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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13. 2022

천재라는 부담을 평생 안고 이혼에 슬럼프에 빠져도 –3

골프황제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역사를 써나가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280


이 대회의 최종 라운드의 스코어는 오로지 타이거를 위한, 타이거에 의한 대회였음을 보여준다. 100회째를 맞이한 U.S. Open 역사에 있어 2위와 무려 15타 차나 나는 우승은 U.S. Open은 물론이고, 메이저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위대한 기록이 된다. 그가 세운 이 어마어마한 기록은 2011년 북아일랜드의 신성 로리 매킬로이가 16 언더로 우승하기까지 U.S. Open 최저 언더파 기록이기도 했다. 라이벌이자 타이거 덕분에 세상에서 본의 아니게 유명해진 ‘만년 2등’인 필 미켈슨은, 훗날 골프 관련 토크쇼에서 타이거 우즈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당시 대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0년 U.S. Open의 타이거 우즈야말로 골프의 정수이자 위대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위대한 퍼포먼스를 막 마친 타이거는 ‘골프의 성지’ 영국의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열리는 The Open Championship이었다. 이 대회를 우승할 경우,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최연소로 달성하게 되는 타이거는 여러모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워낙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승리한 U.S. Open의 화제가 채 잠잠해지지도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주목이 집중되었던 그 경기에서, 타이거는 또다시 스스로의 위대함을 증명해 내었다. 나흘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페이스를 유지하며 19 언더를 치며 2위 그룹을 8타 차로 제치는 완벽한 우승을 거머쥔 것이다.     


매스컴의 과다한 주목과 지나칠 정도로 과열된 팬들의 관심, 그리고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던 상태의 경우 어떤 스포츠를 막론하고 연이은 큰 대회를 우승하는 일이 드문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 그 흥분상태의 감정을 침착히 제어하며 냉정하게 필드를 점령한 타이거는, 고작 24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존경할 수밖에 없는 뜨거운 승부욕과 냉철한 플레이로 골프 역사의 신화를 새로 써내고야 만다.


이 성과는 기존 최연소 그랜드 슬래머였던 잭 니클라우스의 26세의 기록을 2살이나 앞당기면서 앞으로 이 젊은 골퍼가 새로 써나가게 될 커리어를 도저히 짐작조차 하지 못할 저 먼 곳을 가리키며 골프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조차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U.S. Open과 The Open Championship을 연거푸 우승하면서 전대미문의 우월한 능력을 확실하게 증명한 천재 골퍼의 다음 대회는, 시즌 마지막 메이저인 PGA Championship이 있었다. 심지어 앞의 2개 대회와 다르게 이 대회는 타이거가 전년도 우승자로서 방어전을 치르는 대회였기에 관심이 높았다.     

발할라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타이거는 첫날 6 언더를 치며 1위로 올라서 메이저 3개 대회 연속 우승에의 가능성을 높였다. 이 기세로 파이널 라운드까지 1위를 지키긴 했으나 복병이 있었다. 바로 노장 ‘밥 메이’(미국)이었다. 이 대회 전까지 PGA 투어에서 1승도 못 거두고 1년 전에 유러피언 투어에서 프로 골퍼로서 첫 우승을 거둔 무명의 프로 골퍼 밥 메이는, 2~4라운드에서 연속으로 66타를 치는 맹타로 파이널 라운드에서 타이거 우즈와 18 언더로 공동 1위를 차지하며 플레이 오프에 임하게 되었다.     


3개 홀을 치러 총스코어가 낮은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는 PGA Championship 플레이오프 룰에 따라 타이거와 밥 메이는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접전에 들어갔다. 첫 홀에서 롱 퍼팅을 성공시킨 타이거가 나머지 2개 홀을 파로 세이브하며, 전 홀에서 파만 기록한 밥 메이를 꺾고 우승을 확정, 드디어 꿈이라고만 여겨졌던 3개 대회 메이저 대회 제패라는 금자탑을 세우게 된다. 이는 벤 호건이 Masters Tournament – U.S. Open – The Open Championship을 연거푸 제패한 1953년 이래 처음 달성된 대기록이었다.     


PGA Championship이 끝난 뒤 1주일 뒤 열린 NEC Invitational에서도 우승한 타이거는, 보름 뒤 열린 Bell Canadian Open에서도 훌륭한 퍼포먼스로 시즌 9승째, 본인의 통산 24승째를 결정지었다. 타이거의 All Time 샷 중 하나로 평가되는 파이널 라운드 18번 홀의 세컨드 샷이 바로 이 대회에서 나왔다. 18번 홀의 티샷이 벙커에 빠진 타이거는 1타 차로 2위에 앞선 상황이었기 때문에 연장전을 가지 않으려면 뭔가 한방이 필요했다. 216야드가 남은 상황에서 타이거는 6번 아이언을 들어온 힘을 다해 내려쳤고 그 공은 해저드를 건너 그린 앞 러프에 떨어졌다. 홀과는 겨우 5m 거리. 투 퍼트로 간단히 우승을 손에 넣었다.     


최고의 퍼포먼스로 한 시즌을 마무리 지은 타이거를 향한 세계 골프팬들의 관심은 2001년의 첫 번째 메이저, Masters Tournament였다. 평생 한번 하기도 어렵다는 메이저 대회 우승을, 4개 대회 연속으로 이루어 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기대가 공존하는 와중에도 타이거는 묵묵히 본인의 플레이로 차곡차곡 승리를 쌓아 갔다. 2001년의 타이거는 시즌 첫 메이저인 Masters Tournament를 앞두고 2승을 거두었는데 이 중 하나는 타이거의 All Time급 퍼팅 퍼포먼스를 보여준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이었다.     


그렇게 ‘제5의 메이저’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우승 후, 많은 이들의 기대 속에 2001년의 Masters Tournament가 막을 올렸다.     


첫날 2언더파를 치며 워밍업을 마친 타이거는, 둘째 날부터 먹잇감을 놓지 않는 강한 승부 근성의 맹수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오거스타에서의 첫 우승 이후, 타이거에 유린당한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 측은 1999년 대회부터 전체 전장을 일부러 늘리기까지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거는 그에 아랑곳 않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2라운드 6언더파로 공동 2위에 오른 타이거는 3라운드에서 4 언더를 추가하며 토털 12언더파로 1위인 상태로 최종일을 맞이하게 된다.


마지막 라운드의 파트너는 타이거에 1타 차 뒤져 있는 필 미켈슨이었다. 톱스타 두 명의 결전이 예상되었지만 결과는 예상보다 허망하고 허탈하게 끝이 났다. 2타를 줄이는데 그친 미켈슨을 상대로 타이거는 경기 내내 순항하며 4언더파를 친 것. 우승을 눈앞에 둔 타이거는 Uphill로 구성된 18번 홀에서 330야드의 드라이버를 친 뒤, 웨지로 5m 내에 붙여 버디로 대회를 끝마쳤다. 그리고 이를 통해 U.S. Open – The Open Championship – PGA Championship – Masters Tournament의 순으로 메이저 4개 대회를 연속으로 제패하는, 이후 불리게 된 전설의 ‘타이거 슬램’을 달성하게 된다.     

그랜드 슬램 달성을 확정 짓는 순간의 세리머니

마스터스가 창설된 시점 이후로 지금껏 골프계에서는 단 한 번도 캘린더 이어 슬램이 나온 적이 없었다. 즉, 한 해의 메이저 대회를 싹쓸이 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뜻이다. 톱 시드의 선수가 유리하다는 테니스에서도 남자는 호주 출신의 ‘로드 레이버’ 밖에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이고, 메이저 4개 대회를 2년에 걸쳐 연속으로 쟁취한 사례조차 여자 선수인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세레나 윌리엄스, 남자로는 노박 조코비치 밖에 없었던 일이었다. 잭 니클라우스조차 한 해 2번 이상 메이저를 차지한 바 없고, 오늘날의 골프 스윙을 정립시켰다고 평가받는 ‘위대한’ 벤 호건만이 앞서 언급했던 1953년의 3 연속 메이저 우승을 달성했을 뿐이다.     


전인미답의 기록을 세우며 유례없는 성과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던 타이거의 라이벌은 그 시점에선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으며, 벤 호건이나 잭 니클라우스 같은 전설을 뛰어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을 만큼 위대한 플레이를 보여 주고 있었다.    


‘타이거 슬램’ 달성 뒤 도전한 2001년 U.S. Open에서 타이거는 공동 12위로 대회를 마치며 연속 메이저 우승의 기록이 끊기고 말았다. 이후의 2개 메이저에서도 20위권을 기록하며 더 이상의 메이저 우승은 추가하지 못했으나 일반 대회에서 2승을 더 하며 99년부터 이어 온 상금왕 타이틀을 3년 연속으로 거머쥐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세계 랭킹 및 올해의 선수 부분의 1위도 굳건히 지켰다.     

2002년에 들어와 3월에 있은 ‘베이힐 인비테이셔널’을 시작으로 우승 사냥에 나선 타이거는, 시즌 첫 메이저인 Masters Tournament를 통해 1년 만의 메이저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전년도보다 315m로 전장이 늘어난 만큼 장타자인 타이거에게도 어느 정도는 부담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었으나 역시나 타이거는 그런 예측을 보란 듯이 무너뜨린다.      


2달 후 뉴욕의 Bethpage에서 제102회 U.S.Open이 열렸다. 2000년의 압도적 우승 이후 이듬해 공동 12위에 그쳤던 한을 풀려는 듯, 타이거는 1라운드부터 3 언더로 1위에 나서며 대회 내내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2위 세르히오 가르시아(스페인)와 4타 차의 여유를 둔, 5 언더로 맞이한 파이널 라운드에서도 타이거는 퍼팅이 난조를 보이는 와중에도 크게 무너지지 않으며 경기를 주도하였고, 2타를 잃긴 했으나 결국 3 언더의 성적으로 메이저 2개 대회 연속 우승을 달성하였다.     


통산 2번째 U.S. Open 우승이자 8회째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한 타이거는, 이로써 대선배인 톰 왓슨(미국)과 통산 메이저 우승 회수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2년 만에 U.S. Open 타이틀을 다시 확정하는 순간


모두의 기대 속에 맞이한 7월의 The Open Championship. 장소는 영국의 뮤어 필드로 1892년 첫 대회를 개최한 뒤 이 시점에서 15회째 개최를 한, 유구한 역사를 지닌 The Open Championship을 개최하는 대표적인 클럽이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타이거는 ‘타이거 슬램’이 아닌, 진정한 ‘캘린더 그랜드 슬램’에 한발 다가갈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매스컴의 집중도는 매우 컸다. 엄청난 수의 기자와 방송 카메라가 타이거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녔다. 모두가 기대를 하면 언제나 그 이상의 성과를 내곤 했던 타이거이기에 ‘이번에도?’ 하는 기대감이 높았지만, 이러한 타이거의 지나친 독주에 질투가 났던지 이번엔 ‘하늘’이 요동치며 그를 방해하고 나섰다.    

 

파 71로 치러진 대회에서 첫날 1 언더를 친 타이거는, 둘째 날 3 언더를 더하며 총 4언더파로 1위 어니 엘스(남아공)에 겨우 2타 차 뒤진 공동 9위였다. 이 정도 타수는 하루 만에 급격히 줄이고 상대를 제쳐 버리는 타이거였기에 골프 팬들의 기대는 최고조로 올라갔는데, 바로 그 시점에서 어처구니없는 3라운드 ‘하늘의 장난’이 시작된다.     


타이거가 상위권 선수로서 오후에 경기에 나섰을 때 이미 날씨는 평범하게 골프 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비만 내려도 제대로 플레이하기 어려운 골프장인데 예정에도 없던 태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볼이 바람에 의해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공중에서 바람이 회오리를 쳤고 비도 덩달아 세차게 내렸다. 타이거는 빗속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번번이 칠 때마다 공이 제멋대로 휘어 갈대밭에 처박히곤 했으니 미치고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 연이어 펼쳐졌다.     


마지막 18홀의 버디 펏조차 홀을 핥고 나오면서 허무한 표정을 지은 타이거는, 경기가 끝나고 라운드 파트너이자 절친인 마크 오메라와 힘없는 포옹으로 서로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날 하루만 11 오버파를 치며 81타를 기록, 총 6 오버파의 성적을 기록하며 급격히 하위권으로 떨어진 타이거는 마지막 날 6언더파를 치며 최선을 다했지만 전 날의 악몽을 메우지 못한 채 결국 최종 공동 28위의 초라한 성적으로 대회를 마쳤다.     


2003년은 타이거는 4승을 거두고 더 많은 대회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거둔 비제이 싱(피지)에게 4년 연속으로 달성 중이던 상금왕 타이틀을 내주었으며 무엇보다 메이저 대회 무관으로 그치게 된다. 변화가 필요한 타이밍이었다. 그는 그 변화의 모멘텀을 바로 ‘스윙’에서 찾았다.     


1999년 이후 타이거는, 업라이트 한 백스윙과 빠르고 강한 엉덩이의 회전력, 그리고 스윙 이후 무릎을 강하게 펴주며 압력을 지탱함으로써 더 먼 거리를 날렸고 탁월한 숏 게임이 함께 하며 투어를 완전히 지배하는 듯 보였지만, 이런 방식의 스윙은 조금씩 몸에 부담을 주고 있었다. 무릎의 이상을 느끼기 시작한 타이거에게는 스윙의 전반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스윙을 갖고 싶어 했다. 타이밍에 영향을 덜 받는 스윙,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스윙, 미스를 해도 크게 위험에 빠지지 않는 계산 가능한 자신에게 최적화된 스윙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비해, 스윙 코치인 부치 하먼은 마이너 한 틀에서의 작은 변화로 스윙을 보완하며 다듬길 원했고 이는 시즌 내내 스윙 철학에 대해 두 사람이 부딪히는 계기가 되었다.     

부치 허먼에게 스윙 체크를 받고 있는 우즈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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