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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22. 2022

오디션만 49번을 떨어지고 개성이 없다 무시당했지만-3

20세기 대중음악을 상징하는 뮤지션들의 전설이 되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231



비틀즈의 해체는 뭔가 대단한 갈등이나 문제를 원인으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레논은 그즈음 화이트 앨범에서, 그는 인도 여행(<Dear Prudence>, <The Continuing Story of Bungalow Bill>)에서 보고 느낀 것들과 극심했던 우울증(<I'm So Tired>) 등, 무척 개인적인 일들을 노래한다. 폴과 조지 역시 마찬가지였고 비틀즈 해체의 기미는 이때부터 분명 꿈틀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각종 소음을 집대성한, 전위예술적이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Revolution 9> 역시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의 작곡이다.


폴은 존이 오노 요코와의 사랑에만 치중하고 비틀즈를 뒷전시한다고 느꼈고, 존이 신성한(?) 스튜디오에까지 요코를 데리고 오자 이러한 내부의 분열은 극에 달했다. 물론 충분히 열이 받아 있던 폴 역시 이에 질세라 자신의 약혼녀 린다 매카트니를 스튜디오에 데려오는 식으로 그와 유치한 경쟁을 이어갔다. 이 갈등 과정에서 존의 자의식은 더욱 강해져만 갔다.

<Let It Be>는 멤버들의 불화와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시점에서 제작된 앨범이지만, <Abbey Road>는 이미 멤버들이 해체를 마음속으로 예감한 상태에서 작업한 앨범이다. 따라서 불화가 곡들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존에게는 여러모로 폴과의 음악적 이견 차를 실감한 시간이었고 그 감정은 확신으로 굳어갔다.


존은 해체 직후인 1970년대 초반에는 비틀즈 후반부에 두드러진 폴의 약진과 성과를 부정했고, 폴이 주도한 애비로드 메들리와 <Let It Be> 등 대부분의 폴이 주도적으로 작업했던 곡들을 폄훼했다. 초기 사이가 좋아 케미가 좋다고 지어진 ‘레논-매카트니 체제’의 득세를 생각해보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는, 끝이 안 좋은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말았다.


다만 이는 해체 직후 서로 간의 감정적 앙금이 남아있던 상황에서의 발언이고, 1970년대 중반부터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존 레논의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비평도 누그러들게 된다. 특히 1980년의 인터뷰를 보면 폴의 곡을 칭찬하는 등 상당히 유화적인 태도를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비틀즈 해체 직후 이 둘은 90년대 말 힙합계의 래퍼들 못지않게 서로를 디스 해대며 싸워댔고, 특히 해체 직후인 1971년, 존은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Lennon Remembers)에서 폴과 조지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과의 사이는 이미 옛날에 끝났다, 요코를 욕하는 그놈들을 패줘야 했었는데...”

재미있는 건 인터뷰에서 그렇게 불만을 표출한 조지 해리슨과는 <Imagine> 레코딩을 함께 했다는 점이다. 이 당시 결과물들은 존의 <Imagine> 앨범과 폴의 <Ram> 앨범에 특히 잘 나타나 있다. 존과 폴이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하고 싸워댄 것은 아니었고, 1973년을 기점으로 감정적 대립이 상당히 누그러들었으며 메이 팡의 설득과 링고 스타의 중재로 연락이 닿아 1974년에는 로스 엔젤레스에서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기고 스튜디오에서 믹 재거, 스티비 원더 등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가끔씩 안부 전화도 하고, 폴이 지나가다가 존의 집에 들러 같이 연주도 했다고 전해진다. 또 비틀즈를 둘러싼 법정 공방이 1974년에 최종적으로 종결되고, 존이 아들 션을 얻게 되면서 가정주부 생활을 하게 될 무렵에는 상당히 관계를 회복했다고 한다.


물론 과거의 영혼의 콤비였던 시절만큼은 아니고 다소 서먹서먹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적어도 비틀즈 해체 직후 서로를 향해 증오에 가득 찬 디스를 하던 시절보다는 훨씬 나아진 관계였다.

오히려 존과 말년에 사이가 안 좋아진 것은 자서전 <I Me Mine> 문제로 관계가 소원해진 조지 해리슨 쪽이었다. 1970년대 후반 집필해 1980년 8월에 발표한 자서전에서 조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서술하는 부분에 존을 누락시켜 버렸고 존은 이걸 무척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심지어 그 관계는 존이 살해되기 직전까지 화해조차 하지 못했다. 말년의 조지의 인터뷰를 보면 존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은 듯하다. 존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조지는 힌두교에 더욱 깊게 몰입하게 된다.


비틀즈 해체 이후 1970년대 중반 폴이 왕성한 솔로 활동을 한 것과 달리 존은 우울증에 빠져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더욱 줄어들어갔다. 실제로 존이 솔로 발표한 곡 중 그의 생전에 미국 빌보드 1위를 차지한 곡은 단 하나뿐이며(<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 1974년 11월, 1위), 사망 후에 1위를 한 곡(<(Just Like) Starting Over>)까지 합해도 빌보드 1위에 오른 존의 솔로 곡들은 단 두 곡뿐이다.


1970년, 레논과 오노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서 야노브 의사를 통해 원초 치료를 받았다. 유년기의 감정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고안된 치료법으로 일주일에 두 번, 4개월간 진행되었다. 의사는 더 장기적으로 치료하기를 원했으나, 커플은 더 이상 계속 치료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레논의 감정이 잘 표현된 데뷔 솔로 음반 <John Lennon/Plastic Ono Band>(1970)는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는 ‘존이 부른 〈God〉의 마지막 소절은 로큰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업적.’이라며 찬사에 가까운 평가를 남겼다.


이 음반에는 레논이 어릴 적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노래 〈Mother〉, 부르주아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노래 〈Working Class Hero〉(이 노래는 ‘넌 아직도 망할 하류층이야’라는 가사로 인해 방송사들로부터 거부당하기도 했다)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같은 해, 레논은 타릭 알리와의 인터뷰 때 그의 혁명적 정치 견해에 영감을 받아 〈Power To The People〉를 썼다. 레논은 나중에 알리의 거 없는 외설 혐의로 인해 <Oz>지가 기소되자, 이 기소를 ‘역겨운 파시즘’이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그와 오노(엘라스틱 오즈 밴드)는 싱글 〈God Save Us / Oz〉를 발매하고는 잡지사 지원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레논은 이후 저 유명한 음반, <Imagine>(1971)을 내놓게 되는데 이 음반은 당시 평론가들로부터 다소 신중한 반응을 받았다. <롤링 스톤>은 ‘수록곡의 대부분이 좋은 음악’이라고 평하면서도, ‘그의 가식은 곧 단순히 따분해질 뿐만 아니라, 시시하게 되어버릴 것이다.’라고 의미심장한 예언성 경고를 남겼다.

앨범의 타이틀 곡 〈Imagine〉은 반전 운동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고, 〈How Do You Sleep?〉은 폴 매카트니의 <Ram>에서 나타난 자신을 비꼬는 가사에 대한 반격으로, 매카트니는 후에 가사가 레논과 오노를 향한 공격이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1971년 8월에 뉴욕으로 이사를 간 레논과 오노는 12월에 〈Happy Xmas (War Is Over)〉를 발매했다. 새해, 닉슨 정부는 레논이 주도한 반전 운동과 반 닉슨 선전에 맞서 ‘전략적 대응책’을 취했고, 그를 추방하려는 4년의 시도에 착수했다.

1972년, 레논은 뉴욕에서 맥거번이 닉슨에게 선거에서 패한 후, 제리 루빈에 의해 열린 선거 후 행사에 오노와 참여했다. 이민 당국과의 계속되는 법적 전투에 집중한 레논은 결국 미국 영주권을 거부당했다(1976년 이후 풀렸다). 우울했던 레논은 술에 취해 여자 손님과 섹스를 하며 오노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녀의 노래 〈Death of Samantha〉은 이 사건의 감정을 그대로 담아낸 곳이기도 하다.


뉴욕 밴드 엘리펀트스 메모리가 백 보컬을 맡고, 오노와 공동으로 제작한 음반 <Some Time in New York City>은 1972년에 발매되었다. 여성 권리, 인종관계, 북아일랜드를 탄압하는 영국, 그리고 레논의 영주권 획득 문제에 관한 노래가 수록된 이 음반은 상당한 혹평을 받았다. 수록곡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은 같은 해 미국에서 싱글로 발매되었고, 5월 11일 <딕 커뱃 쇼>를 통해 전파를 탔다. 많은 라디오 방송국들이 ‘깜둥이’라는 단어 때문에 방송하는 것을 거부했다.


레논과 오노는 엘리펀트스 메모리, 그 외 게스트들과 함께 윌로우브룩 주 학교 정신 시설의 환자들을 위해서 두 번의 자선공연을 열었다. 1972년 8월 30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진행된 이 공연은 레논의 마지막 장시간 공연이었다.


레논이 <Mind Games>(1973)을 녹음하고 있었을 때, 그와 오노는 떨어져 지내기로 했다. 그들은 18개월간 떨어져 지냈고, 레논은 이후 이 기간을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불렀다. 레논은 그동안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개인 비서 메이 팡과 함께 지냈다.

메이 팡과 함께

플라스틱 U.F.오노로 표기된 <Mind Games>는 1973년 11월에 발매되었다. 레논은 같은 달에 발매된 링고의 음반 <Ringo>에 가이드 보컬을 제공해 주었고, 이는 <John Lennon Anthology>에 수록되어 있다.


1974년 초에 레논은 술을 심하게 마셨으며, 해리 닐슨과의 만취 사건으로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이후 레논은 닐슨의 음반 <Pussy Cats>의 프로듀서를 맡기로 하고, 메이 팡은 그들을 위해 로스앤젤레스 해안가에 위치한 집을 빌렸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녹음 세션은 엉망이었고, 결국 레논은 팡과 함께 음반 작업을 마무리 짓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를 갔다.


4월, 레논은 믹 재거의 노래 〈Too Many Cooks(Spoil the Soup)〉를 프로듀싱했으나, 계약상의 이유로 30년이 넘게 미 발매되었다. 최종적으로 팡이 노래를 제공했고, 믹 재거의 <The Very Best of Mick Jagger>(2007)에 수록되었다.


뉴욕에 다시 돌아온 레논은 <Walls and Bridges>를 녹음했고, 이는 1974년 10월에 발매됐다. 엘튼 존이 백 보컬과 피아노를 담당한 수록곡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의 싱글은, 레논이 솔로 경력 때 발표한 것 중 유일하게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했다. 그 음반에서 나온 두 번째 싱글 〈#9 Dream〉은 연말 전에 발매됐다.


링고의 <Goodnight Vienna>(1974)에서 레논은 타이틀 곡을 쓰고 피아노를 연주했다. 11월 28일, 레논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엘튼 존의 추수감사절 콘서트에 특별 게스트로 참여했다. 엘튼과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가 1위에 오르면 공연에 참가할 것이라고 서로 내기했고, 레논은 이 약속을 지켰다.


레논은 공연에서 ‘폴이라고 불리는 나의 떨어져 있는 오랜 약혼자의 노래.’라고 소개하면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과 〈I Saw Her Standing There〉를 연주했다.

레논은 데이비드 보위의 미국 첫 1위 곡 〈Fame〉을 함께 작곡했으며, 1975년 1월에 이루어졌던 녹음에서 기타 연주와 백 보컬을 맡아줬다. 같은 달, 엘튼 존은 자신이 커버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로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여기서 ‘닥터 윈스턴 오'부기’라는 가명으로 참여한 레논은 기타 연주와 백 보컬을 담당했다.


오노와 다시 만난 레논은 커버 음반 <Rock 'n' Roll>(1975)을 발매했으며, 2월에 나온 싱글 〈Stand by Me〉는 미국과 영국에서 히트했고, 이후 5년 동안은 싱글을 발매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무대 출연을 ATV 스페셜 방송 <A Salute to Lew Grade>에서 했으며, 이는 4월 18일에 녹음되어 6월에 방송되었다. 어쿠스틱 기타와 반주를 담당한 8인조 밴드와 함께 레논은 <Rock 'n' Roll>의 〈Stand by Me〉, 〈Slippin' and Slidin'〉(두 곡 모두 편집되어 실제 방송은 되지 않았다)와 〈Imagine〉을 공연했다.


여기서 함께한 ‘Etc.’라는 밴드는 머리 뒤에 가면을 썼는데, 이는 그레이드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레논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 아들 숀이 1975년에 출생했고, 레논은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5년간 경력에 공백을 냈다. 그 달에 EMI/캐피털과 한 계약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이전에 녹음된 노래를 담은 컴필레이션 음반 <Shaved Fish>을 발매했다.

레논은 매일 6시에 일어나 숀의 밥을 준비하고 그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링고의 음반 <Ringo's Rotogravure>(1976)의 수록곡 〈Cookin' (In the Kitchen of Love)〉를 쓰고 6월에 녹음했다.


이는 1980년까지 그의 마지막 녹음 세션이 된다. 1977년 6월, 레논은 도쿄에서 음악을 그만두겠다며 다음과 같은 충격 선언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보다 좋을 수 없을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아기에게 최대한 전념할 것이고,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고 느끼면 그때 무언가 만들 시간을 할애하겠다.”


이 공백기에 그는 일련의 그림을 그렸고, 자서전 요소와 그가 ‘미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을 혼합하여 책을 저술했다. 이 책들은 모두 사후에 출판되었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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