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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20. 2022

오디션만 49번을 떨어지고 개성이 없다 무시당했지만-1

20세기 대중음악을 상징하는 뮤지션들의 전설이 되다.

236번째 대가의 이야기.


1940년, 영국 리버풀에서 상선 해병이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그의 탄생과 함께 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친할아버지 이름 존 ‘잭’ 레논(John ‘Jack’ Lennon)에서 따왔고, 중간 이름 윈스턴은 당시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에서 따서 지었다.


배를 타는 직업 탓에 아버지는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지만, 가족이 사는 리버풀의 뉴캐슬 로드로 꾸준히 일정한 생계비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1944년 2월 실종되면서 생계비 지원이 끊겼다가, 기적적으로 6개월 후 발견되어 가족을 돌보겠다며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머니 줄리아와 함께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밴 상태였던 그의 어머니, 줄리아는 아버지를 거절했다. 줄리아의 언니인 미미 스미스가 리버풀 사회복지부에 두 번을 요청한 끝에 줄리아는 그의 양육권을 미미에게 넘겨버리고 만다. 1946년 7월 그의 아버지는 미미 스미스를 찾아가 그를 블랙풀에 데려왔고, 뉴질랜드로 가서 살 계획을 몰래 세운다.


줄리아는 당시 남자 친구 바비 디킨즈와 함께 그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뜬금없이 다 포기한 듯했던 아들의 양육권을 두고 격한 언쟁을 벌였고, 아버지는 5살밖에 안되었던 그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중 누구를 따라갈 것인지 선택하게 했다.

정작 그는 아버지를 두 번이나 선택했으나, 어머니가 떠나려고 하자 울면서 어머니를 쫓아갔고, 이후 아버지와는 20년간 연락이 끊겼다. 당시 그는 근처 고아원이었던 스트로베리 필드(Strawberry Field)에서 자주 놀았는데, 이때 Walrus(바다코끼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유년기를 보낸 멘러브 애비뉴 251번지


정작 포기했던 아들을 빼앗아가다시피 했던 이상한 어머니는 그를 다시 자기 언니에게 보냈고, 그는 이후 자식이 없던 이모 미미 스미스와 이모부 조지 스미스와 함께 멘러브 애비뉴 251번지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모는 그에게 다양한 짧은 이야기책을 사주었고, 농장에서 농부일을 하던 이모부는 그에게 하모니카를 사주고 같이 십자말 퍼즐을 풀어주기도 하며 부모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어머니 줄리아는 주기적으로 아들을 방문했으며, 그는 11살 때부터 블룸필드 로드 1번지에 살던 어머니를 자주 방문했다. 줄리아는 자신을 방문한 아들에게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들을 틀어주고, 밴조를 가르쳐 주었으며, 패츠 도미노의 노래 〈Ain't That a Shame〉의 연주법을 알려주었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위대한 뮤지션 중 한 명으로 항상 꼽히는 독보적인 인물로, 20세기의 대중음악을 상징하는 인물들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비틀즈의 멤버이기도 했던 존 레논(John Lennon)의 이야기이다.


비틀즈 시절의 인기도 대단했지만, 솔로로 전향하고 난 뒤의 커리어도 악명 높은 노엘 갤러거, 루 리드와 쟈니 로튼에게 동시에 극찬을 받을 정도로 후대 뮤지션들에게 존경을 받는 음악가이다. 물론 동료 및 후대 음악가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인기가 좋아, 영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8위에 선정될 정도로 대중들에게도 존경을 받는다.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꿨다고 평가받는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비틀즈의 전 멤버였다. 비틀즈 내에서는 리듬 기타리스트 겸 리드 보컬이었다. 다른 비틀즈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리버풀 출신으로, 비틀즈의 창립자이자 초대 리더로서 비틀즈라고 하면 폴 매카트니와 더불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음악가가 되었다.


비틀즈를 탈퇴한 이후로는 영국을 떠나 뉴욕에 정착해 활동했다. 1970년대 이후로는 음악뿐만 아니라 좌익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자전적이면서도 사회참여적이고, 몽환적이면서도 주제 의식이 뚜렷한 가사들로 밥 딜런, 짐 모리슨, 폴 매카트니와 더불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사가로 불리고 있다. 음악적으로도 팝 록, 포크 록, 아방가르드에서 그가 미친 영향은 말할 나위 없이 어마어마하다. 비단 이런 장르들 뿐만 아니라, 대중 음악계에서 그의 영향력을 받지 않은 음악가를 찾기 힘들다.


팝과 R&B의 전설 마이클 잭슨과 헤비메탈의 전설 블랙 사바스가 동시에 존 레논의 영향력을 언급했을 정도이니 다른 뮤지션들은 굳이 논하지 않아도 그 영향력을 충분히 짐작할만하다.

1980년 9월, 인터뷰에서 존 레논은 자신의 가족과 어린 시절 자신의 반항적 본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제 마음 한편에서는 미치광이 떠버리 시인/뮤지션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면에서 받아들여지고 싶어 하는 측면도 있어요. 하지만 전 제 자신을 거스를 순 없습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폴의 부모님을 포함해서—'저 아이를 피해라'라고 할 아이였습니다. 부모들은 제가 문제아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거라고 생각했죠. 사실 그들 말이 맞아요, 저는 다른 친구들의 가정에 최대한의 방해를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제게 진정한 집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도 이유 중의 하나였죠. 하지만, 사실은 저에게도 진정한 집이 있었어요. 제 가족은 다섯 명의 여성이었습니다. 다섯 분의 강인하고, 총명하며, 아름다운 여성들, 다섯 자매였어요. 그중의 한 명이 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리 요령 있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줄리아는 막내였고, 바다로 떠나버린 남편이 있었고,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신이 없어 저를 제대로 챙길 수가 없었죠. 그리고, 전 줄리아의 언니와 살게 되었어요. 그녀들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이게 저의 첫 번째 페미니즘 교육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애들을 이런 식으로 물들이려 했어요. ‘부모님은 신이 아니야. 나는 내 부모님과 같이 살지 않잖아. 그래서 아는 거야.’”

레논은 플리트우드에 살고 있던 7살 더 많은 사촌 스탠리 파크스에게 자주 놀러 다녔는데, 파크스는 레논과 함께 여행을 다니거나 동네 영화관에도 자주 갔다.


방학 동안 파크스는 다른 사촌 레일라 하비와 함께 레논을 방문하여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블랙풀 타워 서커스를 보러 가거나 디키 밸런타인, 아서 에스키, 맥스 바이 그레이브스, 그리고 조 로스의 공연을 관람했다.

레논은 성공회 신자로 자랐고, 리버풀에 있는 쿼리 뱅크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는 가끔씩 직접 만든 학교 잡지 <데일리 홀(The Daily Howl)>에 만화를 그리기도 했으나, 그의 뛰어난 미술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기록한 그에 대한 보고서에는 ‘실패의 길의 걷고 있음이 틀림없다. 희망이 없다. 교실의 광대와 다름없다. 다른 학생들의 시간을 낭비한다.’라고 적으며 그를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1956년, 레논의 어머니는 5파운드 10실링을 주고 값싼 개로톤 챔피언 어쿠스틱 기타를 사서 레논에게 ‘빌려’ 주었다. 대신 주문할 때에는 누나인 미미가 레논의 음악적 포부에 반대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미 스미스의 집이 아닌 자기의 집으로 배송을 시켜 아들의 음악적 시간을 배려해주었다. 미미는 자신이 언젠가는 유명해질 거라 떵떵거리는 레논의 주장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언젠가 음악을 지루하게 받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타 치는 건 아주 좋아, 존, 하지만 그걸로 먹고살 수는 없어.”


1958년 7월, 레논이 17세가 되던 해 그의 어머니 줄리아는 미미 스미스의 집에 방문 후 귀가하던 길에 만취한 경찰관인 에릭 클래그가 운전하던 경찰차에 치어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해당 경찰관이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점이었다. 당시 여론과 시민단체에선 사실상 살인이자 뭐든지 술만 먹으면 다 감형해주냐면서 경찰과 법원을 강하게 비난했다. 어머니의 죽음과 말도 안 되는 재판은 존 레논의 삶에 큰 영향을 주며, 그는 방황하게 된다.

폴 메카트니와 함께

여담으로, 어머니의 이 교통사고는 역시 유방암으로 어머니를 잃었던 폴 메카트니와의 우정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음악에 더욱 몰입하게 된 존은 폴에게서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 이 때문에 존 레논은 특히 어머니와 관련된 곡을 자주 썼으며, 첫째 아들 이름도 줄리안으로 지었다.


방황하던 레논은 교육 자격 검정 시험 GCE O 레벨을 통과하지 못했고, 이모와 교장이 나서서야 겨우 리버풀 예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간 레논은 교수들을 괴롭히고 수업을 방해하는 걸로 유명해졌다.


결국 레논은 회화 강의와 그래픽 아트 강좌에서 연달아 쫓겨났고, 라이프 드로잉 수업에서 누드모델의 허벅지 위에 앉는 등의 나쁜 태도로 인해 퇴학당할 수도 있다고 경고를 받았다. 학년말 시험에서 떨어진 그는 친구들과 훗날 아내가 되는 신시아 파월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학년을 앞두고 학교에서 퇴학당하게 된다.

1956년 9월, 15세의 레논은 쿼리뱅크 고등학교에서 이름을 따와 명명된 스키플 그룹인 쿼리맨을 결성했다. 1957년 여름, 쿼리맨은 스키플 반 로큰롤 반으로 이루어진 ‘영혼이 담겨진 세트 리스트’를 공연했다.


레논은 폴 매카트니를 그해 7월 울튼의 성 베드로 교회 원유회에서 열린 쿼리맨의 두 번째 공연에서 처음으로 만났고, 레논은 매카트니에게 밴드에 들어올 것을 권했다.


매카트니는 미미가 ‘존의 친구들이 하류층인 것을 굉장히 의식했으며, 레논을 방문하러 온 자신을 종종 아랫사람 대하듯 했다’고 회상했다. 폴의 형제 마이크는, 자신의 아버지도 ‘매카트니를 곤경에 빠뜨릴까 봐 레논과 어울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중에 폴의 아버지는 포틀린 20번가에 위치한 매카트니의 집 거실에서 밴드의 리허설을 하게 도와주었다. 이 시기의 18세 레논은 자신의 첫 노래 〈Hello Little Girl〉을 작곡했고, 이 곡은 5년 후 더 포모스트가 불러 영국 차트 10위 안에 진입하게 된다.


매카트니는 친구였던 조지 해리슨을 리드 기타 연주자로 제안했으나, 레논은 14살이었던 해리슨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매카트니는 후에 조지를 위해 리버풀 버스의 위층에서 오디션을 잡아주었고, 해리슨은 레논 앞에서 〈Raunchy〉를 연주했다. 레논의 예술학교 친구인 스튜어트 섯클리프는 후에 베이스 연주자로 밴드에 들어왔다. 그렇게 레논, 매카트니, 해리슨과 섯클리프는 1960년대 초 ‘비틀즈’가 되었다.


그해 8월에 비틀즈는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48일간 거주하게 되었는데, 당시 공연을 위해 드럼 연주자가 급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피트 베스트를 영입했다. 레논의 이모는 당시 19세였던 레논이 함부르크에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상당히 충격을 받아, 그런 여행 대신 미술 공부를 계속하라고 설득했다.


함부르크에서의 첫 체류 이후 비틀즈는 1961년 4월에 두 번째로, 1962년 4월에 세 번째로 체류했다. 다른 밴드 멤버들처럼 레논은 함부르크에서 지낼 때 프레루딘을 접했고, 긴 밤 공연을 위한 각성제로 암페타민 따위의 마약을 복용했다.

본래 1960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합류하고 밴드 명을 ‘실버 비틀즈’로 변경하고 활동하다가 후에 피트 베스트가 들어오자 밴드명을 ‘비틀즈’로 최종 결정한 것이다. 이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밴드에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탈퇴하게 되고, 피트 베스트는 나머지 멤버의 불만 때문에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즈(Rory Storm and Hurricanes)’의 드러머 링고 스타로 교체되게 된다.


<Please Please Me> 녹음 때까지만 해도 링고 스타의 자리는 상당히 불안했으나, 결국 드러머로 링고 스타를 확정하면서 본격적으로 비틀즈가 출범한다.


1962년부터 비틀즈의 매니저를 맡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이전에 밴드 매니저 일을 해본 경험이 없었지만, 비틀즈의 초창기 복장 양식과 무대 태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된다. 레논은 처음에 엡스타인이 제안한 양복 차림의 전문적인 용모를 강하게 거부했으나, 결국에는 “돈만 준다면 바보 같은 풍선이라도 입어야지.”라며 받아들였다고 한다.

매카트니는 섯클리프가 함부르크에 남기로 하자 대신해서 베이스 연주자를 맡기로 했고, 드럼 연주자는 베스트에서 링고 스타로 교체되었다. 비틀즈는 1970년 해산까지 4인조 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밴드의 첫 싱글 〈Love Me Do〉는 1962년 10월에 발매되었고, 영국 차트에서 17위를 기록했다.


그들은 데뷔 음반 <Please Please Me>를 1963년 2월 11일 10시간에 걸쳐 녹음하게 된다. 그 날 레논은 감기에 걸려있었고, 이는 그 날 마지막으로 녹음된 곡 〈Twist and Shout〉를 들어보면 그의 보컬에도 그 사실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다.


비틀즈 활동 초기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와 함께 거의 대부분의 곡을 썼으며, 이 둘의 협력은 '레논-매카트니'라고 칭해진다. 레논-매카트니는 데뷔 앨범의 14곡 중에서 8곡을 작곡했다. 레논은 이때만 해도 앨범 제목 등 몇 가지를 빼곤 가사에 말장난을 넣지 않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우린 그냥 노래를 썼어요.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단순히 노래를 쓴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가사들은 대부분 상관없었죠.”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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