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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24. 2022

서른이 넘어 미국 대학에 다시 들어가 경제공부를 하고서

한국 경제학의 대부이자 시대에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어른으로 기억되다.

237번째 대가의 이야기.


1928년 강원도 강릉군 구정면에서 유학자의 1남 2녀 중 아들로 태어났다. 강릉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난한 집안 형편상 고향집을 떠나 숙부에게 맡겨져, 1940년 5월부터 평양지방법원 판사로 근무하고 있던 숙부 조평재의 집에서 기거하기 시작하면서 평양 고등 보통학교가 개칭된 평양제이중학교에 입학했다.


숙부가 1943년 3월 판사를 사직하고 변호사로 경성부에서 개업함에 따라, 숙부를 따라 그 역시 평양제이중학교 2학년 수료 후 경성으로 전학하여 경기중학교(현 경기고교)에 편입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패전 위기에 몰린 일제가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발표하고 징병령을 공포하자, 부친의 뜻에 따라 낙향하여 해방 때까지 한학을 공부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된 후에 다시 경성에 올라와 경기중학교에 복학했고, 1946년 경성경제전문학교에 진학하여 1949년 국립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문부를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거둬주었던 숙부는 성적도 충분하니 법학도의 길을 걷길 권했지만, 케인즈 같은 경제학자가 되어 수천 년 가난을 해소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경제학의 길을 선택한다.


하지만 서울대 상대는 당시만 해도 부기 등을 가르치는 정도로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그는 대학생활과 경제학에 흥미를 잃고 영문학에 심취한다. 그러던 중 20세의 나이로 같은 고향 출신의 김남희 씨와 결혼한다.

 

1949년 7월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있는 강릉농업중학교(당시 6년제. 現 강릉중앙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영어를 가르쳤고, 6.25 전쟁 발발 후 입대하여 제9보병사단 통역장교로 근무했으며, 1951년 4년제 육군사관학교 재건 작업을 위해 육사로 전보되어 1952년부터 1957년까지 육군사관학교 영어 전임강사로 생도들을 가르쳤다.

대한민국 경제학계의 대부이자 거목으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한국은행 총재, 서울 특별시장, 한나라당 초대 총재를 역임하였으며, 특유의 백미(白眉)가 특징적인 외모로 부각되어 '산신령'으로도 불리는 조순(趙淳)의 이야기이다.


케인즈 학파의 일원으로서 많은 학문적 업적과 제자를 남겨 한국의 경제학계에서 ‘조순학파’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인맥을 구축하였다. 조순·정운찬 공저(현재는 전성인, 김영식도 공저자) <경제학원론>은 한때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제학원론의 교과서였다.


이러한 이유로 조순을 ‘한국의 케인즈’라고 부르는 이들도 많다.

육사 교관을 지내면서도 경제학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던 그는 전역 후, 다소 늦은 나이인 30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국 동북부에 있는 보든 칼리지에서 학사를 시작으로 경제학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경제학 석사 및 ‘후진국의 외자조달 방안’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뉴햄프셔 주립대학에서 조교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학문의 깊이를 더한 그는 귀국하여 1968년부터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해 1988년까지 재직했다. 1974년에는 제자 정운찬과 공저로 경제학 분야의 최고 인기 교과서인 <경제학원론>을 써서 한국 대학 학부과정에 미국에서 발전된 현대 경제학 이론을 보급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의뢰를 받고 인플레이션, 중화학공업에 치우친 산업정책, 민간 경제활동 통제 등에 대한 비판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10.26 사태로 박 전 대통령이 숨을 거두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나중에야 공개된 바 있다.


이 미공개 보고서는 지금까지도 당시 경제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해법을 담고 있어 경제학자들은 물론이고 경제에 관심 있는 정치인들에게는 필독 교재처럼 높은 평가를 받는다.


경제학자로서의 그는 자율경쟁과 올바른 규율을 신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부터 흰 눈썹을 휘날리며 제자들과 산에 오르내려 ‘산신령’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그는 육군사관학교 영어 교관으로 근무하며 노태우 대통령을 가르쳤던 인연으로, 1988년 노태우 정부에 입각하여 1990년까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냈다.

부총리로서 긴축정책을 밀고 나가면서 토지공개념 등을 추진했다. 균형과 형평, 안정을 특히 강조했다. 그러나 86~88년 3 저호황으로 두 자릿수를 넘겨 성장하던 경제가 89년에 6%대로 떨어졌고 이에 따른 정치권과 재계의 불평으로 그의 입지가 좁아진다. 한국중공업 민영화 문제를 놓고 경제수석과 마찰로 사표 소동을 빚기도 했다.


행정경험이 미숙해 다른 경제부처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평을 듣기도 한 학자 출신 조순 부총리는 1년 3개월 만에 퇴진한다. 그리고 다시 2년 후 1992년 3월 그는 한국은행 총재로 현실 경제에 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정주영 당시 국민당 대표에 대한 고소취하 문제 등으로 김영삼 정부와 갈등을 빚어 1년 만에 물러난다.


경제기획원 장관 및 한국은행 총재 재임 시절 내내 학자로서의 소신에 따라 정권의 방침과 자주 충돌하고 사표를 던져 재직 기간이 길지 않았다.

한은 총재를 그만둔 뒤에 개인 사무실인 소천 서사에서 연구활동에 전념하다가 이화여대에 석좌교수로 대학에 다시 돌아가게 된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대쪽 학자’의 이미지를 얻은 그에게 93년 말 정치권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찾아왔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아태평화재단을 창설, 통일. 외교분야 연구에 나섰던 김대중 이사장의 재단 영업 교섭이 온 것이다. 조 교수는 재단 자문위원을 맡았고 1년 반여 후 김대중 이사장의 권유로 민주당에 들어가 경선을 통해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됐다.

그렇게 대한민국 사상 두 번째 민선 서울 특별시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1995년 헌법 개정 후 첫 민선 시장을 지냈다. 당시에 유명했던 포청천을 이미지 메이킹에 활용하기도 하면서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서울 시장 취임 전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발생해서 취임식을 현장에서 했다. 유서 깊은 여의도광장을 갈아엎고 여의도공원을 조성한 것도 바로 조순의 공적이다.


이후 무난하게 서울 시정을 이끌며 1997년에는 제15대 대통령 선거 주자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15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이러면서 시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9월 9일에 사퇴해 2년 만에 시장직을 마무리했다.


김대중의 정계 복귀 이후 민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지내오다가 1997년 다시 잔류 민주당이던 통합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한때 여론조사에서 20%가 넘는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후 답보 상태가 지속되면서 크게 하락세를 보였고, 국민회의 김대중, 자민련 김종필 후보 등에 비해 군소정당 후보로서의 한계에 부딪히자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연합하여 합당하고 결국 후보직을 사퇴하게 된다.

이후 신한국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을 창당해 총재에 올랐다. 여담이긴 하지만, 그렇게 비아냥거림을 당하던 그 ‘한나라’라는 이름도 그가 작명한 것이다.


1998년에는 최욱철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음에 따라 치러진 강원도 강릉시 을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친여 무소속 최각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2월에 서울 종로 출마를 선언하고 정인봉 등의 다른 예비후보들의 추대를 받아 공천을 받았지만, 이회창 총재가 당내 중진들을 계속 낙천시키는 행보를 보이자 이에 반발하여 공천을 반납한 후 한나라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한 김윤환, 이기택 등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정작 본인은 불출마하였다.

결국 이 정당이 지역구 1석, 전국구 1석을 획득하는 정치적인 완벽한 실패를 맞이하면서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2003년 참여정부에서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직을 맡았다.


중국은 금융업이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대한민국과 일본은 금융업이 발달하기 어렵고 제조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경제학자 중에는 독특한 의견에 해당한다고 주목을 받았다. 주택대출을 꺼리는 중국인의 특성상 부동산 버블이 발생하기 어렵다고도 예측하기도 하는 등 경제학자로서의 의견도 끊임없이 내놓았다.

어릴 때 선친으로부터 배운 한문을 바탕으로 한문 고전을 혼자서 독파하기도 했다. 한학을 깨치고 신학문의 대가가 되었기 때문인지 1993년부터 1년간 도산서원 원장을 맡았고, 2002년부터 5년 간 민족문화 추진회 회장을 역임했다.


워낙 건강하게 지내왔으나, 어제 2022년 6월 23일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향년 94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제 선생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듣고 오랜 인연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제자였던 학생 때부터도 그랬지만, 머리가 크고 나서 결혼식 주례는 반드시 직접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고 주례사에 학생 시절의 이야기를 하시며 밝게 웃으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선생은 결코 정치를 할 스타일도 그럴 마음도 없던 분이셨다. 하지만, 시대의 부름인지 본인의 거절하지 못하는 우직함 때문이었는지 20년의 모교 교수직을 거두고 정치 쪽이 본의 아니게 투신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기억되었다.


그래서 내가 위에 간략하게 정리한 것과 같이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쳐 자의 반 타의 반 밀려나듯 물러나야만 했다. 가끔씩 좋아하시는 케이크를 사 가지고 계신 곳을 찾아가면 매일같이 연구실에 찾아가던 모습으로 반갑게 맞아주시던 모습이나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세상 사는 이야기가 결국 나라를 걱정하는 이야기로 번져나갈 즈음이면 당신이 이루지 못했지만, 나라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강한 소년과 같은 열정을 보이셨더랬다.


선생은 2016년 4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생선은 몸통보다 머리가 먼저 썩는다’며 ‘책임지지 않는 제도와 의식으로 정치는 결코 제대로 될 수 없다’며 이명박근혜로 이어지는 좀 먹어가는 나라에 일침을 가한 바 있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난 직후에도 ‘이제는 국가를 새로 만드는 리빌딩 과정이 필요하다’며 목소리를 냈었다.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정도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어리석을 정도로 뻔한 실패를 수차례 겪어가며 정치판에서 배신으로 상처 입었을지를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흔을 넘기고 마지막으로 뵙고 이렇게 타국에서 선생의 타계 소식을 들으니 선생이 평탄한 20여 년의 모교에서의 즐거운 시절을 기억하면서도 당신이 겪은 정치판에서의 실패와 고난들도 결국 다 본인이 자초한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터트리던 모습을 보며, 진정한 시대의 어른이 가져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했더랬다.

선생은 자신이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 실패의 안에 있을 때는 혹은 실패하기 전까지는 당연히 실패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일을 도모하지 않았다고 당당한 실패자의 얼굴로 고백했다. 선생이 모교에서 보낸 불과 20년의 세월이 선생은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판에 불려 나가고 배신당하고 사세(事勢)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제대로 된 성과를 이루지도 못하고 그렇게 불발탄처럼 끝난 정치인으로서의 삶조차도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 회고하였다.

그 말의 행간에는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실수와 자신의 실패를 모두 복기한 자의 반성이 들어있는 것이다. 바둑을 둘 때는 왼손으로 두고 복기하자고 할 때는 오른손을 쓰는 다소 생뚱맞은 습관을 가지고 있던 그 분과 이제 바둑을 둘 수도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할 수도 주례를 서주셨으니 이제 우리 아이의 주례도 또 서달라는 농도 건넬 길이 없다.


 


무수하게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에 대한 원인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복기한 사람은 그것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지 그것을 붙잡고 연연하다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거나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서울대 졸업하고 자기 전공도 아닌 고향에서 고등학교 영어선생을 한 것도 그렇고, 결혼한 지 10년이 넘어 서른을 넘겨 버젓이 다시 미국으로 유학 가서 학부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그 성과를 이뤄낸 뚝심은 바로 그런 실패에 대한 복기를 가능하게 했다.

당신의 실패가 당신을 무너뜨리거나 좌절하게 만드는 사고가 아니라 당신을 좀 더 깊이 있고 진중하며 더 발전된 모습으로 나아가게 함은 결국 당신의 분석과 반성과 노력이 만든다는 것을 한평생 학자의 모습으로 살다 간 선생의 삶을 통해 깨닫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선생의 돌아가시는 길이 늘 산책하시던 길 같기를 바라며 부족했던 제자가 이 글, 한 편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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