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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05. 2022

불가항력이라며 스스로의 한계를 포장하지 마라.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하지 않으려는 핑계 아니던가?

司馬牛憂曰: “人皆有兄弟, 我獨亡.” 子夏曰: “商聞之矣: 死生有命, 富貴在天. 君子敬而無失, 與人恭而有禮, 四海之內, 皆兄弟也. 君子何患乎無兄弟也.”     
司馬牛가 걱정하면서 말하였다. “남들은 모두 兄弟가 있는데 나만 홀로 없구나.” 子夏가 말하였다. “나(商)는 들으니, ‘死와 生은 命이 있고, 富와 貴는 하늘에 달려 있다’ 하였다. 君子가 恭敬하고 잃음(간단함)이 없으며 남과 더붊에 공손하고 禮가 있으면 四海의 안이 다 형제이니, 군자가 어찌 형제가 없음을 걱정하겠는가.”     

이 장은, 사마우(司馬牛)가 등장하여 언급하는 연속된 세 장중에서 마지막 장에 해당한다. 이 장에서는 독특하게 공자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하가 등장하여 고뇌하는 사마우(司馬牛)를 위로하는 형식을 취한다.     


사마우의 형제는 대표적으로 앞서 언급했던 사마환퇴가 있는데, 실제 친형제는 그를 포함하여 네 명이나 되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송공(宋公)과 환퇴(桓魋)가 권력 투쟁하는 것을 몇 번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 사실관계의 기록들에 의하면, 사마우에게는 환퇴 외에도 상소(向巢)라는 형이 있고, 자기(子頎)와 자거(子車)라는 두 동생이 등장하므로 사마우의 형제는 적어도 5형제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환퇴가 송공과의 권력투쟁을 하다가 패한 나머지 위(衛)나라로 도망가버리고, 상소는 노(魯) 나라로 도망가고, 사마우는 제(齊) 나라로 도망갔다. 나중에 환퇴가 다시 제나라로 도망가자, 제나라에 있던 사마우는 형을 피하여 오(吳) 나라로 도망한 데서 볼 수 있듯 권력자의 자식들의 입장이어서였는지 형제관계가 돈독한 것은 고사하고 서로 죽이지 못해서 으르렁거렸던 막장을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군자를 언급했던 사마우의 질문과 스승의 대답에 이어 군자의 개념이 대화 속에서 등장한다. 사마우의 근심과 두려움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 바로 그 권력을 추구하며 형제관계조차 무시하고 더 살벌하게 혈육 간에 칼을 겨누는 현실이었음을 읽어낸 자하는 앞서 스승이 있던 것과 비슷하게 위로와 충고를 겸하여 말한다.     


먼저 주자는 사마우의 근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주석을 달아 배우는 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司馬牛(사마우)가 형제가 있었는데도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난을 일으켜 장차 죽을까 걱정해서이다.     

바로 자하(子夏)가 들은 말을 인용한다는 부분에 대해서 주자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붙였다.     


아마도 夫子(부자)에게서 들은 듯하다.     


아마도 그 들었다는 말이 ‘死生有命 富貴在天’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조금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기는 한데, 어쨌거나 ‘死와 生은 命이 있고, 富와 貴는 하늘에 달려 있다’라는 말은 인용한 것으로 자하 자신의 의견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하고 있다. 원문에서 자하가 자신의 의견이 아닌 누군가에게 듣거나 읽은 내용을 인용하는 부분이 어디까지에 대한 것인가에 대한 의견도 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이견이 있는데, 예컨대 전체를 공자가 한 말을 들었던 것이라고 여겨 이 장에서 공자의 의견이 나오지 않은 대신에 공자의 의견을 그대로 원용한 것이라고 분석한 학자들도 있긴 하다.     

참고로, 자하는 공자보다 44세나 어린 제자로 부자지간의 나이 차이보다 훨씬 더 많은 차이를 보이는 세대차이를 갖고 있었기에 이 장의 기록이 공자의 생전에 기록된 것이든 사후의 기록을 정리하면서 재편집된 것이든간에 스승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제자의 인용을 언급한 것만은 사실인 셈이다.     


그렇기에 주자는 이 인용된 문장에 대한 진위여부보다는 그 문장의 행간에 감춰진 의미를 풀이하는 것에 조금 더 비중을 싣고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命(명)은 태어나는 초기에 받은 것이니 지금에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하늘은 그렇게 만듦이 없는데도 저절로 되는 것이니 내가 기필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다만 순히 받아들일 뿐이다.     


아마도 뒤에 이어지는 ‘君子가 恭敬하고 잃음(간단함)이 없으며 남과 더붊에 공손하고 禮가 있으면 四海의 안이 다 형제이니, 군자가 어찌 형제가 없음을 걱정하겠는가.’라는 마지막 문장은 공자의 내공이 느껴질 만도 한 문장이기는 하다. 일단 한 번 읽는 것으로 쉽게 이해가 와닿지 않는 초심자들이 많을 것이 우려된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마지막 문장에서 군자라는 존재는 결코 그런 것으로 근심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말로, 앞서 공자의 군자 개념을 그대로 이어받아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자 역시 같은 우려를 했던 탓인지 이 마지막 문장에 대한 의미를 상세히 풀어주기 위한 주석의 내용이 짧지 않다.     


이미 天命(천명)을 편안히 여기고 또 마땅히 자신에게 있는 것을 닦아야 한다. 그러므로 또 말하기를 ‘만일 몸가짐을 敬(경)으로써 하고 간단하지 않으며, 사람을 대하기를 공손함으로써 하고 節文(절문, 예)이 있게 하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사랑하고 공경하기를 형제와 같이 한다.’고 한 것이다. 이는 子夏(자하)가 사마우의 근심을 풀어주고자 하여 이러한 부득이한 말을 한 것이니, 독자들은 말로써 본의를 해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주석에서 언급하고 있다시피 군자가 갖춰야 할 마음가짐과 태도를 ‘경(敬)’에서 찾는 것도 역시 주요한 핵심 키워드이다. 왜냐하면 이 장이 사마우가 질문하고 대화하는 연속된 구조의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안연편의 시작부터 쭉 이어온 개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인(仁)에서 시작해서 군자(君子)에 이르기까지 결국 그 개념들이 별개의 개념으로 나눠져 있거나 다른 것들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특하게 원문에서, ‘(군자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결국 사해 안의 모두가 내 형제’라는 표현에 대해 왜 그런 표현이 나왔는지에 대해 호씨(胡寅(호인))가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子夏(자하)의 ‘四海(사해)가 다 형제’라는 말은 다만 사마우의 마음을 너그럽게 하려고(달래려고) 한 것이니, 뜻은 원만하나 말은 막힌다. 오직 聖人(성인)은 이러한 병통이 없다. 또 자하는 이것을 알았으나 아들의 喪(상)에 곡하여 失明(실명)하였으니, 이는 사랑에 가리워서 이치에 어두웠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다.”     


이 주석은 자하의 설명방식이나 원용하는 방식이 스승의 것에서 나온 것이고 스승의 방식을 취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성인인 스승의 내공이 보여주는 그 경지의 가르침에는 미치지 못하였음을 매섭게 꼬집는다. 자하(子夏)가 성인이었던 스승 공자에게 못 미쳤던 근거를 제시하면서 자식을 먼저 잃은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슬픔의 충격으로 실명한 것을 들며, 결국 사랑에 가리워서 이치에 어두웠기 때문에 그 말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호씨가 이렇게까지 냉철한 분석을 보인 것은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저 타성에 젖어 이 장을 읽으며 그저 동문인 사마우를 위로하며 보인 자하(子夏)의 위로와 조언이 뭐가 그렇게 스승 공자와 비교되면서까지 지적을 받을 일인가 의아하게 받아들일 사람도 있을 듯하다.      


굳이 그렇게까지 격이 다르다고 판단할만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추정하건대, ‘하늘’을 언급하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과 논법에 익숙했던 선배 학자들에게는 가장 거슬리는 차이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논어>도 처음 공부하고 원문을 꼼꼼하게 읽지 않으며 그저 해석본으로만 읽는 이들의 눈에는 그 뜻이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일 수도 있다.      


예컨대, 이 장에서 자하가 자신의 의견도 아니고 인용했던 말에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려 있는 문제라던가 부하고 귀하게 되는 것은 하늘에 달려있다’는 식의 논리는 공자식 논법과는 정반대의 일반인들의 사고방식에 맞닿아있다.      


공자는 결코 하늘을 이야기하되,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믿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존재로서 경외시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그 어떤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 인지를 할지라도 그것이 절대적이기에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범위가 있다는 식으로 인정하고 넘어가거나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범위라는 식의 자조적인 언급이나 판단을 꺼려왔다.     

그에 반해, 이 장에서 자하가 원용했다고는 하지만 그 내용이 의미하는 바는 어떻게 보면 노골적인 숙명론에 다름 아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공자의 가르침을 수백수천 번을 익혀 그 세계관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선배 학자들의 입장에서 자하가 이 장에서 언급한 내용은 공자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다른 이야기라고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앞서 설명했던 인용 구절 전체가 공자의 의견이라고 주장했던 학자들의 수준이 선배 학자들의 눈높이에 비해 몇 단계 정도의 격이 떨어진다는 의심은 지울 길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장에서 자하가 원용했던 내용이 공자의 가르침과 거리가 있다고 보는 견해를 분석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자하의 설명을 통해 그간 공자가 보여왔던 운명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좀 더 예각화하여 음미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처럼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숙명론이나 운명론에 대한 부분을 논할 때 하늘을 경외시 하는 의식을 드러내곤 한다. 물론 그들이 단순히 미개한 종족들이라 무당을 찾고 법사를 찾아 하늘의 뜻을 물어가며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 지경의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사람의 노력과 수양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나 한계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공자는 하늘을 언급함에 있어,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역경이나 고난 등의 한계상황이 하늘의 운명에 의해 설정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거대한 낙관론의 속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지 그것에 종속되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태도나 언급을 보인 바가 어느 한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막연하게 공자가 주창한 유학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비판하거나 고리타분한 성리학으로 폄하할 때 범하는 오류이기도 한데, 현대인조차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불가항력적인 초자연적 하늘의 존재를 언급하는 이 시점에도 공자가 그런 부분에 굉장히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운명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논어>를 공부했다고 하는 이들조차도 간과하거나 소홀히 인식하는 경우가 많기에 이 장의 설명을 하면서 분명히 구분 지어 인식하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장에서 의미하는 형제, 즉 혈연에 대한 부분이 언급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덧붙여 설명한다. 대부분 하늘의 숙명론을 거부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때 이 장에서 사마우가 걱정했던 것처럼 자신이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닌, 이미 태어날 때부터 혈연으로 이어져 있는 형제이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점을 사례로 든 것도 그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앞서 군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미 공자가 강조한 부분과 대조적으로 읽히는 부분이 있어 이 장에서 자하가 언급한 것과 대척점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앞 장의 내용을 설명할 때 언급했던 것과 같이, 공자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면, 나머지는 운명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니 고민하지 마라.’가 아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면 그 어떤 걱정이나 고민도 있을 수 없다는 절대 전제를 깔고 있었다. 이것은 바꿔 말해, 숙명론의 일부로 인간이 하늘에게 거스를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설명을 넘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수양과 노력만으로도 자신이 근심하거나 걱정할만한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오는 가르침이다.     


다시 말해, 배운다고 말로만 떠드는 자들은 대개 그만한 자신의 노력과 수양을 극대치까지 쏟아붓지도 않은 채 하늘을 말하고, 외재적인 것들을 언급하며 어쩔 수 없는 부분을 근심하려 든다는 반어의 가르침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한국에 들어온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다시 해외에 잠시 나오는 일정으로 인해 장시간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어 오늘 아침 공부만 겨우 올리되, 오늘 <인생에 실패한 대가들의 이야기>와 밤 연재 소설은 불가피하게 하루 쉬어야 할 듯 합니다.

수요일 낮에 논어 공부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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