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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01. 2022

말을 참는 것이 어떻게 仁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자신이 모르는 것은 일단 부정하고 보는 무식한 이들에게.

司馬牛問仁, 子曰: “仁者, 其言也訒.” 曰: “其言也訒, 斯謂之仁矣乎?” 子曰: “爲之難, 言之得無訒乎?”     
司馬牛가 仁을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仁者는 그 말을 참아서 한다.”〈司馬牛가〉 “그 말을 참아서 하면 이를 仁이라 이를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행하기가 어려우니, 말을 참아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장은 앞의 두 장에 이어 사마우라는 자가 공자에게 똑같은 개념인 인(仁)에 대해 묻는다. 이것은 안연편이 편집자들의 심혈을 기울인 구성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1,2,3장이 똑같은 개념인 인(仁)에 대한 문답인데, 그 방식이 비슷한 듯 하면서 다르며, 내용은 확장하는 듯 하다가 세부적인 부분으로 점차 내려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연히 안연보다 중궁이 약간 부족했고, 사마우가 가장 일반적인 제자 수준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렇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 3장을 시작으로 세 장에 걸쳐 등장하는 사마우도 그저 일반인 수준으로 폄하될만한 대상은 아니다. 무엇보다 공자의 문하에서 공부한 인물이었고 그가 묻는 개념이 공자가 강조함에 마지않는, 그 어렵다는 인(仁), 아니던가?     


먼저 주자는 사마우라는 인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을 통해 설명한다.     


司馬牛(사마우)는 공자의 제자로 이름이 犁(리)이니, 向魋(상퇴)의 아우이다.     

司馬牛(사마우)는 본래 송나라 사람으로 이름이 경(耕) 또는 리(犁)이고 자가 자우(子牛)였다.앞서 공부했던 ‘술이(述而)편’의 22장에 나왔던 나무를 뽑아 공자를 죽이려고 했던 사마환퇴(司馬桓魋)의 동생이다. <72제자해(七十二弟子解)>의 기록에 의하면, ‘성품이 조급하지만 언변이 능란했으며, 자기 형 환퇴의 나쁜 행실을 보고 항상 걱정했다’라고 전한다. 굳이 이 내용을 인용하는 것은 공자가 그에게 인(仁)을 설명할 때 그의 눈높이에 맞춰 대답해주었음을 객관적으로 확인하라는 의도에서이다.  

    

공자는 그에게 ‘仁者는 그 말을 참아서 한다.’고 말한다. 그의 성품에 대한 기록에 나온 것처럼 그가 언변에는 능수능란하여 자신이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공자가 이미 인지하고 있었음을 감안하고 읽는다면 이 대답을 들은 사마우가 뜨끔하게 느꼈을 것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주자는 이러한 공자의 대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訒(인)’은 참음이며 어려워(신중히) 하는 것이다. 仁者(인자)는 마음이 보존되어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말이 마치 참는 바가 있어서 쉽게 내지 않는 듯하니, 이는 그 德(덕)의 一端(일단)이다. 夫子(부자)께서 司馬牛(사마우)가 말이 많고 조급하기 때문에 이로써 말씀해 주어서 이(말)에 삼가게 하신 것이니, 그렇다면 仁(인)을 행하는 방법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성격이 조급한 데다가 언변이 능란하다고 평가받았던 사마우라면 당연히 자신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내용이 있거나 자신을 변호해야하는 상황이라면 이말이든 저말이든 먼저 말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공자가 굳이 말을 참으라고 한 이유에 대해서도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바로 그가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굳이 ‘인(仁)이란 그러한 것이다’라고 설명하는 스승에게 ‘그렇게 하면 인(仁)이 되는 것입니까?’라고 되묻는 질문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스승의 말에 의구심을 갖고 그것이 진정한 인(仁)이 될 수 있느냐고 되묻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자신은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약간의 반발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자신의 단점을 콕 찝어서 인(仁)의 구체적인 수행법이라고 말하는 스승에게 발끈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앞서 설명한 그가 조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라 추정된다.     


그러자, 공자는 다시 가만히 그에게 그렇게 말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어 설명해준다.      

“이것을 행하기가 어려우니, 말을 참아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자의 이 답변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여 그 행간의 의미를 설명해준다.     


司馬牛(사마우)의 뜻(생각)은 仁(인)의 道(도)가 지극히 커서 단지 夫子(부자)가 말씀한 바와 같을 뿐만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또다시 이로써 말씀해 주신 것이다. 마음이 항상 보존되기 때문에 일이 구차하지 않고, 일이 구차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이 저절로 쉽게 할 수 없는 것이요, 억지로 입을 닫고서 말을 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마우가 앞서 안연과 중궁에 비해 일반인 수준이라는 판단의 근거는 바로 이 주석에 있다. 사마우의 생각에는 인(仁)이라고 하면 당신이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뭔가 거창하고 형이상학적인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을 것만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행동지침일 리가 없다고 부정한 것이다.      

하지만, 공자의 가르침은 달랐다. 그리고 똑같은 구체적이고 지엽적인 행동지침을 알려주는 듯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표현되는 것이 그러할 뿐, 그 기본이 되는 원리와 마음가짐은 한 가지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가르침임을 사마우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기존의 기록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사마우의 평상시 행동에 대해서 알 수 있었을 것이라며 양씨(楊時(양시))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 부연한다.     


“이 장 및 아랫장에 다시 물은 말을 관찰하면 사마우가 그 말을 쉽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사마우가 말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공자의 가르침은 개별적인 눈높이에 맞춰 일러주는 것이기는 하나 그 원리나 기본은 하나임을 늘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자(伊川(이천))가 배우는 자들이 혹여 오해를 할까 싶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록 사마우가 말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언급하신 것이나 聖人(성인)의 말씀이 또한 여기에 그쳐도 옳은 것이다.”     


이에 주자가 왜 공자가 사마우에게 그런 방식으로 설명하였는가에 대해 설명하며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사마우의 사람됨이 이와 같았으니, 만약 그 병통의 간절한 것으로써 말씀해 주지 않고 범연히 仁(인)을 하는 大槪(대개)로써 말씀해 주었다면, 저의 조급한 성질로 반드시 깊이 생각하여 그 병통을 제거하지 못해서 끝내 德(덕)에 들어갈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기를 이와같이 하신 것이다. 성인의 말씀은 비록 高下(고하)와 大小(대소)의 같지 않음이 있으나 배우는 자의 몸에 간절해서 모두 德(덕)에 들어가는 요점이 됨은 또한 애당초 다르지 않으니, 독자들은 생각을 지극히 해야 할 것이다.     


주자의 이 주석이야말로 배우는 자들이 깊이 새겨야 대목을 다시한번 짚어준다. <논어>를 읽었답시고 거들먹거리는 이들에게 왜 공자가 똑같은 개념에 대해 묻는 사람에 따라 혹은 묻는 상황에 따라 달라졌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단순히 그 사람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단답형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의 경지를 넘어서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 흉내조차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그 사람에 대해서 명확하게 분석한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헛발질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러하고, 설사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하더라도 이 장에서 알 수 있다시피 본래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조건이 있는 것이다. 


빨간색을 표현함에 있어 의사에게는 피색깔이라고 설명하고, 과수원의 농부에게는 사과빛깔이라고 설명하며, 요리사에게는 잘 익은 고추장의 색깔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단순히 색깔만임에도 쉽지 않은 것인데,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개념일 경우에는 이 장에서 사마우가 생각한 것처럼 막연하고 말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들에 대해 구체화된 개념으로 그것도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다는 것이 쉬울 리가 없지 않은가?     

예컨대, 당신이 지금 이 장을 읽고서 공자가 사마우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무엇으로 이해했는가?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정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갔다면 당신은 공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절반도 채 건지지 못한 초심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사실 공자가 말만 잘한다고 여겨 조급한 성격에 실수가 잦았던 사마우의 최대 단점은,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보다 실천이 앞서지 못한다는 부분이었다. 즉, 말을 삼가라는 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을 먼저 가볍게 꺼내어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실천에 힘을 더 기울이라는 데 있다.     


이것은 사마우의 평상시 단점을 지적하며 그 행동가짐에 대한 지침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仁)이라는 개념을 실천에서 완성함에 있어 가장 필요로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실천을 하고나서라도 말로 떠벌려대는 것은 공자가 삼가라고 했던 바이다. 하물려 제대로 행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것저것 말로 먼저 공수표를 날리는 것은 결코 인(仁)한 자가 할 행동이 안된다고 반대 사례를 지적함으로서 아무리 인(仁)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인지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생활에서 실천으로 완성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이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설명이기도 하다.     


여담이긴 하지만 말을 삼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인(訒)이라는 단어를 쓴 것도 인(仁)과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일부러 가져온 단어임을 알 수 있는데, 본래 그 단어의 의미는 ‘말을 더듬다’ 혹은 ‘과묵하여 함부로 말하지 아니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즉, 발음의 유사성으로 하여금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본래 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평상시에 잘 사용하지 않은 단어를 가져와 상기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 장은, 제자의 답변 하나하나에 이렇게 많은 안배와 복안이 담겨 있는 답변을 하는 것은 성인인 공자가 아니고서는 구현할 수 없는 수준의 경지에 도달해야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만드는 가르침을 보여주는 장이기도 하다.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치인들의 말은 그야말로 공허한 말장난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요 며칠전부터 벌어진, ‘월북 인정 시 보상하겠다는 식의 정치인의 회유가 있었다’는 진실공방도 어찌보면 웃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월북 진위에 대한 진상을 밝힐 수 없는 서슬 퍼런 군사독재 정권시절도 아니었는데, 새삼스럽게 진실을 밝힌다며 민감한 대북 관계의 사안부터 끌고 나온 것도 그 의도가 참으로 빤하기 그지없는 일이기도 하다.     


만일 진정으로 제대로 된 진실 규명을 할 요량이었다면 그 당시 빨간당의 국회의원들이 코딱지파며 노닥거린 것이 아니었다면 새삼스레 지금 뭔가 진실이 감춰지고 왜곡되어진 것처럼 떠들 것이 아니라 그때 바로 잡고 그때 목소리를 높였으면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새삼스럽게 알게된 것처럼 뒷북을 치고 떠드는 것은 다른 의도성을 가지고 있다는 비난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빨간당의 후안무치와는 별개로 당시 부적절했던 파란당의 국회의원이란 이들이 벌인 언행은 말이 앞서 나가도 너무 마구잡이로 앞서 나간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당시에도 이상해서 거절했었다는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말을 꼬아서 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해명하겠다고 나선 국회의원의 입에서는 자신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묘한 어투로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라는 변명이 오히려 아군에게 될대로 되란 식의 수류탄을 투척하는 황당한 블랙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아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별볼일 없는 학력을 그나마도 포장하겠다고 지방 캠퍼스인것까지 감추고 가리다가 만천하에 공개되어 개망신을 당한 아나운서 출신의 국회의원은 자신이 현재 서울시장을 그 지역구에서 싸워 이겼다고 기세등등했었다. 대통령과 같은 대학동문이라는 것 하나도 인연이 되어 자신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며 아동학대와 그 관련 사실에 대해 SNS를 통해 자신이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이며 초보지만 열혈참여정치를 하겠다며 떠들어댔었다. 

그렇게 뽑아줬더니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그녀의 보좌관과 어제 아동학대 사건에 대해 힘을 기울여달라고, 그렇게 이미지 메이킹을 해댔으니 언행일치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보좌관이 끝까지 듣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화 먼저 끊겠습니다.”


이것이 지금 당장 자신들에게는 아쉬운게 없다며 거들먹거리는 그들의 민낯이다. 악어의 눈물은 악어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잊지마라. 그들은 정권이 어느 한 사람의 잘못에 의해 넘어갔다고 탓하고 싶겠지만 그들 하나하나의 헛발질과 표리부동함이 국민들에게 더 큰 배신감을 주어 차곡차곡 반대표의 포인트를 쌓았다는 것을 모르고 싶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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