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Jul 14. 2022

천재라는 부담을 평생 안고 이혼에 슬럼프에 빠져도 –4

골프황제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역사를 써나가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283


이미 정점에 오른 타이거는 스윙 변화를 통해 한 단계 더 높은 진화를 원했고,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이 알려 주는 것보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성급하게 진도를 나가는 타이거가 조심스러웠던 부치 하먼의 결별은 예견된 결별이었다.     


절친인 선배 마크 오메라를 통해 스윙 코치 행크 헤이니를 소개 받은 타이거는, 2003년 중에도 비밀리에 행크 헤이니를 통해 스윙에 대한 조언을 받았고 결국 새로운 시즌 시작과 함께 부치 하먼과 공식적으로 결별하며 행크 헤이니를 스윙 코치로 영입하였다.


하지만, 프로 골퍼의 스윙을 변경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골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중간에 자신의 몸에 밴 스윙의 스타일을 바꾼다는 것은 아예 한 선수의 선수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선택이다.


스윙 스타일 변경으로 인해 커리어를 완전히 망쳐 버렸던 사례가 한둘이 아니었기에, 많은 전문가들과 팬들은 타이거의 새로운 여정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거는 그 위험한 도박에 자신감을 보였다.     

연습 중인 타이거와 행크 헤이니, 그리고 캐디인 스티브 윌리암스

 

무릎에 가는 부담을 최소화하고, 업라이트했던 스윙면을 플랫하게 다듬는 스타일로 자신에게 맞춰나간 타이거의 스윙은 조금씩 몸이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진행이 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만의 스윙으로 재탄생하게 되며 익숙해져갔다. 그 과정에서, 데이비스 러브 3세를 꺾고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WGC ‘악센츄어 매치 플레이 챔피언십’에서의 승리가 2004년의 유일한 승리였고, 이 과정에서 세계 1위의 자리도 264주 만에 내주게 된다. 호랑이 없는 곳에서 투어를 완전히 손에 넣었던 비제이 싱이 시즌 9승(메이저 1승 포함)을 차지하며 그간 타이거가 누려 왔던 영광을 고스란히 가져가 새로운 왕자 코스프레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거의 2004년은 의미가 있었다. 아버지와의 정신적인 교감과 멘탈 강화를 위해 4일간 실시했던 군사 훈련, 프로 골퍼로서 인생의 도박이라 평가할 수 있는 스윙 변경, 그리고 평생을 함께 할 인생의 반려자와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골프 황제의 마음을 앗아간 상대의 이름은 스웨덴 출신의 엘린 노르데그린이라는 모델출신의 미녀였다.     


타이거는 2001년 The Open Championship이 개최된 영국에서 동료 골퍼인 예스퍼 파네빅(스웨덴)의 보모로 있던 엘린을 처음으로 만났다. 모델 출신 금발의 미녀에게 첫눈에 반한 타이거는, 오랜 기간 구애를 하여 결국 그녀와 연인이 되었고 두 사람은 결국 2004년 10월 바베이도스에서 철저한 보안 속에 결혼식을 치르며 새로운 인생에 한 발자국을 내딛게 된다.     

아내와 함께 농구경기 관람하러 가서

철저한 플랜으로 2005 시즌을 준비한 타이거는 1월에 참가한 첫 대회인 ‘뷰익 인비테이셔널’에서 16언더파의 성적으로 2위 그룹을 3타차로 따돌리며 우승을 달성했다. 해당 대회 3번째 우승이자 매치 플레이를 제외한 일반 스트로크 대회로는 15개월 만의 우승. 기세를 탄 타이거는 3월에 열린 ‘Ford Championship at Doral’에서 필 미켈슨과의 혈전 끝에 1타차로 제치며 시즌 2번째 승리를 가져 왔다.


특히 1타차 접전이던 18번 홀에서 ‘숏 게임’의 황제 필의 버디 트라이 칩샷이 홀을 핥듯 나와 연장전이 무산된 씬은 당시 골프팬들이라면 모두가 기억하는 기가막힌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3년 만의 메이저 타이틀 도전이 될, 시즌 첫 메이저 대회이자 타이거에게는 ‘각별한’ Masters Tournament가 열린다. 2002년 U.S. Open 이후 10개의 메이저 대회 동안 타이거는 추가 승수를 올리지 못했다. 2위만 달랑 한번, TOP 10에 들지 못한 것도 7번일 정도였다. 빠른 기세로 잭 니클라우스의 기록에 근접해 가다가 멈춰버린 그의 승리 행진에 대해 호사가들의 말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슬럼프를 언급할만한 상황에서 스윙 코치를 교체하고, 전면적으로 스윙을 바꾸고, 결혼까지 했으니 호사가들 사이에서 비난과 논란, 그리고 뒷소문들은 그야말로 무성해져갔다. 일반 대회에서 우승하는 타이거는 더이상 팬들에게 감흥을 주지 못했다. 메이저에서의 한 방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특히나 Masters Tournament는 오늘날(당시 기준) 타이거를 있게 해준 대회였던만큼 ‘새롭게 진화한’ 타이거 우즈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경기였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첫 날은 2오버파를 치며 그의 부활을 점치기엔 한참 부족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5언더파를 치며 단독 선두에 나선 크리스 디마르코(미국)와는 7타차였다.

 

2라운드에서 심기일전하여 6언더파를 몰아치며 4언더파로 상위권에 올라왔으나 디마르코가 이 날도 5언더파를 적립, 총 10언더파로 단독 1위를 질주하며 타이거와의 격차를 6타차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3라운드에서 불꽃과 같은 7언더파를 몰아치며 그 날 2오버파를 기록한 디마르코를 오히려 3타차로 제치고 단독 1위에 나선 것. 3년 만의 메이저 우승에 성큼 다가선 타이거의 경기력에 다시금 세계 골프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한다.     

최종 라운드에서 맞붙은 타이거와 디마르코는 한치도 양보 없는 혈전을 선보였다. 3타 차의 여유가 있었으나 디마르코가 힘을 내며 경기 내내 타이거를 압박하였고, 경기 전체의 향방을 가른 파3 16번홀에 도착했을 때 타이거와 디마르코는 13언더 vs 12언더로 1타차였다. 누군가 삐끗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오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타이거가 친 티샷은 그린과 그린 좌측의 해저드를 넘어 러프 쪽으로 빠졌다.      


반면, 디마르코의 샷은 온 그린. 우측에서 좌측으로 심하게 경사진 홀이었기 때문에 매우 까다롭기로 유명한 홀이고(심지어 경사의 끝엔 벙커가 있고, 그 벙커를 넘어서면 해저드가 있다) 타이거 입장에서는 칩샷으로 최대한 홀에 붙여 파 세이브로 한숨 돌리는 전략이 가장 주요한 상황이었다.     


2분간 면밀히 그린과 홀 주변을 캐디와 구석구석 살펴 본 타이거는, 캐디 스티브에게 “요 앞에 보이는 동전 모양 자국으로 볼을 떨어뜨리면 공이 홀 쪽으로 타고 갈 수 있을까?”라고 물어 봤고, 스티브는 “아마도 그럴 것 같다”라고 답했다. 목표물을 정확히 강타하고 두 번 더 그린에서 튄 공은 회전이 멈춘 뒤 홀 방향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너무도 정확한 흐름에 방송 캐스터도 “Oh My Godness!”라고 호들갑을 떨며 기대를 고조시켰고, 공은 자로 잰 듯 정확하게 홀 앞에 멈춰선다. 그 시점에서 볼에 새겨진 나이키의 로고가 살짝 보인 뒤 그대로 홀로 쏙 들어간다. 그야말로 완벽한 샷이었다.      


쏟아지는 갤러리의 환호성 속에 디마르코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했지만 그러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결국 버디 트라이가 실패하며 2타차로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유명했던 이 장면은 아래 영상으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https://youtu.be/7Fg4sZLrjwA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기가막힌 샷에 너무 흥분한 탓인지 타이거는 그답지 않게 샷에서 실수를 연발하며 17, 18번홀에서 연거푸 보기를 한다. 덕분에 파로 끈덕지게 버틴 디마르코는 연장전에서 다시금 전의를 다듬고 그를 따라잡는다. 하지만 연장전으로 들어가면서 정신을 재무장한 타이거는 첫 번째 플레이오프 홀에서 버디를 기록하며 3년 만의 메이저대회 우승을 쟁취해낸다.     

2005년 Masters Tournament 우승 당시

타이거의 우승으로 PGA 투어는 시들했던 상황을 털어내고 다시 활기를 찾게 된다. 특히 16번 홀의 기적 같은 샷은 한동안 여기저기서 영상이 짤로 돌아다니며 그 명성을 떨쳤다. 타이거가 칩샷한 공이 오거스타의 16번 홀을 가로지르는 데 걸린 시간은 약 17초. 홀에 들어가기 전까지 볼을 비추던 방송사 카메라에는 나이키의 로고가 또렷이 찍힌 채 마치 나이키가 만든 광고와 같이 계속해서 방영되었다. 심지어 들어가냐 마냐의 아슬아슬한 순간은 클로즈업까지 되어 그야말로 나이키 일대 최고의 다큐멘터리 광고를 만들어냈다.     


여담이긴 하지만, 광고계의 계산에 따르면 샷이 성공된 당일에만 100만 달러의 광고 가치를 창출했다고 전한다.     


이 우승으로 통산 9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차지한 타이거는 남아공의 레전드 선수인 게리 플레이어 그리고 20세기 가장 위대했던 선수 중 하나인 벤 호건과 메이저 타이틀 집계에서 동률을 기록하게 되었다.     


2달 뒤 있은 U.S. Open에서 타이거는 2개 대회 연속 메이저 우승과 동시에 두 자릿수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뜻밖의 복병인 뉴질랜드의 마이클 캠벨에게 2타차 우승을 내주며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연속 메이저 우승은 놓쳤지만, 시즌 두 번의 메이저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거둔 타이거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 새로 바뀐 스윙에 완전히 적응하였고, 그 스윙 스타일에 맞춰 경기력이 점점 전성기 이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5년 전 우승했던 골프의 성지, 세인트 앤드루스로 날아가 참가한 The Open Championship에서 통산 10번째 메이저 우승이라는 어마어마한 업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달성해낸다.     

이 대회는 열리기 전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레전드, ‘잭 니클라우스’가 The Open Championship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무대였기 때문이다. 총 3번의 본 대회 우승을 기록하며 PGA 통산 73승을 비롯, 메이저 18승과 총 117승에 빛나는 리빙 레전드와의 이별에 영국이 들썩였고 많은 기자진들이 잭의 마지막을 촬영하기 위해 세인트 앤드루스에 모였다. 잭 니클라우스가 마지막 홀에서 5m 남짓한 버디를 성공시키며 화려하게 The Open Championship 무대를 마무리했지만 그 날의 피날레에 등장한 진짜 주인공은 역시 타이거였다.     


첫 날부터 6언더를 치며 1위에 오른 타이거는, 단 한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은 채 선두를 질주하며 총 14언더파로 콜린 몽고메리(스코틀랜드)를 5타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결국 골프 인생을 걸고 도전한 스윙 교체는 결과적으로 그의 프로인생에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무릎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2000년대 초반의 안정감을 보여 준 타이거는 남은 2005 시즌에서 추가 2승을 거두며 ‘(슬럼프도 아닌)평범했던’ 2004년으로부터 화려하게 복귀했다.      


필 미켈슨이 우승한 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 PGA Championship에서도 공동 4위를 기록하며 ‘타이거 슬램’이라는 신조어를 낳은 2000년을 제외하면 메이저 대회에서도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시즌이 되었다. 2005년의 타이거는 PGA 올해의 선수상은 물론, 상금왕과 다승왕, 최저 타수상까지 휩쓰는 성적을 남기며 No.1 Ranking Golfer의 위용을 과시했다.     


2006년이 되면서 그는 이제 완전한 새로운 업그레이드 버전의 골프황제로서의 위용을 보여준다. 1월의 ‘뷰익 인비테이셔널’에서 대회 통산 네번째 우승을 달성하며 시즌을 시작한 타이거는, 2월에는 초청받아 참가한 유러피언 투어 '두바이 데저트 클래식'과 3월에 열린 ‘Ford Championship at Doral’에서 연이어 우승한다. 4월의 첫 메이저 대회인 Masters Tournament에서는 나흘 내내 70타대의 꾸준한 경기력으로 총 3언더를 기록했으나 3~4라운드에서 집중력을 보인 필 미켈슨의 안정된 경기력 앞에 우승을 내줘야 했다. 좋은 흐름을 타고 시즌을 즐길 준비가 되었다 싶었던 그 때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시련이 들려온다.     


최고의 친구이자 정신적인 지주였던 아버지 ‘얼 우즈’가 향년 74세의 나이로 전립선암이 원인이 되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골프라는 스포츠를 접한 순간부터 타이거와 얼은 거의 한 몸처럼 움직였고 그 과정들을 겪어왔다. 타이거를 절대적인 위치로 이끈 강한 정신력과 승부사로써의 기질을 갖게 키우고, 늘 도전에 임하는 굳은 의지를 만들어낸 것은 8할이 아버지 얼 우즈의 피와 눈물과 땀이었다.      


타이거의 골프 인생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던 ‘영원한 벗’ 아버지의 죽음에 우즈는 정신적인 충격과 그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모두의 우려를 털어낸다. 다시 필드에 복귀하여 황제의 위치에서 호령하는 것만이 천국에 있을 아버지의 응원에 답하는 길이라며 독하게 마음을 다잡으며 바로 대회 참가를 선언한다.     

하지만 그의 굳은 의지와는 달리 그 충격은 파장이 컸다. 타이거의 경기력은 흔들릴 수 밖에 없었고, 그 해 6월에 있었던 U.S. Open에서 이틀 연속 6오버파를 치며, 도합 12오버파라는 성적으로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메이저 38번째 대회 만에 컷오프를 당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컷 오프를 당한 골프황제’라는 비아냥거림에 절치부심한 타이거는 다시 한번 메이저대회에 도전장을 던지게 된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1289


매거진의 이전글 천재라는 부담을 평생 안고 이혼에 슬럼프에 빠져도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