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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06. 2022

어떤 사람에게 사리에 밝다고 평할 수 있는가?

무엇을 어떻게 믿고 판단하는가를 모르는 이들에게.

子張問明, 子曰: “浸潤之讒,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明也已矣. 浸潤之讒,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遠也已矣.”     
子張이 밝음을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서서히 젖어드는 참소(모함)와 피부로 받는 하소연이 행해지지 않으면 밝다고 이를 만하다. 서서히 젖어드는 참소와 피부로 받는 하소연이 행해지지 않으면 멀다고 (가까움에 가려지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이 장에서는 명철함, 사리에 밝음에 대해 자장이 스승에게 묻고 그 대답을 듣는 장면이 등장한다. 원문에서는 그저 ‘명(明;밝음)’이라고 해석하였으나 그 의미는 앞서 제시한 ‘명철함’으로도 해석되고, ‘사리에 밝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공자의 대답이 아주 묘한 곳으로 포커스가 맞춰진다. 서서히 젖어드는 참소와 피부로 받는 하소연이 행해지는지 행해지지 않는지에 대한 여부를 가지고 그 판단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두 가지의 사례가 정확하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주자의 주석을 통해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浸潤(침윤)’은 물이 배어들고 적셔지는 것과 같아서 점점 스며들고 갑자기 하지 않는 것이다. ‘譖(참)’은 남의 행실을 훼방하는 것이다. ‘膚受(부수)’는 피부로 받는 바의 利害(이해)가 몸에 간절함을 이르니, 《周易(주역)》〈剝卦(박괘)〉에 이른바 ‘牀(상)을 깎아 살갗에 미침은 재앙에 매우 가깝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愬(소)’는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이다. 남을 비방하는 자가 점점 젖어들게 하고 갑작스럽게 하지 않으면 그 말을 듣는 자가 거기에 빠져 들어감을 깨닫지 못해서 믿음이 깊게 되고,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자가 급박하여 몸에 간절하게 하면 그 말을 듣는 자가 미처 상세함을 다하지 못하고 성내기를 갑자기 한다. 이 두 가지는 살피기 어려운 것인데 능히 살핀다면 그 마음이 밝아서 가까움에 가리우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 또한 반드시 子張(자장)의 결함을 인하여 말씀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번다하고 줄이지 않아서 丁寧(정녕, 간곡)한 뜻을 지극히 한 것이다.     


이 주석에서 설명하고 있는 두 가지 행위에 대한 것은 외재적인 요소 중에서도 ‘농간(弄奸)’이라고 불리는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억울하다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주장하고 떠들며 지속적으로 반복하게 되면 그것은 이른바 가스 라이팅이 될 수 있으며, 진정한 세뇌 작업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장에서는 그러한 행위에 전혀 영향받지 않은 자라면 명철한 사람이라 불릴 자격이 있으며, 사리분별력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한다고 공자는 설명한다.      


원문에서 공자가 기준으로 삼았던 두 가지 경우에 대해, 주석에서 심도 깊게 설명해준 것은 다름 아닌 공자의 이 기준이 명철한지에 대한 여부를 구분할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천 년 전의 고대 중국에서 공자가 사리분별력이 갖춰진 인물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기준을 당사자 혹은 다른 사람들의 거짓 참소나 주장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 점은 한국의 현대사회에서도 손쉽게 얻을 수 없는 경지인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바로 주석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두 가지 경우를 굉장히 자연스러운 시간적 흐름과 동시에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설명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물이 천천히 스며드는 것은 언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스며들었는가에 대해 쉽게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이 언제 어떻게 그런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는지를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 대해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만들어내고 그를 공격하거나 몹쓸 존재로 낙인찍으려는 의도성을 가진 경우, 그것을 조작하려는 자는 결코 단시간 내에 그것을 진실처럼 퍼트릴 수 없기에 장기간의 노력과 시간을 들여 자신의 거짓이 진실인 듯 조작하는데 공을 들이게 된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튕겨냈던 사람들도 그 말이 반복되고 여러 다른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하면 조금씩 흔들리게 된다. 다른 사람에 대해 질시하고 훼방하여 거짓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먹히지 않으면 그만이지.’라는 안일한 태도를 견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박하다. 자기보다 잘 나가는 상대를 어떻게든 씹고 싶다던지 그에게 누명을 씌우거나 공격하여 무력화시키지 않으면 자신의 이익에 손해가 간다던지 하는 직접적이면서도 상당한 파급력을 가진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자들의 언행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설명 그대로, 그들의 하소연은 간절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 말이 너무 형이상학적이라 허공에 떠다니는 구름을 잡는 듯 이해가 확 와닿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이해를 위한 공부와 현실에 적용하는 공부가 별개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인데, 공부를 실천에 포커스를 맞춰 실생활에서 자신의 공부를 행동화하려는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명확한 사례는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이 장의 내용은 신랄하기 그지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공자가 이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하며 강조한 것은 그들이 외재적인 조건이나 압력, 혹은 그 영향관계에서 자신의 판단에 영향을 받는가 받지 않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이것은 내부적으로 절대적인 기준을 삼을만한 것이 있는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즉, 이미 자신의 기준이 있는 사람은 사리를 분별하는 데 있어 주저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것이 인간관계에서는 분별이라면 더더욱 그때까지 자신이 배우고 익힌 사리분별능력을 가지고 그 사안에 대해서 이해하고 분석하는 당연한 전제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인간됨을 식별하는 능력’은 너무도 당연하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느 단계에 올라있는지 자신의 레벨을 바로 보여주는 기준 잣대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평생을 살면서 늘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 선택이 단순한 사물이다 다른 사람의 주장을 듣고서 그것에 홀라랑 넘어가는 따위가 아닌 자신만의 확실한 판단의 근거를 가지고 명확하게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씨(楊時(양시))는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갑자기 남을 훼방하여 말함과 이해가 몸에 간절하지 않은 하소연이 행해지지 않음은 굳이 밝은 자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능히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서서히 젖어드는 참소와 피부로 받는 하소연이 행해지지 않은 뒤에야 이것을 밝다고 이르고 또 멀다고 이르니, 멂은 밝음이 지극한 것이다. 《書經(서경)》〈商書 太甲(상서 태갑)〉에 이르기를 ‘멂을 봄이 밝음이다.’하였다.”     


이 주석은 지극히 현실적인 반대 상황을 설명한다. 즉, 공자가 왜 하필이면 시비를 가리고 인간관계에서 사람됨을 판단하는 데 있어 내부적인 절대 기준이 그렇게 중요한지를 원문의 반대 조건을 통해 역설한다.     


만약 객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누군가 혹은 특정 세력이 ‘갑자기’ 비난하고 공격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사실관계 이전에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마지막 주석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그런 상황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갑툭튀 반론에 대해 신뢰를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음해하는 것에도 상당한 노력과 공이 들여져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지극히 단순한 진리를 보여준다.     

굳이 원문에서 내가 ‘밝음’이라고만 열린 해석을 해놓고, 협의로, 포커스를 좁혀 사리분별에 대한 개념이라고 내가 강조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 그리고 배워서 익히든 경험을 통해 익히든 시비를 분별하기 위해 자신의 지식이나 판단력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은 유학에서 말하는 올바른 인간이 되기 위한 수양교육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영어단어 외우듯이 배울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능력을 점수 매기듯이 판단 내리는 것도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공자는 그것일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역설했을까? 게다가 원문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주석에서조차 절대적인 자신만의 기준이라는 것에 대해 언급하지도 설명하지도 않았다.     


시비(是非;옳고 그름)를 제대로 알기 위해 공부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 공자의 핵심 사상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모르고 있던 지식에 대해 공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질량화하고 수치화할 수 없는 개념인 인간관계에 있어서 사람됨을 분별하는 능력은 당연히 그 상위에 올려져야 할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참고로 공자 이외의 철학자들이 설명한 밝음에 대한 개념 정리를 살펴보면, 노자는 ‘그 향상됨을 아는 것을 명철함이라고 한다.(知常曰明)’이라는 입장을 견지한 바 있다. 이 말은 우주론적 함의를 내포하지만 핵심은 향상된 인간의 덕성을 식별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명철하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편, 순자는 ‘현자를 식별할 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知賢之謂明)’이라고 설명하여 현명한 사람들을 식별하여 쓸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명철함이라고 규정지으며 그 개념을 단순히 배우는 자이 갖춰야 할 기본 개념임을 넘어선 리더십의 관건으로 위정자들의 덕목으로 상향 조정하고 있다. 사람을 올바르게 판단하여 친구로서 사귀고, 또 조직 내에서 그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포함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생사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순자가 위정자의 덕목으로 확장하기는 했지만, 늘 강조하는 바와 같이 제왕학이라던가 위정자를 위한 학문이 별도로 마련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자의 가르침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일반 백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소시민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이니 위정자로서의 덕목 따위는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며 정치인들을 욕하고 비난할 때는 침을 튀겨가며 한강을 만드는 자들이 자신이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추악한 사욕의 민낯을 드러내고 그것을 지적받는 순간, 자신들은 소시민이고 평민이라는 코스프레를 하며 자신들과는 유리된 이야기인 양 변명하고 도망가기에 급급한 꼴을 생각보다 너무 자주 목도하곤 한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더 큰 먹이를 먹기 위해 입을 더 벌리느라 악어의 눈물도 흘리고 언제고 사악한 민낯을 드러내는 이들이 자신은 정치인도 아니고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뭐가 그렇게 문제냐고 눈을 껌벅거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사회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정치인들이나 대학교수, 의사, 판검사, 변호사들이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최소한의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법망만을 교묘히 피해 가며 자신들이 원하는 부와 명예 권력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꼴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회가 썩는다. 사회를 썩게 만드는 이들은 결코 한 사람이나 한 조직만이 아니다. 그들과 사욕의 목적과 방향을 함께 하려는 자들이 있고, 그 이익을 공유하는 것으로서 입을 함구하고 부정한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담합하고 동조하며 암묵적으로 동조하면서 완성된다. 그러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아닌 척하면서 더 넓은 범주에서 보면 사회의 부정을 완성시키는데 아주 큰 몫을 해낸 셈이다.     


그런데 이 장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그 결정적인 반대의 사례가 왜 수천 년 전인 당시에나 지금에나 크게 다르지 않게 적확한가 하는 이해가 이 원문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가장 주요한 실마리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모든 행위에는 목적이 있기 마련이고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건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 사건을 일으킨 사람의 행위 목적과 그 원인관계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사건을 푸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마련이다.     


왜 뜬금없이 한여름에 돌입하기도 전에 추리소설 같은 이야기를 하느냐고 의문을 던질 학도가 있을 수도 있겠다. 다시 원문으로 돌아가서 원문의 행간에 감춰진 의미를 잘 길어 올려보자.     

누가 왜 도대체 모함을 하는가? 그리고 모함을 받는 대상은 어떻게 선정되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 모함을 하여 그렇게까지 공들여 중상모략을 한 자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꾸미는가? 아울러 두 번째로 이어지는 피부에 닿는 하소연이라 함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소연이라 함은, 말하는 이가 당사자인 것과는 별개로 그 말을 전달하고자 하는 자와의 관계가 상당히 밀접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에게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하소연을 함으로써 가스 라이팅을 성사시키는 것은 실제적으로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깨진 보석 퍼즐을 맞추는 듯이 몇 가지를 산발적으로 던져주었다. 당신에게 이 모든 파편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어 온전한 밑그림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가?      

아름아름 서로 가깝다고 어울리는 자들끼리에서만 가능한 바로 그 부조리에 대해 공자는 이 장을 통해 죽비를 내려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당신을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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