상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설이 힘을 얻었었다. 그러나 비록 채프먼의 아내가 동양인이긴 했지만 오노 요코와는 정반대로 순종적인 타입의 여성이었고. 채프먼의 자택에서 발견된 비틀즈의 앨범 또한 그의 아내가 구입한 것으로, 채프먼이 비틀즈, 특히 존의 광적인 팬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채프먼이 레논을 살해한 동기는 그의 개인적인 정신병력과 종교적 동기가 복잡하게 결합한 결과물이라는 쪽이 설득력을 갖는다. 채프먼이 아주 어렸을 때 레논을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고등학생 무렵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임을 선언하며 오히려 철저한 안티로 돌아섰다. 채프먼은 법정에서 자신의 살해 동기에 대해 이렇게 떠들어대기도 했다.

 

“스스로 예수보다 유명하다고 지껄이며 신성모독이나 저지르고, 노래 <Imagine>에서는 무소유를 주장하는데 정작 본인은 수백만 달러짜리 아파트에서 호화 생활하는 위선자가 아니냐,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처단했다!”


Court TV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버지가 애정을 한 번도 주지 않아서 트라우마에 시달렸는데, 레넌이 아버지처럼 보여서 죽였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채프먼은 현재 40년 가까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 2년마다 가석방 신청을 내고 있다는데, 2014년 8월 22일 그의 여덟 번째 가석방 신청이 거부되었다고 한다. 거부된 이유는 유가족과 고인을 사랑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이었다.


사실 석방돼도 마크 채프먼 입장에선 불안한 것이, 여전히 존의 몇몇 팬들이 마크 채프먼을 죽여 존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의 출소일만을 기다린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노는 그날 “존을 위한 장례식은 없다.”라고 말했고, “존은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부디 그를 위해 똑같이 기도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장례식을 대신했다. 레논의 시신은 뉴욕 시 하츠데일 펀 클리프 묘지에서 화장되었다. 오노는 레논의 재를 뉴욕 센트럴 파크에 흩뿌렸으며, 그곳에는 후에 스트로베리 필즈 기념비가 만들어졌다.

레논의 죽음은 가장 유명한 비틀즈 관련 음모론 중 하나로, FBI가 마크 채프먼을 이용해 그를 죽였다는 암살 사주설이 팬들에게는 기정사실인 듯 퍼져나갔다. FBI에서는 마치 이런 풍문의 근거를 제공하듯 지금도 존의 파일을 비공개로 지정해놓고 있다. 이런 음모론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은 존과 요코가 반전 운동을 벌이다 영국의 보수 언론에 쫓겨 미국으로 왔는데, 미국에 와서도 반전 운동을 계속해 당시 미국 정부나 보수 언론들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흔히 존 레논은 ‘인간성과 음악성이 별개인 사람’을 꼽을 때, 루 리드, 에릭 클랩튼, 로저 워터스 등과 함께 꼽힌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비난을 받는 사람이 존 레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의 인생을 내가 무려 4일에 걸쳐 소개하게 된 이유를 당신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미 알겠지만, 나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위인들에 대해 위인전으로 이 시리즈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비틀즈’를 다루기 위해 서랍 속에 거의 10개월을 담아두고 있다가 이제사 존 레논이라는 이름으로 꺼낸 이유는, 그의 40년밖에 안 되는 기괴하고 괴팍하며 삐뚤어진 삶에서도 당신이 뭔가 생각하고 다시금 당신의 삶이 그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져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깨닫기를 바라서이다.


그가 그저 아름다운 음악만으로 존경을 받기보다는 ‘주로’ 비판을 받는 부분은 다양(?)하다. 첫째 전처 신시아에 대한 무관심과 가정폭력, 둘째, 아들 줄리안 레논에 대한 아동 방임, 셋째, 사회적 약자 비하, 넷째, 야스쿠니 신사 방문 같은 언행불일치 등으로 요약된다. 그의 어두운 면이 다시 알려지면서 반전운동과 평화사상을 전파하던 이면의 사생활은 매우 폭력적이라며 존 레논에 대한 실망스러운 의견이 많아졌다.

레논은 비틀즈의 〈Getting Better〉이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전 여성에게 못되게 굴었고, 폭력을 쓰기도 했습니다. 아무 여자에게나 말이에요. 전 폭력배였어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질 못했고, 때리기만 했습니다. 남자하곤 싸우고, 여자에겐 주먹질을 했죠. 이것이 제가 항상 평화를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황당한 변명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그는 신시아와의 결혼을 아들 줄리안의 임신 때문에 거의 충동적으로 결정했고, 내내 신시아를 홀대했다. 신시아는 약물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가 가진 또 다른 그의 본모습일 뿐이었다.


1962년에 결혼하고 아들을 낳은 뒤 불과 3년이 지난 1965년 말 오노는 런던에서 존 케이지가 작업하고 있던 책 <Notations>를 위해 원본 악보를 모으고 있었고, 그녀는 매카트니에게 악보 원고의 기증을 부탁하고 폴은 거절했다. 오노가 레논에게 부탁하자 그는 직접 손으로 쓴 〈The Word〉의 가사를 줬다.


그 이후 오노는 레논의 집에 계속 전화를 걸었고, 신시아가 레논에게 이에 대해 따졌다. 레논은 그녀에게 오노는 그저 ‘멍청한 아방가르드 예술로 돈을 벌려고 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1968년 5월, 신시아가 그리스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레논은 오노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둘은 밤에 음반 <Two Virgins>의 수록곡을 녹음했고, 레논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새벽에 사랑을 나누었다.’


집으로 돌아온 신시아는 오노가 자신의 목욕 가운을 입은 상태에서 레논과 차를 마시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녀를 본 레논은 간단하게 “오, 안녕.”이라고 인사했다. 오노는 1968년에 임신했으나, 그들이 존 오노 레논 2세라고 이름 지은 아이를 유산했다. 몇 주 뒤 레논과 신시아는 이혼했다.


그의 지저분한 행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70년 레논과 오노는 ABKCO의 프로젝트 일로 메이 팡을 만났고, 팡은 둘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 그들을 위해 3년간 일한 팡은 오노에게 자신과 레논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오노는 그녀에게 레논과 육체적 관계를 맺을 것을 제안하면서 “그는 널 굉장히 좋아해.”라고 말했다.


당시 22살이던 팡은 오노의 말에 굉장히 놀랐지만, 결국은 오노의 제안을 수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논과 팡은 캘리포니아로 이사 갔고 레논이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부른 18개월 동안 동거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팡은 레논에게 2년 동안 보지 못한 줄리언과 정기적으로 만날 것을 제안했다. 레논은 그녀 덕에 스타, 매카트니, 말 에반스, 해리 닐슨과도 다시 친해졌다. 레논은 닐슨과 술을 마시던 중, 팡이 한 말을 잘못 알아들어 그녀의 목을 조르려고 했고, 닐슨이 저지해서야 그만두었다.


한편, 레논은 오노 요코와의 별거를 끝내고 베트남전이 종결된 1975년부터 존은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5년간 가정 주부로 살았다. 이는 어린 시절 불우했던 가정환경에서의 경험이 아내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말년에 존이 보인 가정적인 모습은 어디까지나 션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줄리안에게는 죽을 때까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런 줄리안을 가엾게 여긴 폴은 비틀즈 시절부터 줄리안을 돌봐주었고 줄리안도 폴을 더 따랐다고 한다. 비틀즈의 대표적인 히트곡 중 하나인 <Hey Jude>도 가정의 붕괴로 큰 혼란을 겪고 있을 줄리안에게 폴이 힘내라고 써준 곡이다.

생전 존 레논은 일본을 여행하면서 일본의 문화와 신앙을 좋아하게 되었고 여러 신사를 방문했다. 1971년, 야스쿠니 신사에 오노 요코와 방문한 것이 나중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사실, 존 레논 본인은 영국인이었으므로 당시 야스쿠니 신사의 정확한 실정에 대해 무지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무지했다는 것이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다. 존 레논은 단순한 뮤지션이 아니고 반전운동과 평화사상을 외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내였던 오노 요코는 좌익 성향의 일본인이었으므로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들을 합사시킨 것은 1978년의 일이므로 당시 레논 부부가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 것은 전범 참배와는 관련이 없다는 옹호도 있지만, 메이지 시대부터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에서 전사한 일본 군인들의 위패를 가져다 놓고 제사를 지내왔고 국가 프로파간다에 활용되어 왔으므로 평화주의자로서의 행보로는 여러모로 적절치 않다고 볼 수 있다.


존 레논의 일본 여행에 관해 남아있는 기록은 오노 요코의 사촌이자 우익 인사인 가세 히데아키의 칼럼이 있는데, 가세 히데아키의 주장에 따르면 존 레논은 야스쿠니 신사를 싫어하지 않았고, 일본의 전쟁은 방어의 개념이었으며 미국에게 공격당한 베트남과 비슷한 처지라는 본인의 의견을 납득했다는 확인할 수 없는 우익성 발언만이 난무한다. 이런 빌미를 제공한 것이 그의 경솔함이었고 생각 없는 행동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그와 오노 사이의 아들 션 레논이 대놓고 욱일기와 우익적인 사상을 옹호하는 등, 최근 일본 우익이 원하는 방향으로 언행을 일삼는 것도 이러한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레논이 죽을 당시 다섯 살이었던 터라 무슨 영향이 있었겠느냐고 옹호하려는 이들도 없지 않으나 부모의 영향은 살아 있을 때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환경, 그것도 정상적이고 온화한 가정이라고 불리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이모의 손에 키워지고, 음악이 돈이 안될 거라며 비난을 들으며 반항기에 음악을 시작했고, 큰 덩치와 반항적인 성격으로 요즘 말로 일진처럼 아이들을 때리고 마초적인 성격으로 삐뚤어져 나갔던 그의 삶은 감미로운 그의 음악과 히피적인 사회운동으로 덮여 있었지만 그것 역시 그의 인생이었다.

어떤 뮤지션도 그런 과정을 거쳤겠지만 그와 그의 친구들은 적당히 당시 유행하는 음악을 따라 했고, 오디션에 무려 49번이나 떨어졌고, 결정적인 오디션에서는 당황하고 음악 기기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또 떨어져야만 했다. 비틀즈가 처음에 해온던 음악을 계속 그냥 하다가 운이 좋아 스타가 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그들의 음악적 족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비틀즈에서 창조적인 파트를 맡았던 레논의 삶은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절제하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방탕했고, 오만했으며, 충동적이었다. 그가 마흔에 생을 마감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극적인 개과천선을 통해 원숙한 뮤지션이자 아버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음악팬들에게는 적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욱하는 충동적인 마음에 삐뚤어진 언행으로 일관하고, 마음에 없는 소리로 괜히 가족들을 상처 입히고 다시 그런 자신을 힐책하고, 그런 악순환을 반복하지는 않는가? 당신의 일을 위해서라며 바빠서 그런 거라며 정작 더 소중한 것들에 대해 집중하지 못하고 방관하고 방기하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존 레논의 짧지만 많은 것을 전해주는 삶을 통해, 당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면 4일간의 비틀즈, 특히 존 레논의 삶에 대한 고찰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가질 것이다.


당신의 삶이, 결코 후회로 점철된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반성, 그리고 더 나은 자신을 만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단 한 번뿐인 소중한 당신의 인생을 결코 함부로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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