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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21. 2022

오디션만 49번을 떨어지고 개성이 없다 무시당했지만-2

20세기 대중음악을 상징하는 뮤지션들의 전설이 되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228


폴 매카트니는 1987년 인터뷰에서 다른 비틀즈 멤버들이 레논을 우상으로 삼았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그는 우리의 작은 엘비스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존을 우러러보았죠. 그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또한 리더였고, 가장 재치 있고 똑똑했어요.”


비틀즈는 1963년 초부터 영국의 주류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레논은 그해 4월에 태어난 첫째 아들 줄리언과 함께 투어를 돌았다. 레논은 비틀즈로 데뷔하기 직전인 1962년, 리버플 미술 대학 시절부터 사귀던 신시아 파웰과의 사이에서 아들인 줄리안 레논이 태어나자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기획사로부터 신시아와의 결혼 사실을 숨기라는 요구를 받은 데다가(실제로 신시아의 존재는 미국 진출 이후에야 밝혀졌다.), 비틀즈가 대성공을 거두자 인기에 취해서 신시아와 줄리안을 냉대하기 시작했다.

여왕과 다른 왕실 가족들이 관람한 로열 버라이어티 쇼 공연 때, 레논은 관객을 향해 다음과 같은 대담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다음 곡을 위해서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싼 좌석에 있는 사람들은 손뼉을 쳐주시고, 나머지 분들은 보석을 흔들어주세요.”


1년 후인 1964년 2월에 비틀즈는 <에드 설리번 쇼>를 통해 미국에서 역사적인 데뷔 공연을 펼쳤고, 삽시간에 세계적인 스타로 도약하게 된다. 비틀즈는 2년 동안 지속해서 투어를 돌면서 영화 제작과 작곡을 했다. 레논은 이 무렵 책 <그 자신의 이야기(In His Own Write)>, <일하는 스페인 사람(A Spaniard in the Works)>까지 집필하는 열정을 드러낸다. 비틀즈는 1965년 여왕 서작식에서 대영 제국 훈장(MBE)을 받았다.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하자 레논은 공연을 보는 팬들이 지르는 함성 때문에 노래들의 노래가 묻혀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밴드의 음악성이 악화될 것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Help!〉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노래로까지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즈음 그는 스트레스로 인해 갑작스레 살이 불었고(평론가들은 이 당시 그를 ‘살찐 엘비스’ 시기에 비유했다), 무의식 중에 탈출구로서의 변화를 모색하고자 하는 열망을 느꼈다. 그해 3월 레논, 해리슨과 그들의 부인을 저녁 파티에 초대한 치과 의사는 몰래 커피 속에 LSD를 담아 그들에게 권하는 일탈을 벌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들이 파티를 마치고 돌아가려고 할 때 치과의사가 LSD를 복용했다는 것을 밝히면서 부작용 때문에 외출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밖으로 나간 그들은 한 나이트클럽의 엘리베이터에서, 마치 불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고함을 질러댔다.


1966년 3월, <이브닝 스탠더드>의 리포터 마린 클리브와의 인터뷰 중에 레논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


“기독교 신앙은 없어질 거예요. 오그라들고 사라질 거란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보다 인기가 많아요. 로큰롤과 기독교 중에 어떤 게 먼저 없어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발언은 정작 발원지였던 영국에서는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다섯 달 후인 8월에 미국의 한 잡지가 인터뷰를 공개하면서 큰 파급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미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비틀즈 음반을 불태웠고, KKK는 레논을 위협하거나 공연 중 난동을 부렸다. 이 같은 활동은 비틀즈가 투어를 중지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이 때문에 비틀즈는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해프닝과 밥 딜런과의 접촉 등 다양한 사건들은 그들로 하여금 기존 음악성을 탈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비틀즈가 아이돌 그룹에서 역사상 가장 실험적인 밴드 중 하나로 변모하는 터닝 포인트가 된다.


음악적 전환과 함께 비틀즈의 활동 스타일 자체에도 큰 변화가 생기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일체 콘서트를 중단해버린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의 마지막 콘서트인 ‘Rooftop Concert’의 영상은 남겨졌지만. 이 ‘Rooftop Concert’는 폴이 멤버들에게 제안해서 성사된 42분 길이의 즉흥적인 연주였고 정식 콘서트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형태의 것이었다.


1966년 8월 29일, 마지막 상업적 콘서트가 끝나고 일상적이던 라이브 공연을 뒤로한 레논은 상실감과 밴드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의도치 않았던 LSD 복용 이후 약물 사용이 늘어났으며, 특히 1967년에는 약물중독으로 판단될 지경의 영향을 받았다.


전기작가 이안 맥도널드에 의하면, ‘레논은 지속적인 복용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지워질 뻔했다’고 한다. 1967년 레논이 쓴 〈Strawberry Fields Forever〉가 발표되었고, <타임> 지는 ‘놀라운 창의력’이라고 격찬을 내놓는다. 비틀즈의 대표 음반인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가사는 레논-매카트니가 초기에 쓴 간단한 사랑 노래와는 큰 대조를 이루었다.

8월에 마하리시 마헤쉬 요기를 소개받은 비틀즈는 그의 초월 명상 세미나가 진행되는 웨일스의 뱅고어에서 주말 개인 강습회에 참여했다. 그들은 그 세미나 도중에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들을 움츠려 들었고 홀로 되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해리슨과 레논은 동양 종교에 대한 흥미가 컸고, 이에 힘입어 비틀즈는 나중에 인도에서 마하리시의 아시람을 방문하여 더 많은 지도를 받았다. 거기에 있는 동안 그들은 <The Beatles>와 <Abbey Road>의 대부분 곡을 작곡했다.

브라이언 앱스타인과 함께한 비틀즈

그 와중에 레논은 혼자서 장편 반전 영화 <존 레논의 전쟁 대작전>에도 출연했다. 비틀즈가 처음으로 엡스타인 없이 진행한 텔레비전 영화 프로젝트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는 폴 매카트니가 진행하고 비틀즈가 직접 각본 및 감독을 맡았다. 그해 12월에 공개된 영화는 평론가로부터 비틀즈 작품으로서는 처음으로 악평을 받았으나, 레논이 루이스 캐럴로부터 영감을 얻은 〈I Am the Walrus〉를 수록한 사운드트랙은 성공을 거뒀다.


엡스타인의 사망 이후, 비틀즈 멤버들은 사업 활동에 점차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1968년에 2월 애플 레코드와 몇 개의 자회사로 이루어진 멀티미디어 기업인 애플 코어를 세웠다. 레논은 기업을 ‘사업 구조 내에서의 예술적 자유’를 추구하기 위한 시도라고 설명했으나, 그의 늘어만 가는 마약 실험과 오노 요코에 대한 집착, 그리고 매카트니 자신의 결혼 계획으로 인해 애플은 전문적인 매니지먼트가 필요했다. 레논은 비칭 경에게 그 역할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고 돌아가 음반을 만들라고 충고했다.


레논은 롤링 스톤스와 여러 밴드의 매니저를 맡아온 앨런 클라인에게 부탁했다. 클라인은 레논, 해리슨, 스타에 의해 애플 최고 경영자로 임명되었지만, 매카트니는 매니지먼트 계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1968년 말 레논은 더티 맥의 멤버로서 <더 롤링 스톤스 록 앤 롤 서커스>에 출연했다(1996년까지 발표되지 않았다). 이 슈퍼그룹 더티 맥은 레논, 에릭 클랩턴, 키스 리처즈, 그리고 미치 미첼로 구성되었고, 오노는 영화 내에서 백 보컬을 담당했다.

1966년, 비틀즈가 투어를 중단하고 휴식기를 갖게 되자 레논은 미국에서 일본인 전위 예술가 오노 요코의 전시회를 관람한 것을 계기로 요코에게 푹 빠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화이트> 앨범을 작업하던 도중인 1968년 신시아와 이혼하고 요코와 재혼한다.


요코는 존을 아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대학에서 신시아가 다른 남자와 얘기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신시아의 뺨을 때릴 정도로 남성 위주 성향을 가졌던 레논은 요코를 만난 뒤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전위 예술을 자신의 음악에 접목시켰다. 존은 요코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난 늘 예술가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을 꿈꾸어 왔다. 나와 예술적 상승을 공유할 수 있는 여자 말이다. 요코는 바로 그런 여자였다.”


일부 팬들은 훗날 요코가 비틀즈 해체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여겨 그녀를 ‘마녀’, ‘일본 잡귀’라며 맹렬히 비난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비틀즈 해체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을 부인하기도 어려운 정황이었기에 어찌 보면 팬들의 비난은 당연한 것이었다.


비틀즈 해체의 직접적인 요인은 멤버들 간의 음악적, 사업적인 이견과 개인적인 불화였다지만 바로 그 불화를 가속화 및 재점화하는데 요코가 크게 관련되어 있던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또한, 다수의 비틀즈 팬들 입장에 그녀는 어느 날 나타나 레논을 이혼시키고 그의 옆자리를 차지한 듣보잡이었고, 심지어 그의 음악까지 간섭했기에 굴러들어 온 돌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연유로 비틀즈 해체에 미친 영향 이상으로 과도하게 까이는 경향도 확실히 있다.

1969년 3월, ‘Bed-In for Peace’ 시위 도중 인터뷰를 하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어쨌든 1968년을 기점으로 존은 전위 예술가인 오노 요코의 영향을 받아 갖가지 기행을 일삼는다. 신혼여행 대신 언론을 호텔방에 초대한 후 침대 위에서 파자마를 입고 앉아 반전시위를 한다던가, 요코와 함께 발매한 실험 음반 재킷에 알몸으로 사진을 찍어 커버로 삼는다든가 하는 행위들이 팬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기에 어려웠다.


그렇게 레논의 관심은 비틀즈에게서 멀어져, 1968년과 1969년 사이 오노와 작업한 세 개의 실험 음악 음반, <Unfinished Music No.1: Two Virgins>, <Unfinished Music No.2: Life with the Lions> 그리고 <Wedding Album>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1969년에는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결성하여 <Live Peace in Toronto 1969>를 발표했다. 1969년과 1970년 사이에 레논은 1969년 베트남 전쟁 반대 노래로 널리 채택된 〈Give Peace a Chance〉, 헤로인 복용 후 그의 후회하는 심정을 표현한 〈Cold Turkey〉, 그리고 영국이 비아프라 전쟁에 개입한 데 항의하는〈Instant Karma!〉를 발표했다.


영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국을 지원한 것과, 〈Cold Turkey〉의 차트 순위가 내려간 것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레논은 훈장을 여왕에게 반납하겠다고 까지 밝혔으나, 그건 포기할 수가 없는 권리였던 터라 아무 영향이 없었다.


결국 레논은 1969년 9월에 비틀즈를 떠났고, 그룹이 녹음 계약을 재협상하는 동안에는 이를 매체에 발표하지 않기로 동의했다. 하지만 1970년 4월 매카트니가 데뷔 솔로 음반 발표와 동시에 밴드 탈퇴를 선언하자 레논은 분개하며 자신이 선수를 놓쳤다고 생각했던 탓인지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하느님 맙소사! 그가 전부 자기 걸로 만들어버렸어!”

그는 후에 ‘내가 밴드를 시작했고, 내가 해체했다. 그렇게 단순한 거다.’라고 썼다. 실제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폴 메카트니에게 선수를 빼앗겼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폴이 한 것을 안 한 난 바보였다. 음반 파는데 그걸 이용한 거 말이다.”


이때부터 그의 불안정한 정서를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 예컨대, 다른 멤버들이 오노를 향해 느끼는 적개심을 눈치챘다는 얘기 한다거나, 자신과 해리슨과 스타가 폴을 위한 ‘사이드맨 취급을 당했다’며 폴에 대한 공격과 비난성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원인을 제공한 것이 자신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으며 계속 폴이 자신을 배신한 것이고 팀을 배신한 것이라는 피해망상에 가까운 생각에 사로잡혀 그저 외부적인 요인만을 탓했다.


“엡스타인의 사망 후 비틀즈는 무너졌다. 폴이 그 역할을 이어받아 우리를 이끌고자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을 뿐인데 뭘 이끌었겠는가?”


해체 즈음의 비틀즈 멤버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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