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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07. 2022

장애를 극복한 위인으로 늘 언급되곤 하지만 - 1

그녀가 그렇게 되기까지 어느 한순간도 쉬웠던 하루는 없었다.

242번째 대가의 이야기.     


1880년 앨라배마주 터스컴비아에서 부유한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생후 19개월 때 앓은 뇌척수막염으로 인해 시청각장애인이 되어,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라는 3중고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19개월 당시나 그 이전의 기억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는 것도 무리가 있겠으나 자신의 감각이 살아있을 당시의 기억과 그렇지 못했던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면 그 이전에 자신이 느꼈던 감각을 기억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당시 자신의 기억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서서히 나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적막과 암흑에 익숙해지면서, 이전에 보았던 세상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내 영혼을 해방시킨 선생님이 올 때까지 그랬다. 그러나 태어나 처음 19개월 동안 나는 넓고 푸른 들판, 빛나는 하늘, 나무와 꽃을 언뜻이나마 보았고, 이후에 찾아온 캄캄한 암흑도 이것들을 모두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일찍이 본 적이 있다면 '대낮도 대낮이 보여 준 것들도 이미 내 경험인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그런 그녀에게 정상적인 교육이 될 리 없었고, 대여섯 살이 될 때까지도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물건을 던지거나 사람을 할퀴거나 때리는 정도로밖에 의사표현을 할 수 없었다. 6살이 되던 무렵에 부모는 볼티모어에 사는 유명한 안과의사 줄리안 차이소름 박사가 장님의 눈을 뜨게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딸을 치료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줄리안 박사에게 딸을 데려갔다.      


그러나 검사 결과 시신경이 남김없이 모두 죽은 후에 해당하는 케이스라고 판정되어 치료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딸을 포기하지 않았다. 치료 대신 그 상태를 호전시켜 세상에 적응시키는 방식을 교육으로 충분히 발달시킬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따라 장애인 문제에 상당한 관심과 연구를 하고 있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박사를 소개받게 된다.

미국의 사회 운동가로, 위인전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장애를 가지고 살았던, 들을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었던 삼중고의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 인권 운동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헬렌 애덤스 켈러(Helen Adams Keller)의 이야기이다.

물론 그녀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기에 그녀는 몇 퍼센트 안 되는 상위 수혜자라는 사실관계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장애를 얻은 본인이나 그런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녀의 부모가 그녀에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녀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병을 앓은 후 몇 달 동안 있었던 일은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 다만 엄마가 가사일로 이리저리 분주히 돌아다닐 때 엄마의 무릎 위에 앉아 있거나 엄마의 옷자락에 매달려 있던 광경만 기억이 난다. 나는 두 손으로 모든 물건들을 만져 보고 모든 동작을 관찰했으며, 이를 통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곧 나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면서 내 의사를 서투른 몸짓으로 표시하기 시작했다. ... 엄마도 또한 내가 많은 일들을 쉽게 눈치챌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주었다. ... 앞을 못 보는 긴 암흑의 세월 동안 그나마 겪었던 밝고 좋은 일들은 모두 엄마의 자상한 지혜 덕분이었다.


그를 만난 부모는 ‘퍼킨스 맹인 학교’를 추천받고, 그 학교에 딸을 보내는 대신에 학교에 의뢰하여 가정교사를 부탁한다. 이때 온 사람이 저 유명한 앤 설리번 선생이었다. 설리번은 1866년에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 고아가 되었으며, 구빈원을 전전하는 어려운 생활 끝에 퍼킨스 학교에 들어와 점자 및 수화 사용법을 배우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어린 남동생이 있었지만 일찍 병으로 여의었고 그녀 자신도 지독하게 눈이 나빠 엄청나게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설리번과 헬렌(10살 당시)

그녀가 장애인 학교를 다닌 까닭은 그녀 역시 어려서부터 결막염으로 시각장애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으며, 여러 번에 걸친 대수술 끝에야 어느 정도 시력을 회복했던 까닭이었다. 원래는 맹인이었기 때문에 퍼킨스 맹인 학교를 다녔고, 이후 눈 수술을 받아 시력을 다시 얻게 된 케이스였기에 설리번 자신도 시각장애에 대해서는 실제적인 경험을 가진 경험자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평생 사물이 둘로 겹쳐 보이는 불편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녀와의 만남이 얼마나 어려운 노력과 기다림의 연속이었는지에 대해 헬렌은 다음과 같이 당시를 기억했다.


아빠는 슬픈 마음과 많은 걱정을 안고 가는 여정이었지만, 나는 아빠의 고민은 전혀 모른 채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짜릿한 여행만 즐거울 뿐이었다.... 내 몸짓을 잘 알아듣는 걸 보고 나는 벨 박사(전화기 발명가, 농아들의 교사)를 사랑하는 마음이 금방 싹텄다. 하지만 그때 벨 박사와 나눈 인터뷰가 내가 어두움에서 빛으로, 고립에서 우정과 동료애로 그리고 지식과 사랑으로 옮겨 가는 관문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벨 박사는 보스턴에 있는 퍼킨스 맹아학교의 교장에게 편지를 써서 나를 가르칠 유능한 선생님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아빠에게 조언했다. 아빠는 조언대로 했고,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선생님(설리반)을 찾았다는 위로의 확약이 담긴 친절한 답장을 받았다.

     

설리번은 응석받이로 자랐던 헬렌에게 극도의 인내심을 가지고 손바닥에 글씨를 쓰는 방식으로 언어를 가르치려 했다. 시작은 감동적이었지만, 헬렌과 설리번의 이후 생활이 줄곧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응석받이로 자란 헬렌은 도통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서,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드는 아이와 하루 종일 씨름을 하며 수화를 가르치던 설리번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한계를 느끼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진이 빠지곤 했다.  

    

헬렌은 심지어 설리번을 때려서 앞니 하나를 부러뜨리기까지 했으며, 애니 역시 헬렌이 지나친 행동을 할 때마다 찰싹찰싹 때려주는 것으로 대응하는 극단의 방식들이 동원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난 4월 5일, 훗날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입을 모은 사건이 벌어진다. 집 마당의 펌프가에서 헬렌이 드디어 '물(water)'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물 펌프에서 처음으로 ‘water’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에피소드는 위인전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 중에 하나이기도 한데, 헬렌은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누군가 펌프에서 물을 긷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물이 뿜어져 나오는 꼭지 아래에다 내 손을 갖다 대셨다. 차디찬 물줄기가 꼭지에 닿은 손으로 계속해서 쏟아져 흐르는 가운데, 선생님은 다른 한 손에다 처음에는 천천히, 두 번째는 빠르게 ‘물’이라고 쓰셨다. 선생님의 손가락 움직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나는 마치 얼음조각이라도 된 양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자기 잊혀진 것, 그래서 가물가물 흐릿한 의식 저편으로부터 서서히 생각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돌아오는 떨림이 감지됐다. 언어의 신비가 그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훗날 극작가 윌리엄 깁슨은 헬렌과 애니의 첫 만남에서부터 이 기적적인 깨달음의 순간까지를 극적인 에피소드로 묘사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The Miracle Worker)>(1959)이라는 희곡을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특히 1962년에 아서 펜 감독이 제작한 영화를 통해 애니 설리번 역의 앤 밴크로프트와 헬렌 켈러 역의 패티 듀크가 나란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조연상을 수상하며 격찬을 받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바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에서 충격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묘사된 헬렌의 어린 시절, 드라마틱한 부분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위인전에서 극적인 일화 베스트 3에 속할 정도의 헬렌 켈러를 상징하는 이야기는 마치 헬렌의 삶은 그 펌프가에서의 계시와도 같은 경험 이후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의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을 것 같다.      

애니 역의 앤 밴크로프트와 헬렌 역의 패티 듀크는 나란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조연상을 수상했다. (1962년)


하지만, 장애를 겪었거나 장애우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장애에 대한 현실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기대와는 전혀 다르다.     

기록상으로만 보면 이후 헬렌은 8살 때 퍼킨스 맹인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교육도 받게 된다. 6년 후에는 뉴욕으로 가서 라이트 휴먼스 농아학교를 다니고, 그 이후에는 호렌스만 농아학교를 다니는데, 이 학교의 선생인 새라 풀러가 목의 진동과 입의 모양을 만지고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헬렌에게 말하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친다. 설리번이 결코 포기하지 않는 기본을 가르쳤다면 새라는 드디어 헬렌에게 이 방법으로 말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 후 헬렌은 여동생인 밀드레드와 함께 케임브리지 여학교에 다닌 뒤 16세의 나이에 래드클리프 여대에 입학하고, 04년 졸업할 무렵에는 5개 국어를 습득했다. 이후에는 활발한 사회, 봉사활동(특히 장애인 인권 운동)을 했다.     

이런 식으로 짧게 정리하면 헬렌은 설리번 선생에게 수돗가에서 펌프를 통해 글자와 사물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후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며 장애를 극복하고 사회운동가로 거듭난 듯 보인다. 그것이 기존 위인전이나 극적인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잘못된 사례를 만들어내곤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했다. 혼자서는 뭔가를 보거나 듣고 이해할 수 없었던 헬렌은 전적으로 설리번의 도움에 의지해야만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내딛을 수 있는 처지였다. 래드클리프 재학 시절만 해도, 설리번은 강의실에서 내내 헬렌의 곁에 붙어 앉아서 손바닥 위에 강의 내용을 일일이 철자로 적어서 알려주는 방식으로 그녀의 그림자 역할을 수행했다. 신분상으로나 함께 다닐 때 설리반은 헬렌의 가정교사이긴 했지만, 본인도 대학공부를 하거나 졸업하지 못한 상황에서 헬렌을 도우면서 대학 수업 내용을 따라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설리번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굴욕감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함으로써 헬렌은 ‘천재성이 과장되었다’는 비판에 대한 확실한 반증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녀의 생계가 문제였다. 한때는 가정교사를 고용할 정도로 고생하고 노력했던 헬렌의 부모였지만, 딸이 유명세를 타면서부터는 도리어 그 후원금을 착복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헬렌은 부모의 사후에도 유산이라 할 만한 것을 전혀 물려받지 못했으며, 설리번 역시 10년 가까이 밀린 가정교사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하며 생활고에 직면하게 된다. 나아가 헬렌과 설리번 모두 후원금을 관리하거나 재무적인 문제를 대처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어서, 평생 경제적인 곤경에 시달리면서 후원자들에게 손을 벌려야만 했고, 심지어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날에도 헬렌은 공연 무대에 올라 쇼를 진행해야만 했다.     

남들 앞에 '보이는'모습에 충실해야 했던 헬렌. 도자기를 만지며 포즈를 취했다.(1962년)

언론에서는 겨우 열 살짜리 소녀를 졸지에 ‘천사’이며 ‘성녀’이며 ‘천재’로 격상시켜 버렸으며, 이런 이미지가 워낙 굳어진 까닭에 주위 사람들은 이런 전제, 또는 자신들이 상상했던 그림에 들어맞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무조건 두 사람을 깎아내리기 일쑤였다. 일각에서는 헬렌을 ‘자유의지라고는 없는 살아있는 인형’으로 혹평하기까지 했다.     


전기작가인 도로시 허먼의 표현에 의하면, 그 당시의 사회나 지금의 사회나, 장애인 중에서도 일부만, 즉 외모가 흉하지 않고,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탁월하며, 불행을 이긴 영웅에 속하는 장애인만을 선별해서 받아들이려는 성향은 그때도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설리번의 삶이 그저 단순하게 장애인이던 헬렌의 가정교사였던 것이 아님을 위인전을 통해 피상적으로 헬렌 켈러의 삶을 보았던 이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목적도 이번 글에는 분명히 담겨 있다. 실제로 그림자처럼 헬렌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된 지 오래였지만, 어디서나 탁월한 제자의 빛에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서는 설리번이 헬렌의 몸종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또는 그와 반대로 설리번이 헬렌의 주인 노릇을 하며 사리사욕을 위해 장애인을 부려먹고 있다는 소설을 써대며 모함하기 일쑤였다. 설리번의 단호하고 직선적이고 완벽주의적인 성격은 사사건건 헬렌의 가족과 후원자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과의 갈등을 빚어내면서 이런 악평과 소문을 사실처럼 견고하게 만들어갔다.

헬렌과 설리번(1898년)

그것은 설리번이 사교적이거나 정치적인 성향을 갖추지 못한 탓에, 자신이 천사나 성녀와는 거리가 먼, 어두운 성격을 지닌 복잡한 인물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고 자신의 임무나 해야 할 일에만 충실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욱 원만치 않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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