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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08. 2022

장애를 극복한 위인으로 늘 언급되곤 하지만 - 2

그녀가 그렇게 되기까지 어느 하나 쉬운 하루는 없었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269


물론 정당한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헬렌을 이용하려 했든, 또는 비판한 사람은 무수히 많았지만, 정작 평생 가운데 대부분의 시간을 바쳐 반세기 동안 헬렌을 떠맡은 사람은 설리번 단 한 사람뿐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설리번의 말년에 그 역할을 인계받은 폴리 톰슨 역시 무려 46년 동안 헬렌을 위해 일했다는 사실도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헬렌 켈러와 함께 기억되어야 할 사람으로 반드시 언급되어야만 한다.

설리번의 젊은 시절

장애를 가진 아이를 처음 만나 그녀가 성인이 되어 대학을 가고 생활을 하며 어엿한 사회운동가로 성장하게 되기까지 곁에서 그녀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생활이 결코 쉬울 리 없었다. 설리번은 가뜩이나 약한 시력으로 헬렌에게 책을 읽어주고, 헬렌의 손바닥에 글씨를 써주느라 늘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소진하여 기진맥진한 상태로 쓰러져 자는 하루하루를 반복해야만 했다.


이후 설리번의 역할을 이어받았던 폴리 역시 수십 년 동안 헬렌의 손바닥에 글씨를 써주다 보니, 나중에는 오른손만 비정상적으로 크고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였던 것을 보면 헬렌을 보좌하고 도와주는 일이 얼마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겨운 일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케네디와의 만남

헬렌은 사실상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신세였고,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불운은 그치지 않았다. 1936년 10월 20일, 설리번은 70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헬렌은 이 고마운 스승의 손을 마지막까지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946년에는 살던 집에 불이 나서 그때까지 모은 자료며 원고 등이 모두 소실되는 사고를 겪는다. 헬렌과 애니의 일생에 관한 자료 가운데 빈 구석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당시의 화재사건 때문이다.

     

1960년, 이번에는 설리번의 뒤를 이어 헬렌의 그림자 역할을 해주었던 고마운 존재, 폴리 톰슨이 66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이후 헬렌은 당뇨병으로 인해 7년 넘게 휠체어와 침대 신세를 지다가, 1968년 87세의 나이에 사망한다.     

헬렌 켈러가 정확하게 어떤 사회운동을 했는지, 어떤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했는지에 대해 위인전에서는 상세히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녀에게 헌신적인 가정교사 설리번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만을 피상적으로 기억한다.      

작가 마크 트웨인과 함께

헬렌 켈러는 1909년에 미국 사회당에 가입했다. 그녀는 곧 사회주의 운동에서 지도적인 인물이 됐고 여러 좌파 신문에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했다. 그녀는 여성의 평등을 위해 투쟁했고 인종 차별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무적인 저작과 연설은 노동자 투쟁을 지지하는 것들이었다. 매번 그녀는 당시 노동자들이 처한 험악한 조건들을 폭로했다. 옷에 달린 레이스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파업 집회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은 연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두들겼다.      


“레이스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눈이 침침해지면, 우리가 입는 옷의 하얀 레이스도 침침해진다.”     


헬렌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이 학살에 준하는 행위라며 목소리를 높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당시 전쟁을 반대하는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여기 미국에서 흑인들이 학살되고 그들의 집이 불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의 지배자들은 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노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그녀의 과격한 주장에 대해, 그저 장애를 극복한 극적인 캐릭터로만 그녀를 극찬했던 언론은 적대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브루클린 이글〉에 실린 한 사설을 보면 언론이 이제 그녀를 얼마나 물어뜯으려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녀의 잘못은 성장 과정상의 분명한 한계에서 비롯한 것들이다.”     


그러나 헬렌은 그 정도 루머와 압박에는 결코 굴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의 부조리한 방식에 맞서 싸웠다. 그녀는 자기의 장애에 대한 그 신문의 태도를 통렬하게 공격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를 열정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내가 사회봉사나 맹인들을 위한 활동에 전념하는 한, 신문들은 나를 일컬어 ‘시각장애인들의 성녀’ 라거나 ‘기적의 여인’이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우리 주변의 빈곤과 산업 체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하면 언론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장애인을 도와주는 것은 갸륵한 일이지만 모든 인간이 안락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허황한 꿈이며 그 실현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절에 헬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사건들 가운데 하나는 1912년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에서 있었던 섬유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해 한 의사는 로렌스 섬유 공장의 끔찍한 노동 조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성인 남녀 1백 명당 36명이 25살의 나이에 죽었다.”


노동자들은 그나마 형편없는 임금마저 깎이자 파업을 포기하고 세계 산업 노동자연맹(IWW)에 접근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와블 리스(Wobblies)라고 불리게 된 세계 산업 노동자연맹은 1905년에 일단의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급진적 노조 활동가들이 결성한 조직이었다. 그 목표는 미국의 노동자들을 조직해 거대 단일 노조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IWW는 대중 집회와 행진 시위들을 조직했다. 파업을 벌이고 있던 5만 명이 참여했고 전국에서 지지와 성원이 쇄도했다.     

헬렌은 북부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돈을 모금했다. 와블 리스는 감옥에 갇히고 구사대가 피켓 라인을 공격해 사람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파업 노동자들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섬유회사 사장들은 굴복했고 노동자들은 커다란 승리를 거뒀다.     


1913년에 미국 사회당은 IWW의 지도자 빌 헤이우드를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집행위원회에서 쫓아냈다. 헬렌은 빌의 복귀를 촉구하는 캠페인을 이끌었다. 1915년에 IWW의 주요 조직가 조 힐이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 헬렌은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캠페인에 참여했다. 대규모 국제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조 힐은 총살 처형됐다.     


처형되기 불과 며칠 전에 조는 “초상 치르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힘을 쏟으시오.” 하고 의견을 전했다. IWW의 투쟁 정신과 노동 대중에 헌신하는 모습은 헬렌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녀는 1916년에 IWW에 가입했음을 선언하는 글을 〈뉴욕 타임스〉에 기고함으로써 미국의 기성 사회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나는 사회당이 너무 미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IWW에 가입했다. 사회당은 정치적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진정한 과제는 경제적 기초 위에서 모든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고 조직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     


<뉴욕 타임스>는 헬렌에게 교육과 혁명, 둘 중 어느 것에 전념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1900년 동안 교육에 힘을 써 왔지만 실패했다. 혁명을 해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낡은 질서를 쓸어버렸다. 잠시 몇 년 동안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 사회를 향해 나아갔다. 헬렌은 러시아 혁명을 지지했다. 그녀의 사무실에는 낫과 망치가 그려진 적기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러시아 혁명을 옹호하는 수많은 글을 썼고,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경제 봉쇄 중단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이끌기도 했다. 그 경제 봉쇄는 갓 태어난 노동자 국가를 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1929년에 헬렌은 ‘레닌의 정신’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IWW의 붕괴와 스탈린에 의한 러시아 혁명의 파괴는 헬렌에게 악영향을 끼쳤다. 헬렌은 점차 정치에서 물러나 시각 장애인들과 청각 장애인들을 도와주는 일에 집중했다.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미국 정부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했다. 자기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수백 명이 감옥에 갇혔다. 투옥된 사람 가운데는 IWW의 옛 멤버이자 미국 공산당의 지도자였던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도 있었다.     


플린이 수감돼 있던 3년 동안 헬렌은 건강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규칙적으로 면회를 가고 편지도 써 보냈다. 그녀는 플린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했다. 엄혹했던 그 시절에 이렇게 공산주의자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용감하기 그지없는 행위였다.     


1919년에 클리블랜드의 기사를 인용하자면, 헬렌 켈러의 삶은 누구에게나 영감을 주었다. 당시 헬렌은 파업 중인 인쇄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연설할 예정이었다. 그 기자는 그녀를 ‘빨갱이’, ‘말썽꾼’으로 묘사하는 짧은 기사를 쓸 작정이었다. 그러나 헬렌의 연설에 오히려 감명을 받은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헬렌 켈러는 귀와 눈이 먼데다 ‘말도 못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는데도 억압을 보고 들리지 않는데도 분노한 인류의 외침을 들으며 연설할 때는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장애를 극복하려는 헬렌 켈러의 투쟁은 수많은 대중이 그녀의 삶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전 세계 학교에서는 그녀의 이야기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헬렌 켈러가 어떤 식으로 사회운동을 실천해나갔는지 대해서는 그 어떤 책에서도 알려주지 않는다.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미국 언론 매체들이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기 때문이다.    


전기작가 도로시 허먼의 지적대로, 설리번이나 폴 리가 없었다 하더라도 헬렌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헬렌 혼자서는 결코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의 삶에 개입하고 누가 어떤 방식을 가르쳐주었는가에 따라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해 헬렌 켈러의 삶은 아주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헬렌의 삶을 이야기할 때에 설리번이나 폴리 같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함께 언급되고 가치가 평가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당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헬렌 켈러라는 위인에 대해 ‘장애를 극복한 위대한 인물’의 생애라고만 기억하지만, 정작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헬렌이라는 사람이 온전한 삶을 80년이 넘도록 완수하고 갈 수 있었던 것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조력자의 노력이 함께 하며 만들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피가 섞인 가족보다 더 진한 우정으로 새롭게 관계를 맺고 살아온 결과물이다. 어쩌면 설리번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장애인을 이용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헬렌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던 것도,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 아이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이자 헬렌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검증받고 완성된다라는 강한 확신과 자존감이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결과적으로 보면, 설리번은 자신이 있기에 헬렌 켈러가 있다는 찬사나 공치사를 받기보다는 자신이 없어도 온전한 한 사람의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그런 바람을 담고 있었다는 그녀의 진심을 읽을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말년에 이르러 한 친구가 설리번에게 칭찬의 뜻으로 이렇게 추켜세우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당신이 없으면 헬렌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자 설리번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내가 헛되이 산 거로군요.”


당신에게도 가족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인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조력자가 있을 것이다. 부모님, 선생님, 친구, 형제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당신과 인연을 맺고 당신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현재의 당신을 있게 만들어준 인연이 없을 수 없다.     


당신이 힘들고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거나 어떤 것에도 도전할 수 없다고 좌절해 있을 때 당신에게 힘이 되어주는 존재는 평생을 살며 여러 번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리 쉽게 접할 수 있는 인연도 아니다. 인연을 소중히 한다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고 아끼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그의 진심 어린 충고와 조언에 대해 당신의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당신의 단점이나 당신이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할 때 쓴소리를 해주는 인연만큼 당신에게 소중한 존재는 없다. 누구나 당신이 잘 나갈 때는 곁에 붙어있고자 한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지 못할 때 당신에게 무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닌 당신이 스스로 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그 인연의 진심을 당신은 귀 기울여야만 하고 더 나은 인생으로 그것에 보답해야만 한다.     


결코 혼자서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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