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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12. 2022

천재라는 부담을 평생 안고 이혼에 슬럼프에 빠져도 –2

골프황제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역사를 써나가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277


대대적인 광고로 떠들어댔던 것에 부응할만한 성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첫 무대에서 무려 336야드 드라이버샷을 보여 주더니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홀인원까지 기록하며 그를 향한 팬들의 기대감에 확실한 기대와 희망의 불씨를 던져 주었다. 파3 14번 홀에서 그린 중앙에 놓인 핀을 향해 쏜 샷은 2번의 바운드 후 홀 안으로 들어갔고, 이후 타이거만의 독보적인 상징처럼 되어버린 저 유명한 ‘어퍼컷’ 세리머니와 함께 주변은 신성(新星)의 탄생에 격렬하게 환호했다. 그린 위로 올라가 실제 들어갔는지 슬쩍 홀 안을 살펴보는 타이거를 향해 중계방송 아나운서는 “Yeah ~ That`s Yours.”라는 말로 추임새까지 넣으며 데뷔전이라고 보기엔 그야말로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이 뒤따랐다.     

그렇게 끝난 데뷔전은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타이거 효과라는 것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골프 중계방송의 시청률이 급격히 오르고, 갤러리의 숫자는 눈에 띄게 늘었으며, 티켓 판매율도 함께 오르기 시작하며 대회를 치른 해당 지역의 경제에 미친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된 것이다. 그만큼 타이거의 프로 데뷔는 그에 대한 기대감과 화제성만으로도 충분히 골프계를 달구기 시작할만했던 것이다.      


프로게임에 적응하는 데 걸린 시간 단 4게임. 투어 참전 5번째 대회인 ‘라스베이거스 인비테이셔널’에서 그는 드디어 투어 첫 승을 거머쥐며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많은 사람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버리며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64타를 치며 데이비스 러브 3세와 공동 선두로 경기를 마친 뒤, 플레이오프 2번째 홀에서 승리를 확정 지으며 감격의 프로 첫 우승을 거두었다. 빠른 시일 내에 첫 승을 올린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인 시즌 마지막 대회이자 7번째 출전 경기였던 ‘월트 디즈니 월드/올즈모빌 클래식’에서도 2라운드 63타 등의 대활약으로 통합 21언더파를 기록, 페인 스튜어트를 꺾고 프로 2승째를 손에 넣었다.     


96년 8월에 데뷔해서 겨우 7 경기만 뛰었음에도 PGA Tour 신인왕을 확정 짓는 유일한 선수로 기록된다. 천재 아마추어 선수로써의 활약에 이은 프로 데뷔를 둘러싼 화제성의 폭발을 이끌더니 성공적인 신인 시즌 등의 이슈로 1996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가 선정한 ‘올해의 스포츠맨’에도 선정되었다.   

  

1997년은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스포츠 슈퍼스타 ‘타이거 우즈’의 탄생을 미국뿐이 아닌 전 세계에 확실하게 알린 해로 꼽힌다. 1월에 있었던 메르세데스-벤츠 챔피언십에서 노련한 베테랑 골퍼 톰 레먼(미국)과 함께 공동 1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 파 3에서 티샷이 해저드에 빠진 상대에게 핀 20cm에 붙는 날카로운 아이언샷으로 강펀치를 날리며 프로 통산 3승째를 거두었다.


게임 당일 비가 제법 굵직하게 빗줄기를 내리던 날이었고 상대가 위기에 빠진 상태여서 마음가짐이 느슨해질 법도 했지만 그는 토끼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전력을 모두 쏟아내는 호랑이의 엄청난 집중력으로 홀인원에 가까운 샷을 성공시킨 집념을 보여주었다. 이제 골프계와 그의 팬들의 모든 관심은 타이거가 프로 데뷔 후 처음 맞이하는 메이저 대회인 Masters Tournament가 열릴 4월로 향하였다.     


전년도 실버 컵 수상자 자격으로, 전년도 챔피언인 레전드, 닉 팔도와 한 조가 되어 Masters Tournament에 나선 타이거는 첫 번째 홀 드라이버 티샷부터 페어웨이를 크게 벗어 나는 등 프로 데뷔 첫 메이저 대회라는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한 채 첫 9홀에서는 4 오버파의 부진한 성적을 보이며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긴다. 그렇게 후반 9개 홀에서 이글 하나를 포함한 6 언더를 치며 데뷔 첫 라운드를 ‘온탕 냉탕’ 골프로 마무리 지었지만 대회 첫날의 후반에 보여 준 타이거의 능숙한 플레이는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나가는 맹수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튿날 라운드부터는 그야말로 펄펄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준다. 2라운드 6 언더 - 3라운드 7 언더라는 성적은 부담감에 움츠려 든 것이 아니라 메이저 경기에 대한 적응을 단 하루 만에 끝낸 차세대 레전드의 비상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보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천재 골퍼에 의해 맹폭격을 당하는 오거스타 내셔널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골프계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스코틀랜드의 골프 영웅이자 유러피언 투어에서 31승이나 거둔 유럽 챔피언 ‘콜린 몽고메리’는 2라운드가 끝난 뒤 프레스 인터뷰에서 이틀에 걸쳐 맹타를 치고 있던 타이거 우즈를 향해 “잘하고는 있지만, 경험의 부족이 (우승을 놓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 그에 비해 나는 메이저 대회 경험이 많다.”라는 풋내기 프로를 정신적으로 압박하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였다.     


다음날 자신의 골프 파트너에게서 자신에 대한 이와 같은 코멘트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타이거는 제법 세월이 지난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 말은 확실히 동기 부여가 되었다. 그가 나보다 메이저 경험이 많은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나 나나 메이저 우승 경험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둘 다 백지상태에서 출발인 거지, 뭐’라는 생각으로 시합에 임했다.”     


상대의 발언에 자극을 받은 혈기왕성한 타이거는 완전한 제압을 원했고 승부욕 게이지에 불을 당기면서 문제의 인터뷰를 했던 콜린을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벼랑까지 밀어붙였다. 그 결과는 타이거 65타, 그리고 콜린 74타로, 완전히 상대의 영혼까지 필드에 모두 탈곡시켜 버리고 나서 그가 그런 인터뷰를 한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만들어 버리는 실력의 격차를 보여주었다. 결국 콜린 몽고메리는 3라운드 후 프레스 인터뷰에서 패배를 인정하는 발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짧게 말할게요. 가능성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인간인데 인간인 이상 타이거를 이번 대회에서 넘어설 수는 없을 거예요. 그건 불가능해요.”     


파이널 라운드에 나서게 된 타이거의 3라운드까지의 성적은 총 15 언더로, 파이널 동반자가 될 코스탄티노 로카(이탈리아)와는 무려 9타 차였다.     


이후에도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주게 될 ‘레드 & 블랙 패션’으로 오거스타의 파이널 라운드에 나선 타이거는 여전히 당당한 플레이로 코스 곳곳을 농락하며 3 언더를 추가로 적립, 결국 총 18 언더라는 대기록으로 우승을 거둔다. 2위 톰 카이트(미국)와는 무려 12 언더라는 큰 차이였으며, 이 기념비적인 승리로 인해 타이거는 단순히 ‘골프 스타’로 골프계에서만 인정받는 것을 넘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세계적인 스포츠 대스타의 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파 5를 파 4처럼, 파 4를 파3처럼 플레이하는 타이거의 플레이는 대회 내내 거침이 없었다. 파 5에서 드라이버 티샷을 날린 뒤 숏 아이언으로 세컨드샷을 하여 그린에 올리는 것은 라운드가 거듭되면서 마치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평범한 플레이로 보일 정도로 자주 카메라에 잡혔고, 파 4에서도 가장 길게 잡은 아이언이 7번 아이언이었을 정도니 다른 선수들과의 퍼포먼스 차이는 이미 어마어마한 수준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지만, 타이거는 대회 통틀어 샷 거리가 가장 긴 선수였는데, 2위와의 드라이버 샷 거리 격차는 25야드(약 23m)나 되었다. 멀리만 친 것이 아니었다. 대회 통틀어 쓰리 퍼팅이 없었을 정도로 ‘유리 그린’으로 유명했던 오거스타의 그린 위에서도 그의 플레이는 거침이 없으면서도 정확하였기에 매우 안정적이었다.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오거스타 내셔널이 자랑하는 아멘코너를 4라운드 내내 확실히 공략하며 총 7 언더를 기록, 당시 기준 Masters Tournament 역대 최다 기록을 세웠다.     

대회 내내 보여준 퍼포먼스는 마치 아마추어 대회에 나선 프로의 모습 그 자체였다. 1라운드의 파트너이자 12 오버파로 컷 탈락을 한 전년도 우승자 닉 팔도가, 우승자 타이거에게 그린 재킷을 입혀 주는 장면은 ‘한 시대의 끝’과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린 골프 역사의 기념비적인 순간이자 천재 골퍼이자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가 앞으로 열게 될 수많은 영광의 서막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통과제의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골프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97년 Masters Tournament는 이 외에도 다양한 화젯거리를 낳았다. 1981년 미국에 케이블 TV 시대가 열리면서 스포츠 중계가 대폭 확대된 이래 36년 동안 가장 높았던 시청률을 기록했는데, 일요일의 시청률은 14.1%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역대 최고였다. 이 대회를 TV로 지켜본 시청자는 골프 대회 사상 최대인 4400만 명이 넘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타이거와 그의 아버지 얼은 그날 밤 축하 파티를 벌이며 지금까지의 고생을 격려하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이거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생각한 얼이 잠시 후 타이거를 찾았을 때 21살의 어린 아들은 그린 재킷을 꼭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Masters Tournament의 감동이 끝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5월 ‘GTE 바이런 넬슨 골프 클래식’에서 17 언더의 성적으로 또다시 우승을 거머쥔 타이거는 이후 1승을 더 추가, 총 4승을 거두며 97년 시즌을 마쳤다. 200만 달러의 상금왕으로 커리어 첫 상금왕을 비롯, PGA Player of the Year와 PGA Tour Player of the Year를 휩쓸었고 AP 통신이 선정하는 ‘올해의 남자 스포츠 선수’도 수상하는 기쁨을 누렸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노력과 준비는 더욱 철저해졌다. 긴장하거나 심리적으로 위기가 닥치면 훅 성 구질이 튀어나와 고생했던 타이거는 더욱 안정적인 스윙을 찾기 위해 부치 하먼과 스윙 교정에 들어간다.     


1998년에 총 21개 대회에 출전한 타이거는, 1개 대회에서는 컷 오프 당했지만 대부분은 TOP25 안에 들며 여전한 실력을 보여 주었다. 5월에 열린 ‘벨 사우스 오픈’에서 17 언더를 기록하며 우승하였으나 그것은 해당 연도에 기록한 단 하나의 승리였다. 4대 메이저에서도 세 번의 TOP10을 기록했지만 우승은 이루지 못하는 등 평범한 시즌을 보냈다. 워낙 잘 나갔던 타이거였기에 ‘슬럼프’로 받아들여졌던 98 시즌은 총 180만 달러의 상금으로 투어 상금 4위에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멀리 오래가기 위한 그의 준비는 물밑에서 꾸준히 진행 중이었다. 원하는 스윙이 점점 완성되고 본인의 골프에 자신감을 얻은 타이거는, 99 시즌 중반부터 투어를 다시 지배하기 시작했다.     


시즌 초반이던 2월에 열린 ‘뷰익 챔피언십’에서 22 언더로 7개월 만의 우승을 거두긴 했어도 세계 1위의 타이틀을 같은 나이키 스폰서 프로인 데이비드 듀발(미국)에게 넘겨주는 등 97년 Masters Tournament에서 보여 준 센세이셔널함에 비해서는 다소 위축된 것으로까지 보일 정도이기는 했다.     

1999년 PGA Championship에서 생애 두번째 메이저 대회 우승 당시

하지만 그 해 6월 초에 열린 ‘메모리얼 토너먼트’에서 15 언더의 성적으로 비제이 싱(피지)을 꺾고 우승한 타이거는, ‘페인 스튜어트’의 감동적인 우승으로 막을 내린 1999년 U.S. Open에서도 3위를 차지하는 등 안정된 골프를 보여 주기 시작했고 이 시점부터 폭발적인 드라이버와  날카로운 아이언 공략에 이은 안정된 숏 게임과 퍼팅 실력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투어의 제왕’으로 군림할 준비를 마친다.     


그렇게 분석할 수 있는 근거는, 그 해 6월부터 11월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무려 7승이나 올리며 본격적인 제왕의 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간에는 생애 2번째 메이저 타이틀인 ‘PGA Championship’과 한 시즌을 정리하는 이벤트인 투어 챔피언십도 있었다.     


밀레니엄 시대를 앞둔 세기말의 타이거는 1900년대 골프 역사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훌륭한 퍼포먼스와 성적을 보여주었고, 압도적인 플레이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모든 골프팬들의 기대와 응원을 받기에 충분했다.     

2000년 1월의 ‘메르세데스 챔피언십’과 2월에 열리는 ‘AT&T 페블비치 내셔널 프로암’, 3월의 ‘베이힐 인비테이셔널’에서 차례차례 우승을 거두며 월 1승씩을 적립(?)하기 시작한 타이거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4월의 첫 메이저인 Masters Tournament에서는 5위로 선전한 타이거는, ‘메모리얼 토너먼트’에서 커리어 2승째를 거둔 뒤 페블비치에서 열린 U.S. Open을 맞이한다. 그리고 역대 가장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이며 이 대회를 거머쥐게 되면서 메이저 대회를 세 번째로 정복하게 된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1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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