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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08. 2022

형식을 모두 없애버리면 무엇으로 내용을 구별할 것인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들은 언제나 극단을 말한다.

棘子成曰: “君子質而已矣, 何以文爲?” 子貢曰: “惜乎夫子之說君子也! 駟不及舌. 文猶質也, 質猶文也, 虎豹之鞹猶犬羊之鞹.”     
棘子成이 말하였다. “君子는 質일뿐이니, 文을 어디에 쓰겠는가.” 子貢이 말하였다. “애석하다! 夫子(棘子成)의 말씀이 군자 다우나 駟馬도 혀에서 나오는 말을 따라잡지 못한다.  文이 質과 같으며 質이 文과 같으니, 虎豹의 털 없는 가죽이 犬羊의 털 없는 가죽과 같은 것이다.”  

      

이 장에서는 다시 공자가 등장하지 않고 위(衛) 나라 대부인 극자성(棘子成)과 자공의 문답으로 문(文;형식)과 질(質;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극자성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군자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질(質;내용)만 우선시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는지를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棘子成(극자성)은 위나라 대부이니, 당시 사람들의 文(문)이 (質(질)을) 이김을 미워했으므로 이러한 말을 한 것이다.     


주자는 주석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각, 그러니까 너무 껍데기의 형식적인 것에 치중하는 생각에 반발하여 그랬다고 설명하고 말았지만, 지금까지 <논어>를 읽었다고 하는 학도들 역시 굳이 형식과 내용 중에서 어떤 것을 더 중시해야 하냐고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는다면 극자성과 마찬가지로 너무도 당연하게 내용이 중요하다고 대답할 확률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현대어에서도 강조되는 것은 포장이나 껍데기보다는 본질적인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들 이야기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문과 질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친 바 있다. 우리는 이미 앞서 ‘옹야(雍也) 편’의 16장에서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용어와 함께 이와 관련된 내용을 충분히 숙지한 바 있다.     


아마도 대부였던 극자성은 자신이 깨어있는 의식을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칭찬을 들을 것으로 기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자공(子貢)은 그의 군자다움에 대해서 칭찬으로 화답하지 않고 부족함이 있다며 조언으로 대신한다. 이 부분에 대해 자공이 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인지를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子成(자성)의 말은 바로 군자다운 뜻이나 말이 혀에서 나오면 駟馬(사마)도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니, 또 그 失言(실언)함을 애석히 여긴 것이다.     

여기서 ‘사마(駟馬)’란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말한다. ‘사불급설(駟不及舌)’은 사마가 혀를 쫓아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한번 입 밖에 낸 말은 쫓아가 붙들지 못한다는 고사성어로서, 말[言]을 조심하라는 비유로 사용한 것이다. 주자의 주석처럼 좋은 의도인 듯 하지만, 그 말이 실언에 가까운 실수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자공이 다른 이에게 자신이 배운 내용을 어떻게 표현하고 설명하는가 하는 부분이다. 공자의 가르침이나 비유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쉬울 수는 있겠지만 공자의 방식으로 공부했던 제자라면 스승의 눈높이 교육의 방식 역시 그대로 배웠을 터, 이제 자공이 대부인 극자성에게 어떤 비유를 통해 문과 질이 결코 대척되는 개념이 아니고 어느 하나만을 주장해서는 안된다고 일침을 가하는지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자공의 설명에서 핵심 눈깔자는 바로 ‘鞹(곽)’이라는 용어이다. 이것은 동물 가죽의 털을 모두 뽑아내고 이른바 무두질을 하여 그저 동물의 가죽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그것이 어떤 동물의 가죽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두들겨 편 상태를 말하는 용어이다. 만약 싸구려 가죽을 그저 가죽이라고 우길 것이라면 몰라도 고급 가죽으로 제품을 만드는 것에 있어 심한 무두질을 해버리게 되면 그 가죽이 가진 특징을 알아볼 수도 없는 그저 똑같은 가죽 덩어리로만 전락하고 만다는 설명에 다름 아니다.     


자공은 이 설명을 통해 文과 質이 서로 다른 개념으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그에게 설명한다. 이 설명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로 자공의 의도를 분석해준다.    


‘鞹(곽)’은 가죽에 털을 제거한 것이다. 文(문)과 質(질)은 동등하여 서로 없을 수 없으니, 만일 반드시 문을 모두 버리고 홀로 질만 보존한다면 군자와 소인을 분별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棘子成(극자성)은 당시의 폐단을 바로잡음에 진실로 지나침에 잘못되었고, 子貢(자공)은 子城(자성)의 폐단을 바로잡음에 또 본말과 경중의 차이가 없었으니, 서로 잘못한 것이다.     

극자성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자공이 끄집어낸 비유는 다소 직접적이고 가벼워 보이는 듯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그저 형식적인 꾸밈과 껍데기에만 치중한다며 극단적인 의견을 개진했던 극자성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다시 말해, 다분히 의도적인 비유로 선택한 설명방식이라는 것이다.     


이 장의 대화는 가볍게 설명하자면, 문과 질이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개념이기에 결코 분리될 수도, 또 분리해서도 안된다는 조화의 개념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장의 핵심은 굉장히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견지하고 있다.     


지금부터 그 내용에 대해서 조금 깊이 들어가 보기로 하자.

이 장의 설명을 시작하면서 말했지만, 현대어로 전성된 의미만 보더라도 사람들은 형식과 내용에 대한 것을 비교할 때, 본질에 해당하는 내용이 더 중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장에서 극자성이 분개하고 있는 것과 같이 당시 사람들이나 현대 사람들 모두가 그 사실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이는 것에 굉장히 치중한다.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가 중요하고, 어느 아파트에 사는지가 중요하며 어떤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지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풍토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인식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이 알고 있는 이상과 그들이 행하는 현실이 괴리되고 있는 틈을 발견하게 된다.


매번 <논어> 공부를 하며 지적했던 배우고 익힌 진리와 자신이 행하는 현실이 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본능에 의한 것이든 사회적으로 익힌 것이든 어쨌거나 그들은 자신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핑계로 그것을 현실이라고 말하고 현실은 공부와 다르다고 구분 짓는다.     


그런데 이 장의 가벼워 보이는 설명은 바로 그들의 그 안일한 생각에 일침을 꽂는다. 그래서 극자성이라는 과격하고 극단적인 발언을 하는 이가 등장한 것이기도 한데, 그는 사람들의 그 잘못된 생각을 혁파하기 위해 형식이나 껍데기 따위는 모두 필요 없는 것이라며 폄하하고 무시한다. 자공의 설명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지만, 공자의 본래 설명(옹야편의 문질빈빈(文質彬彬))도 그러하듯 이 부분은 단순히 두 개념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공이 그러하였듯 나도 이 장에 어울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이 부분을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예가 가능하겠다.     


<논어 읽기>를 통해 사람들이 진정으로 시비를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니게 되고 세상을 바로 읽는 이들이 많아져, 이른바 모두가 군자가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군자가 된다면 세상은 그릇됨이 하나도 없이 바르게만 이루어져 나갈 수 있을까?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은 군자만 있다면 소인을 구분할 수 없고, 소인이 없어진다면 군자가 군자 됨을 구별 지어 파악할 수 없다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럴 수 없다는 극단적인 예를 공자는 이미 여러 가지 방식의 가르침을 통해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거칠긴 하지만 자공의 가죽 비유도 그것의 일환이다. 어느 한 개념이 사라져 버리게 되면 상대적인 개념 자체를 찾을 수 없고, 상대적인 개념을 찾을 수 없다면 본래의 개념 자체가 그 의미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이치에 대해 이 장에서는 다시금 설명해주고 있다.     

이것은 공자가 늘 강조했던 수양 방식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아무리 내실을 갖추고 내용이 튼실하다고 하여도 그것을 표현하고 설명하는 형식을 갖추지 못하게 되면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상대에게 그 진심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다. 내실을 갖추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여겼던 극자성의 설명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대로 내실만 남겨둬야 한다는 극단적인 방식은 결국 그 내실을 알아봐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그 내실의 진위여부조차 확인할 길이 없어지는 것이다.      


비교와 대조는 설명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이해를 돕는데 효과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조적인 개념이 있기 때문에 상대되는 개념을 바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사람의 본능적인 사유 구조에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일깨워주는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논어에서 군자를 언급하며 설명할 때, 군자의 개념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소인의 개념을 취하는 것도 큰 범주에서 보면 이와 같은 구조에서 출발한 것이다.   


군자가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설명할 때, 그러지 말아야 할 소인의 방식을 설명하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훌륭한 사람의 행동방식을 따르라고 설명하는 대신, 법제적으로 해서는 안될 행동의 최저치를 범죄라고 규정하여 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글에 아무리 훌륭한 사유와 사상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형식을 갖추고 읽는 이들이 쉽고 자세히 이해할 수 있도록 쓰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기도 전에 그저 한 개인의 머릿속에서 사장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아무리 그가 자신의 머릿속에 담겨 있는 사유와 사상이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형식에 담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라는 설명이 바로 공자의 설명방식이다.     

더 극단적인 비유는 그릇과 음식에 빗댄 설명이다. 맛있는 식재료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맛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더욱 맛깔스럽게 요리하고 예쁜 그릇에 플레이팅을 하는 것은 식자재 본연이 가지고 있는 맛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맛을 선사해준다. 어쩌면 이해하는 수준에 따라 요리에 대한 비유는 극단적이거나 단순한 비유를 뛰어넘는 고도의 비유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정말로 좋은 식재료가 있을 경우, 최고의 요리사라면 내실에 해당하는 식재료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부터 그에 어울리는 최선의 조리방식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요리로 식재료가 가지고 있는 그 이상의 맛을 선사하겠지만, 요리를 전혀 못하는 사람이거나 입으로만 요리를 하는 삼류 요리사의 경우에는 오히려 식재료 본연이 가지고 있는 맛을 살리기는커녕 그보다 못한 맛을 만들어내서 그냥 식재료를 먹느니만 못한 상태를 만들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리에 대한 비유만 하더라도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요리를 배워서 잘한다고 떠벌이지만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아예 요리를 배운 적도 없어 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결국 질(質)이라고 하는 ‘내실’이 식재료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이 갖춘 자질과 노력으로 만들어낸 그 만의 비법이고 테크닉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형식이라고 불리는 문(文)이 반드시 겉치장이나 외면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한정 짓는 것도 아니다. 일전에 설명했던 것처럼 예복은 예를 갖춘다고 하지만 실제로 예복을 입으면 불편하기 짝이 없고, 예법을 갖추는 것은 복잡하고 까다롭기 그지없다. 그런데 그 내면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그 형식에 틀리지 않으려고 잔뜩 긴장하게 만들려는 목적도 예법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가장 편한 츄리닝이나 잠옷을 입은 상태에서 그런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에 부합하지 않음을 예법을 정한 이들은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문(文)과 질(質)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특히 적당히 공자의 가르침을 읽었다고 착각하고 그 둘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식의 피상적인 이해는 그 개념을 온전히 파악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한꺼번에 이 모든 개념과 가르침을 소화시키려는 욕심은 ‘엽등(躐等)’이라 하여 공자가 배우는 이들에게 가장 참람된 행동이라 지적한 것이다. 당신이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한꺼번에 습득되어 당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최소한 공자의 가르침중에는 없다. 천천히 하나씩 꼭꼭 씹어 체하지 않으며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고 난 뒤에 정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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