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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07. 2022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도록 완성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정치의 지향점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에게.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曰: “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子貢이 政事를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양식을 풍족하게 하고 兵(군대와 병기)을 풍족하게 하면 백성들이 신의를 지킬 것이다.” 子貢이 묻기를, “반드시 부득이해서 버린다면 이 세 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하니,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兵을 버려야 한다.” 子貢이 묻기를 “반드시 부득이해서 버린다면 이 두 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하니,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양식을 버려야 하니,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다 죽음이 있지만 사람은 信(믿음 또는 신의)이 없으면 설 수 없다.”     

이 장은 자공이 ‘다스림의 요체’에 대해 질문을 하고 공자가 답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공자는 세 가지 항목을 제시하며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데, 자공이 그 세 가지의 중요도를 언급하듯 하나씩 차등을 두어 부득이하게 버리고 최종으로 남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소거하면서 중요도를 더 강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세 가지가 기본적이기는 하나, 그중에서도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어 성인 공자가 가장 중요시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배우는 자들이 깊이 있게 생각하고 논의할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설명방식이기도 하여 다른 장의 설명방식과 구별된다.     


주자는 이 세 가지 항목을 공자가 구체적으로 제시한 의도에 대해 순차적인 의미에 방점을 찍으며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창고가 충실하고 武備(무비, 국방)가 닦여진 뒤에 교화가 행해져서 백성들이 나(위정자)에게 신의를 지켜 離叛(이반) 하지 않음을 말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 부득이하게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면’이라는 자공의 가정 질문에 대해 공자는 순차적인 의미에서 창고의 양식이 풍족한 것을 먼저 제거할 것이 아닌 ‘兵(군사)’를 가장 먼저 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공자의 의도를 해설한다.     


양식이 풍족하고 나의 신의가 백성들에게 믿어지면 兵(병)이 없어도 지킴이 견고함을 말씀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기 위한 자공의 가정형 질문에 대해 공자는 가장 마지막에 강조했던 ‘信(믿음 또는 신의)’이 필수적인 요소임을 강조한다. 이채로운 점은 믿음을 언급하며 ‘누구나 다 죽음이 있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아 양식과 신의를 비교하며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왜 풍족한 창고의 곡식과 신의를 비교하며 ‘죽음’이라는 개념이 나왔는지에 대해 의아해할 초심자들을 위해 주자는 주석을 통해 공자의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은 양식이 없으면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죽음은 사람이 반드시 면할 수 없는 것이요, 信(신)이 없으면 비록 살더라도 스스로 설 수가 없으니, 죽음이 편안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차라리 죽을지언정 백성들에게 신을 잃지 않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또한 차라리 죽을지언정 나에게 신을 잃지 않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죽음이라는 개념은 앞서 군사력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즉,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죽고 사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국가가 백성들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제공해야만 하는 것은 백성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나라와의 침략전쟁을 지속하던 당대의 현실에서 보면 국가가 해줘야 할 가장 기본적인 백성들의 삶을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항목들이 먼저 앞에서 제시된 군사력을 통한 국민의 생존권 보호 및 유지인 것을 감안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죽는다는 개념을 통해 믿음을 가장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역시 우연히 아무 개념이나 준비되어있던 생각을 툭 던진 것이 아닌, 오랫동안 가르침을 통해 정립된 공자의 생각임을 알 수가 있다.

     

주석에서 보인 주자의 설명처럼 남아있는 두 개념은 대표적인 정신적인 부분과 물질적인 부분으로 나뉜다. 이 장에서 세 가지 항목으로 공자가 제시했던 것의 아주 큰 그림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군사력’이라고 하는 항목은 사실 기본적인 항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세 가지 항목에 넣었다는 것을 이쯤 되면 눈치를 채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군사력에 대한 것이 현실적이며 최고의 항목이라고 믿고 그것에만 매달리려 하는 당대 위정자들의 삐뚤어진 생각에 호된 일침을 가하기 위한 일종의 논리적 함정이었다는 것을 배우는 자라면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공자가 정작 비교하고자 했던 것은 남아있던 두 가지 개념이다. 이유는 하나이다. 전자인 곡식, 즉 민생고(民生苦)를 정치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위정자들이나 백성들 모두가 정치를 잘하는 것의 기본 중 기본이라고 여겼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천 년이 지난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위정자들의 최종 목표점이자 지향점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자는 거기서 논리를 비튼다. 잘 먹고 잘 산다고 해서 당장 먹고사는 것에 불만이 없어진다고 해서 사람이 사람일 수는 없다는 큰 가르침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 될 수 있도록 반드시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사실 이 장의 핵심 포커스, 되시겠다.

이렇듯 결코 만만한 내용이 아닌 이러한 문답이 가능한 수준의 대화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 정자(伊川(이천))는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배우는 자들에게 이 장의 높은 수준을 다시금 강조한다.     


“孔門(공문)의 제자가 묻기를 잘하여 곧바로 到底(도저, 끝까지 이름)함에 까지 이르렀으니, 이 장과 같은 것은 자공이 아니면 묻지 못했을 것이요, 聖人(성인)이 아니면 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장에서 너무도 기본적인 부분이면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역시 누구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는가 하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자의 대답은 늘 그 질문을 한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지기 때문이다. 결코 자신이 그 개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것은 누가 물어보면 그냥 내놓는 낮은 수준의 스승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공이 누구인가? 공자학당을 먹여 살린 살림꾼 아니던가?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정사(政事)는 경영이었고 또 다른 의미의 지극히 현실적인 국가의 운영이었다. 그런 현실성이 강한 전문경영인에 해당하는 자공에게 공자가 명쾌하게 최종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점으로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기 위한 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라는 정신적인 부분이라는 점에서 자공의 어떤 점이 부족했고, 왜 자공이 이 질문을 했으며 공자가 이 대답을 통해 자공이 어떤 깨달음을 얻었으면 바라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주자는 마지막으로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내 생각건대, 인지상정으로 말하자면 군비와 식량이 충분한 뒤 나에 대한 믿음이 백성에게 미더울 수 있다. 인간의 덕으로 말하면 믿음은 본디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므로 군비나 식량이 앞설 수 없다. 따라서 정치가는 몸소 백성에게 솔선하여 죽어도 믿음을 지켜야 하고, 위급하다고 해서 믿음을 저버리면 안 된다.     

공자가 세 가지 항목을 내밀면서 가장 주요하다고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죽고 사는 개념보다 더 앞서는 개념이라고 여긴 것은 바로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통해서 말했던 바로 그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일본식으로 번역되어 아직도 그 제대로 된 의미를 영문학 도중에서도 철학 공부를 좀 했다는 친구들만이 행간을 읽어낸다는 바로 그 대사의 의미와 환치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 대사는 일본어로 대강 번역된 것을 다시 한국어로 그대로 번역하여 옮기면서 사람들에게 그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 오역의 대명사로 꼽히는 햄릿의 독백이다. 동양고전을 공부하면서 셰익스피어의 영문학 강의까지 깊숙이 들어가면 아침부터 머리에 쥐가 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도 있으니 핵심만 정리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 원문을 아주 정확하게 행간의 의미를 넣어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옳다.     


“사람다운 삶을 택할 것인가 그렇지 못한 삶을 영위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일 뿐이다.”     

잘 먹고 잘 산다고 해서 다 사는 게 아니었다.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유지하고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해 햄릿은 고민하며 독백을 내뱉는다. 그래서 햄릿의 위 명대사는 이 장의 핵심과 환치될 수 있는 것이다.  


성인도 죽고, 인자(仁者)도 죽으며, 앞서 언급한 군자(君子) 역시 죽는다. 칼과 창에 맞아도 죽고, 식량이 없으면 굶어 죽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장에서 마지막에 방점을 두고자 했던 믿음은 도대체 또 어떤 근거에서 갑툭튀로 나와 인간다운 삶의 요체로 등장했단 말인가?     


다시 원문의 내용으로 돌아와 보자.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자공은 전문경영인 출신이었다. 그래서 국가경영의 현실적인 요체를 알기 위해 이 장에서 스승 공자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자공이 알고 싶은 것은 자신이 위정자이기 때문에 나라를 한번 제대로 경영해보겠다고 물은 것일까? 역사적 기록에 나와 있다시피 자공은 스승의 허락이 없이는 출정하지 않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다시 말해, 그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그것을 자신이 알고 있었음에도 더 배워야 한다는 마음자세로 스승의 곁을 지켰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이 장에서 자공이 던진 질문의 진위는 당대의 위정자들이 가진 문제점을 분석하는 자신의 생각을 비춰보기 위한 시험에 해당하는 질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이 장의 마지막에 공자가 강조하는 ‘백성들의 믿음이 없이는 설 수 없다’라는 말의 주체에는 국가 혹은 위정자를 숨기고 있음을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다.     


공자가 자공의 의미심장한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주는 것은 자공이 의도했던 바와 같이 다스림이라는 행위가 갖는 현실적인 무게감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는 배우는 자의 수준이 아닌 진정한 경영과 운영행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었던 현실주의자 자공에게 아주 정확한 눈높이 교육의 일환으로 제시된 답에 다름 아니다.     


이 장의 궁극적인 전제를 살펴보자면, 먹고사는 것도 중요하고, 다른 나라의 군사적 침략행위로 인해 개죽음을 당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것도 나라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아주 심오한 전제의 전제를 깔고 있는 답변임을 알 수 있다. 그저 형이상학적인 고담준론식의 말장난처럼, ‘백성이 없이는 나라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설명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와닿는 공자식 가르침이라는 것에 다시금 감탄을 짓게 만드는 내용이다.     

백성들은 고담준론식의 형이상학적인 논의 따위는 필요하지 않고 당장 자신들이 먹고살고 죽을 위기에 떨며 불안해하지 않을 것을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하고, 위정자들의 입장에서는 백성이 없이 자신들이 왕이네 군주네 하는 것 자체가 국가의 성립 구성요소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형세이니 백성들이 있어야 한다는 두 논리의 연결고리에 가장 중요한 요소를 ‘믿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전 공부에서 몇 번 중국 고대의 백성들이 선정(善政)을 베푸는 자신들의 군주를 칭송하며 ‘우리 군주가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던가 ‘우리 군주가 하는 일 모두가 결국 우리를 위한 것이다’라고 노래한 것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기본적인 공자 가르침의 근간이 된다.

수천 년이 지난 대한민국에 사는 당신은 당신이 뽑아준 국회의원이라는 작자들이, 혹은 대통령이라고 하는 자가 진정으로 당신을 위해 고생하고 노력하고 일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잘 먹고 잘살고 위에 군림하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 그러고 있다는 의구심도 아닌 확신이 있다면 그들에게 당신의 권리를 위임하고 권력을 준 것부터가 난센스이고 당신은 당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성인(成人)이기 때문에 이제 그들의 임기 내내 당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불이익과 불편함과 불쾌함을 모두 감내할 수밖에 없는, 큰 실수를 저질러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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