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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11. 2022

천재라는 부담을 평생 안고 이혼에 슬럼프에 빠져도 –1

골프황제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역사를 써나가다.

243번째 대가의 이야기.     


1975년,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얼 우즈와 쿨티다 우즈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고, 두 명의 이복형과 한 명의 이복누나가 있다. 아버지 얼 우즈(1947 ~ 2006)는 야구 선수 출신의 직업 군인으로 골프는 한 자릿수 핸디캡을 가진 아마추어 실력자였다.     


그는 물건을 다룰 줄 알게 되면서 자연스레 아동용 골프채를 휘두르는 등 탁월한 골프 감각을 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본인이 재적 중인 Los Alamitos의 Joint Forces Traning Base 근처 군인 골프장을 통해 어린 아들을 대동하며 그린 및 그린 주변의 숏 게임을 시키며 골프에 익숙하게 하였다.     


만 3세가 되기 전, 그는 아버지를 따라 ‘천재 골프 소년’이라는 특집으로 <The Mike Douglas Show>라는 TV 쇼 프로에 나와 본인의 샷도 선보이고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코미디언인 ‘밥 호프’를 상대로 퍼팅 대결을 보이며 골프 천재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골프 연습을 하는 부자의 모습

   

어렸을 때부터 발군의 재능을 보인 그는 4살부터 레슨 프로인 Rudy Duran의 지도를 받기 시작하며 본격적인 골프 선수로의 길을 걸었다. 5살 때는 ABC 방송이 진행하는 <놀라운 이야기(That`s Incredible)>에도 ‘골프 신동’으로 소개되었다. 7살이 되기 전에 이미 Under Age 10 섹션에서 우승하는 등 천재의 유명세를 실력으로 증명해 보인 그는 8살이 되자 80타를 치는 실력을 완성한다.    

  

11살이 되자 핸디캡 한 자리 수의 아버지가 최선을 다해 플레이를 하며 상대해야 겨우 이길 정도로 어지간한 아마추어 고수의 레벨로 올라선 그는, 12살이 되자 70대 타수마저 돌파해버리는 놀라운 실력 향상을 보여주게 된다. 이 시점부터는 ‘존 안젤모’를 레슨 프로로 영입하며 본격적으로 골프의 기본과 기술적인 측면을 연마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골프 선수이며, 특정 계층에게 한정되어 있던 골프의 인기를 전 세대, 글로벌로 파급시킨 골프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일컬어지는 우리에게는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로 알려진 본명, 엘드릭 톤트 우즈(Eldrick Tont Woods)의 이야기이다.     

역대 PGA 투어 우승 공동 1위로 82승, 메이저 대회 우승 역대 2위인 15승의 대기록을 가지고 있는 최고의 선수이며, 정말 많은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랭킹 1위 기록을 가장 많이 유지했던 선수이다. 모든 스포츠 선수를 망라해도 현역 선수 중에서는 가장 많은 수입을 기록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타이거는 13살의 나이에 전국 규모의 토너먼트에 첫 출장하였는데 거기서 아직 무명이던 9살 많았던 존 댈리와 같은 조에서 플레이하게 되었다. 최종 1타 차로 패하고 말았으나 4홀이 남은 시점에서는 2타 차로 앞설 정도로 ‘천재 소년’ 다운 경기력을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인상 깊은 플레이를 남겼다.     


타이거는 10대 중반, LA에 있는 모 클럽에서 존경에 마지않았던 레전드 골퍼 잭 니클라우스를 만나게 된다. 잭이 클럽 회원을 위한 골프 클리닉을 개최하면서 타이거를 초청했는데 잭을 비롯한 클럽 회원들은 당시 보여 준 타이거의 스윙과 잠재력에 감탄하였다. 이 시점부터 아버지 얼 우즈는 타이거가 뛰어넘을 대상으로 잭 니클라우스로 설정하며 그를 넘어서는 레전드 프로 골퍼가 되기 위한 플랜을 짜고 그에 맞춰 훈련하기 시작하는 멘털 트레이닝도 시작하게 된다.     


애너하임에 위치한 웨스턴 고등학교에 입학한 타이거는, 1991년 15살의 나이로 U.S. 주니어 아마추어 챔피언이 되며 3연패의 서막을 알렸다. 가장 어린 나이의 주니어 챔피언으로써의 이 기록은 20년이 지난 2010년이 되어서야 깨졌을 정도로 당시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꽤 놀라운 성과였다.      

92년도에 동 대회의 타이틀을 챔피언 방어한 타이거 우즈는 생애 첫 PGA 투어에 초청을 받아 참가하게 된다. ‘닛산 로스앤젤레스 오픈’이었는데 아무래도 프로의 무대에서 활약하기엔 약간 부족했었는지 컷 오프의 아쉬움을 남기며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력 골프 매체인 골프 다이제스트 – 골프 월드 – 골프 위크 등에서 모두 ‘올해의 아마추어 선수’로 선정이 되며 골프계의 높은 기대를 받은 타이거는 이듬해에도 변함없는 활약으로 U.S. 주니어 아마추어 3연패를 달성하였다.     


1993년부터는 타이거 우즈는 자신의 초기 스윙을 다듬어 준 부치 하먼에게 레슨을 받기 시작한다. 스윙에 완성도를 더하기 시작한 타이거는, 고교 마지막 해인 1994년 처음 출전한 U.S. 아마추어 대회에서도 챔피언에 등극하며 역대 최연소 챔피언 등극과 동시에 역시 동 부문의 3연패 서막을 알렸다. 이와 같은 활약으로 타이거는 아이젠하워 트로피 월드 아마추어 골프팀 챔피언십과 1995년 워커컵의 미국팀 멤버로 선정이 되었다. 결과는 아이젠하워에서는 승리, 워커컵에서는 패배했다.     


고교 슈퍼스타의 대학 진학도 남달랐다. 많은 전통적 대학 골프 강호가 타이거에게 러브콜을 보냈으나 그의 선택은 스탠퍼드 대학교였다. 골프 장학금으로 입학한 타이거는 경제학 전공을 택하였고 중년이 되어서도 절친한 사이로 남은 노타 비게이 3세와도 스탠퍼드에서 인연을 맺게 된다.     

타이거 우즈, 절친 노타 비게이와의 한 때


1995년에는 US 아마추어 챔피언십 2연패를 달성하였고, 생애 처음 4대 메이저 중 하나이자 시즌 첫 메이저인 Masters Tournament에 초대를 받게 된다. 2명 만이 초대받은 아마추어 골퍼 중 유일하게 컷을 통과한 타이거는 첫 진출에 41위를 차지하며 ‘아마추어 참가자 중 컷을 통과한 최고 순위자’에게 수여하는 ‘실버 컵’을 수상했다. 1996년 20세가 된 타이거 우즈는 U.S. 아마추어 챔피언십 3연패를 달성하며 더 이상 아마추어 선수로 머물 수 없다는 현실을 자타가 공인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NCAA Individual 골프 챔피언십에서도 우승한 타이거는, 그 해 7월에 열린 메이저 대회 The Open Championship에 출전하여 3 언더의 성적으로 ‘실버 메달’을 수상했다.  ‘천하무적’의 아마추어 골퍼로 명성이 자자하여 이제 더 이상 아마추어로 남아 있기가 민망해질 정도의 수준에 오른 타이거는, 프로 입문 전임에도 불구하고 프로 선수들 못지않은 관심을 받았고 많은 스폰서들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특히 나이키의 공동 설립자이자 CEO인 필립 나이트는 그에 대한 강한 영입 의지를 보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청년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골프를 그만두게 하고 의료 대학원으로 보내도록 해야지.”     


결국 나이키의 열성적인 구애로 타이거는 4, 000만달러(한화 약 430억원)라는 전대미문의 금액으로 5년 전속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물론 이 엄청난 금액은 앞으로 타이거가 만들어 나갈 성공의 예언이자 나이키가 보여준 확신의 구체적인 규모라고 볼 수 있다. NBA의 슈퍼스타 마이클 조던의 화려한 선수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나이키는 차세대 대안으로 농구장이 아닌 필드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하였다고 확신한 것이다.     


1996년 8월 말, 나이키와의 계약을 마친 타이거는 스폰서의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고 “반갑다, 세상아(Hello World)”라는 인사말과 함께 프로 무대에 공식적으로 데뷔함을 만방에 알렸다.     

물론 “세계 1위인 그랙 노먼도 받지 못하는 엄청난 돈을, 아직 투어 카드도 받지 못한 애송이가 받아 내다니 기가 찰뿐이다”라는 선배 프로 골퍼들의 냉소적인 반응이 뒤따랐고, “빠른 시일 내에 우승할 것”이라던가, “우승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라는 타이거의 데뷔 일성은 아직 프로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풋내기의 허풍처럼 느껴졌다.    


영국의 닉 팔도가 호주의 그렉 노먼을 상대로 6타 차 역전승을 거둔 1996년의 마스터즈는 그야말로 후세에 길이 전해질 경기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른바 ‘그렉 노먼의 몰락(Norman's Great Collapse)’으로 더 유명해진 이 경기는, 정신적인 압박이 인간을 어디까지 무너뜨릴 수 있을지 보여 준 대표적인 골프 경기로도 불리지만, 동시에 한 시대를 풍미한 불세출의 영웅들의 퇴장이 임박했음을 예측하게 만들어준 무대이기도 했다.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나이였던, ‘미국 국적이 아닌’ 두 선수는 80년대부터 자웅을 겨루며 세계 1위를 나눠 다투며 성장해온 선수로, 수많은 명경기와 좋은 경기력을 보여준 그야말로 당대의 레전드였다. 반면에, 세계 골프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미국 시장에서는 신선함도 화제성도 없는 ‘골동품’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후의 메이저 대회를 제패한 30대 후반의 미국인 3인방, U.S Open 우승자 스티브 존스(38세) – The Open Championship 우승자 톰 레먼(37세) – PGA Championship 우승자 마크 브룩스(35세)가 미국 골프계의 새로운 신성으로 자리 잡을 입장도 아니었다.     

닉 팔도와 그랙 노먼 in 1996 Masters Tournament

 

그야말로 골프계에는 새로운 영웅의 등장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TV의 시대가 된 뒤 혜성같이 등장하여 큰 사랑을 받은 아놀드 파머나 그 뒤를 이어 메이저 18승을 포함한 수많은 실적으로 올 타임 No.1 Golfer로도 칭해지는 잭 니클라우스와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스타성’을 가진 슈퍼스타급 존재가 눈에 뜨이지 않던, 그야말로 거기서 거기인 고만고만한 인물들이 임팩트 없는 플레이로 소수의 코어 팬들에게만 어필되던 정체기에 해당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의 전설적인 골퍼 세베 바예스테로스와 닉 팔도 등이 이끄는 유럽세가 80년대와 90년대 초의 PGA 투어를 제패한 바 있으나 그 정도로 스폰서의 후원이 늘거나 팬 층 확대에 영향은 없었다. 미국 골프계는 시장의 확대와 팬 확보를 위해서는 과거 ‘아놀드 파머 vs 잭 니클라우스’, 90년대의 ‘닉 팔도 vs 그렉 노먼’의 라이벌 프레임으로 이슈 몰이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NBA의 마이클 조던과 같이 아예 독보적인 슈퍼스타가 등장하여 완벽한 제패 양상을 보여주며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불러일으켜야 했는데,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 등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골프계였기에 실제로 그런 인물이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는 그저 희망일 뿐 현실성이 없어 보였다.   

  

바로 그러한 시점에 아마추어 골프계를 완전히 평정한 타이거 우즈가 “Hello World”라는 인사말과 나이키의 후원을 받으며 필드에 발을 들인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1996년 8월의 일이었다.     


“타이거 우즈는 스포츠계의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혁명이 될 것이며 그로 인해 골프를 바라보는 시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는 마이클 조던과 같이 종목을 초월한 선수가 될 것이다.”

    

프로 데뷔 전인 ‘그레이트 밀워키 오픈’ 첫날 기자들에 둘러 싸인 타이거

나이키의 CEO 필립 나이트의 전폭적인 절찬을 온몸에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등장한 타이거 우즈는 첫 경기인 ‘그레이트 밀워키 오픈’였다. 하지만 그는 첫 데뷔전에서 공동 60위를 기록하며 2,500달러 남짓의 상금을 획득했다. 일반 선수라면 컷오프만 당하지 않았어도 잘했다 할 만한 프로 데뷔 전이었지만 어마어마한 흥행성과 전무후무한 전속계약을 하며 등장한 타이거이기에 아쉬울 수도 있을 법한 등수였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1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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