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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04. 2022

하루가 다르게 반성하고 고쳐나간다면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군자가 되기 위한 조건.

司馬牛問君子, 子曰: “君子不憂不懼.” 曰: “不憂不懼, 斯謂之君子矣乎?” 子曰: “內省不疚, 夫何憂何懼?”     
司馬牛가 君子를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司馬牛가〉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를 君子라 이를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안으로 살펴보아 부족하지 않으니, 어찌 근심하고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지난 장에 이어 이번 장에서는 사마우가 공자에게 군자에 대해 묻는다. 구조는 바로 전 장과 같다. 군자가 어떤 것인가를 묻고, 공자가 대답해주자, 그렇게만 하면 군자가 되는 것인가를 되묻고, 그 행간의 의미에 대해 공자가 다시 풀이해주는 구조이다.     


사실 이 장에 대한 문답은 뜬금없이 나온 것이 아니다. 사마우가 송나라에서 공자의 문하로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형 사마 환퇴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소문이 노나라에까지 들려왔다. 이 때문에 그는 형과 나라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그렇게 불안한 마음 상태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군자에 대한 질문으로 돌려 물은 것인데, 그의 마음이 불안정함을 읽은 공자가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이러한 맞춤형 대답을 해준 것이다.      


이 사실은 이미 주자가 주석을 통해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向魋(상퇴)가 난을 일으키니, 사마우가 항상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이로써 말씀해 주신 것이다.     


인(仁)만큼이나 군자도 공자에게 있어 수차례 언급된 개념이기는 하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번에는 공자가 그 군자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번에 공자는 군자의 핵심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안으로 살펴보아 부족하지 않으니, 어찌 근심하고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통해 공자의 의도를 설명한다.     


司馬牛(사마우)가 다시 물은 것은 앞 장의 뜻과 같다. 그러므로 다시 이로써 말씀해 주신 것이다. ‘疚(구)’는 ‘병(하자)’이다. 평소에 행하는 바가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에 안으로 살펴보아 부족하지 않아서 저절로 근심과 두려움이 없는 것이니, 대번에 쉽게 여겨 이것을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됨을 말씀한 것이다.     

이 장에서의 군자에 대한 언급과 설명은 다른 장에서 공자가 군자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였는지와 비교하게 되면 그 개념에 대한 진의(眞意)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이미 앞서 ‘술이(述而) 편’ 36장과 ‘자한(子罕) 편’ 28장에서 군자에 대한 개념과 그 깊은 의미에 대해 공부한 바 있다. ‘술이(述而) 편’에서는 ‘군자의 마음은 평탄하여 넓고, 소인의 마음은 늘 근심에 차 있다’고 설명하였고, ‘자한(子罕) 편’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설명한 바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군자에 대한 단독 개념으로 설명한 적은 이번 장이 처음인 것을 알 수 있다. 대개 비교나 대조의 방식으로 설명을 하는 것은 단독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쉽게 이해를 돕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좀 더 쉽고 명징하게 설명하기 위해 택하는 방법이다. 그만큼 군자는 소인의 적대적인 개념으로 <논어>에서 규정하고 있고, 정확하게 한 마디로 ‘군자란 이런 것이다’라고 규정하는 어구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장에서는 군자에 대해 단독 개념으로 군자가 갖춰야 할 부분 중에서도 자기 안의 허물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기 수양을 통해 노력하고 있다면 외재적인 것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말라는 조언과 같은 개념을 던져준다. 앞서 배경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자기 노력을 다 하고 나서 자신의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외재적인 것을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라는 설명에 다름 아니다.      


참고로, 주자가 주석에서 설명한 ‘내성불구(內省不疚)’에서 ‘구(疚)’를 내재적 허물이나 하자의 개념으로 보는 것은 본래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앞서 한번 나왔던 사마우의 두 번씩 되물으며 질문을 반복하는 행위는 그 질문을 연이은 장에서 반복하는 것으로 사마우의 성격이 앞장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조급하고 성급하여 스승이 말한 것을 깊이 이해하기도 전에 스승이 말한 것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 그것이 1장과 2장에서 안연이나 중궁이 보였던 100% 이해하고 따르겠다는 것과는 다른 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성향의 차이라고는 하지만, 대개 고문에서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바꿔 정리하여 말하는 것으로 스승에게 자신의 이해가 온전한 것인지를 묻는 방식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전 장과 이번 장에서 사마우가 보이는 태도는 그저 스승이 말한 것을 도치하여 ‘그것이 진정한 군자란 말입니까?’라고 묻는 것으로, 진정한 행간의 의미를 이해하고 따르겠다는 경지와는 분명히 구분되고 차별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설명을 온전하게 모두 이해한 조 씨(晁說之(조설지))는 이 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음은 덕이 온전하고 하자가 없음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들어가는 곳마다 自得(자득, 스스로 만족함)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실제는 마음속에 근심과 두려움이 있으면서 억지로 이것을 배척하여 보내는 것이 아니다.”     


사실 공자가 이 가르침을 통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이 조언의 핵심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면’이 아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는 어렵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끊임없이 그렇게 노력하며 살 수는 있다. 그것이 중요하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경지에 올랐다고 자부하기 전에 그 경지에 오르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어떻게 하는지가 군자가 되기 위한 관건이다. 


조금 깊이 있게 들어가 설명하자면 군자는 과거완료형의 존재가 아닌 미래 진행 중인 개념이어야만 한다는 설명으로 귀결된다. 실제로 원문에서는 ‘반성하여’라는 단어가 눈깔자에 해당한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군자가 되기 위한 첫 시작이자 기본으로 본다.      


그것은 배움의 단계와 일치하는데,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배워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언급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서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식의 개념에 한정되지 않고 이 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도덕적인 개념으로 확장된다. 무엇을 실천해야 제대로 덕을 쌓는 것이고 도를 향해 수양하는지를 알지 못하면서 자신이 잘못 들어섰다고 깨닫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성을 한다는 행위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 잘못을 그저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잘못되었고 어떻게 하면 그 실수를 또 저지르지 않을지에 대해 논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학습되고 성찰되었음을 의미한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더라도 외재적인 이유나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더 큰 거짓말을 하거나 더 큰 변명을 만들면서 면피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들을 많이 본다. 때로는 그 발버둥이 성공한 듯 보이며 형사적인 처벌을 피하거나 1심에서 유죄를 받고서도 2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오고나 하고 나서 형사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았으니 자신은 죄가 없는 사람이라며 큰소리치는 작자들을 적지 않게 보곤 한다.     


이 장에서는 그 형사적인 처벌을 면한 것만으로 하늘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아는 그 잘못에 대해 반성하지 못한다면 늘 근심하고 그 잘못이 언제고 다시 자신을 잡아먹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살아야만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를 던진다.     


법정에서 판사에게나 자기 자식이나 부모에게 부끄럽기 이전에, 자신이 무슨 짓을 어떤 마음에서 저질렀는지 아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힘든 일이다. 오히려 당당히 만천하에 고개를 쳐들고 자신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는 자가 있다면 그의 그 후안무치(厚顔無恥)에 침을 뱉는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런 언행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부끄러운 짓이기 때문이다.     


원문에서 말하는 가정은, 불가능한 것을 설정하여 그렇게 되기 위한 것을 노력하고 끊임없이 경주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지, 이미 완성된 군자의 형태라면 굳이 죽는 그날까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한 조심스럽고 겸허한 행보를 하라고 권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빨간당의 어린 당대표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던 시절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성접대를 받았다는 논란이 작년 연말 난장판 유튜버에 의해 시작되어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가도록 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고 있던 경찰이 이제야 첫 조사를 들어갔다는 어이없는 알력 다툼을 그대로 보여주며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다.     

뭐 신뢰도라고는 어디 찾아보기도 어려운 지저분한 삼류 폭로전으로 슈퍼챗을 받아 생활하던 전 국회의원이나 전 기자라는 이름의 유튜버들이 쏘아 올린 그 불장난 같은 이야기는 이제 대선을 지나고 지방선거를 지나, 단 한 번도 선거에 당선되어보지 못했지만 버젓이 젊은 이대남을 대표하는 듯 껍데기만 표방하던 당대표를 토사구팽 하는 외길 수순으로 치닫고 있다.     


진실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고, 당사자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모함일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실정에 카더라식의 소문만을 듣고서 그를 비난하는 것도 결코 군자를 목표로 하며 공부하는 자들이 취할 스텐스는 아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7억 약정서설이 나돌고 당대표의 비서 역할을 하던 자가 사건을 폭로한 자와 전화 통화하고 이야기를 나눈 녹취록이 나오면서 이제 어느 정도 객관적인 사실로 유추할 수 있는 정황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워낙 최첨단의 시대인지라 자동 통화 녹취는 기본인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대화 당사자가 자신이 대화한 내용에 대해 녹취하는 것은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 않더라도 법적인 증거로 사용되거나 불법이 아니라는 점은 허구한 날 거짓말로 말을 바꾸는 정치인들이나 공무원들에게는 드라큘라에게 있어 십자가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주장이 아닌 당시 당사자들의 대화는 그 사실 그대로를 증명하기 때문에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명확해지는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다. 만약 빨간당의 그 어린 당대표가 연말에 그 허접한 유튜버들의 흑색선전에 정말로 자신이 당당했다면 그 제보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급하게 자기 사람을 내려보낼 테니 만나보라고 할 이유가 없다. 이 장을 그런 지저분한 사건에 비유하는 것이 한참 욕되는 일인 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확하게 비유하자면, 자신이 반성하여 부끄러움이 없었다면 그런 자들의 헛소리를 그저 단칼에 잘라버리고 무시하고 그것을 받아주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한 일이 없는데 모함당하거나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결백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하되, 그 모함이나 거짓 누명을 만들어낸 자들과의 협상을 시도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거나 아예 배재하기 마련이다.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들이 협작과 모함을 만들어낸 의도는 명확한 것이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이 원하는 그 어떤 요구나 협상에도 응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백한 자들이 결코 모함하고 누명을 작당하는 자들과 어떤 경우에도 접촉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런데, 자신의 오른팔에 해당하는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고, 그 자가 전화한 지 몇 분 되지도 않아 그 야심한 시각에 새벽에 지방에 달려가 문 연 가게도 없어 호텔에 방을 잡아 은밀한 만남을 가지고, 기자를 포섭하여 기존의 유튜버들이 쏘아 올린 폭죽이 뻥카였다는 기사를 협조해달라고 하거나, 갑툭튀의 정도를 넘어 7억이나 되는 돈을 투자해준다고 확인서를 작성해주지 않나, 심지어 형사 관련 확인서를 제출해주자마자 그 투자에 대한 약속을 어겨버리고 시일을 끌고 말장난을 하는 것 등은 이미 삼류 드라마에서도 소재로 삼지 않는 막장 소재에 다름 아니다.     

그가 마치 대한민국의 이대남을 이끌거나 상징한다는 식의 주장은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서만 유효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비대위원장 잠시 해놓고 자신이 이대녀의 수장인 듯 정치 경력도 일천한 20대 여자아이가 파란당에서 설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우리나라에 젊은 정치인이라는 밑천이 이렇게 허접하고 허술한 것인지 이 장을 읽으며 새삼스레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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