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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14. 2022

배운 대로 행하기만 해도 성현으로 추앙받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자는 본래 성현밖에 없다.

子曰: “片言可以折獄者, 其由也與!” 子路無宿諾.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반 마디 말에 獄事를 결단할 수 있는 자는 由일 것이다.” 子路는 승낙한 것을 묵힘이 없었다.     

이 장은 ‘안연(顏淵) 편’에 약간 어울리지 않는 듯, 뜬금없이 자로(子路)에 대한 공자의 평가가 등장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공자의 가르침이 제자인 자로에 대한 평가를 하기 위한 발화가 아님을 파악할 수 있다. 즉, 이 말은 자로의 평가를 빙자한(?) 공자의 가르침이 담긴 내용이라서 이 편에 실리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장에서 언급된 내용을 통해 ‘편언절옥(片言折獄)’이라는 고사성어도 나왔는데,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역시 이 장의 내용을 충분히 숙지해야만 가능하다.     

원문에서 공자가 말한 내용 뒤에 실린 마지막 문구까지 공자의 말로 삼는 현대 해설서들도 적지 않게 눈에 보이는데, 마지막 문장인 ‘子路無宿諾’은 공자가 한 말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주변 사람들의 말로 그 앞에 제시한 아래 문장만이 공자가 그를 평가한 문장이다.     


“반 마디 말에 獄事를 결단할 수 있는 자는 由일 것이다.”     


한 마디도 아니고 반 마디라고 번역을 한 ‘片言(편언)’도 그렇고 옥사(獄事), 즉 재판과 관련하여 그것을 결단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자로뿐이라는 평가이다. 그런데 이 말이 기존에 우리가 공부했던 바와 같이 자로의 성격이 급해서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않고서 제멋대로 판결을 내린다는 것인지 아니면 말을 다 듣지 않아도 사리분별이 명확하게 가능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모두 해석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장의 가르침을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앞서 설명했던 그다음에 나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붙여,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오해의 여지를 최소화한 것이다. 후술 하겠지만 뒤에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오해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다면 먼저 공자의 평가에 대해 주자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그의 해설을 살펴보자.     


‘片言(편언)’은 반 마디 말이고, ‘折(절)’은 결단함이다. 자로는 충신 하고 밝게 결단하였다. 그러므로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복종하여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은 것이다.     


이 주석은 상당히 짧지만 역사적인 배경과 자로에 관련된 충분한 배경지식이 없이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비밀(?)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원문에서도 한 마디도 아니고 반 마디의 말이라고 해석한 이 주석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의역되어 ‘어느 한쪽의 말’이라고도 번역이 되기 때문이다.


반 마디의 말이라고 하면, 말을 들어보지도 않는다는 뜻이 되고, 어느 한쪽의 말이라고 하면, 소송의 당사자인 양 쌍방의 말 모두가 아닌 어느 한쪽의 말만 듣고서도 판결을 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 된다. 다산(茶山;정약용)은 편언(片言)에 대해 ‘소송의 어느 한쪽 당사자의 말’이라는 주석을 지지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말에 대해 ‘진실 없는 자의 한쪽 말’이라고 풀이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로(子路)에 대해 생각해보자. 자로가 진정으로 솔로몬의 지혜를 가지고 있어 소송 당사자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시비(是非)를 가릴 정도로 현명한 인물이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모습을 기록했던 글은 생각나질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공자는 도대체 어떤 의미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자로가 그런 것이 가능한 인물이라고 단언했을까?     

자로의 최후를 묘사한 영화속 한 장면

그 해답의 실마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복종하여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은 것이다.’라는 주자의 주석에 있다. 이게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자로에 대한 이야기가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실려 있어 간략하게 소개한다.



소주(小邾)의 대부 역(射)가 구역(句繹) 땅을 가지고 우리나라로 도망쳐와 말했다.     


“나는 계로와 약속을 하고 싶소, 맹세는 필요 없소.”     


자로로 하여금 소주의 대부와 맹세하도록 시켰지만 자로는 거절했다. 계강자가 염유를 보내 말했다.     


“천승의 나라가 하는 맹세는 믿지 않고 그대의 말은 믿겠다는데 그대에게 무슨 욕됨이 있는가?”     


그러자 자로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저는 노나라가 소주와 전쟁을 벌인다면 감히 이유도 묻지 않고 목숨을 바쳐 성 아래에서 싸우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은 신하답지 않고 그의 말을 수락하면 이는 그를 이롭게 만드는 일이니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이 간략한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당대에 자로(子路)라는 인물에 대해 세간의 평이 어떠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만하다. 위 이야기를 알고 난 뒤 이 장의 마지막에 달린 세간의 평을 들으면 이제 당신도 왜 공자가 자로에 대해 그런 평가를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단순한 제자에 대한 평가가 아니고 깊은 울림을 갖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子路는 승낙한 것을 묵힘이 없었다.’     


이 말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로 사람들이 자로를 평했던 말의 진정한 의미를 풀어준다. 아울러 이 주석을 보게 되면 몇몇 현대 해설서에서 이 말마저 공자가 한 것으로 묶어서 해설한 행위가 왜 우매한 것인지도 확인할 수 있다.      


‘宿(숙)’은 묵혀 둠이니, 宿怨(숙원)의 宿(숙) 자와 같다. 말을 실천함에 급하여 승낙한 것을 묵혀 두지 않은 것이다. 기록하는 자가 夫子(부자)의 말씀으로 인하여 이것을 기록해서 자로가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은 이유는 그 기름이 평소에 있었기 때문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 주석에서 핵심문장은 ‘자로가 말을 실천함에 급하여 승낙한 것을 묵혀두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본래 성격이 불같이 성급했던 자로(子路)가 자신이 타고난 본성을 어떻게 수양했고 어떻게 특화했는가를 아주 잘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위에 내가 소개했던 <춘추좌전(春秋左傳)>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학도들을 위해 윤 씨(尹焞(윤돈))가 소개하며 이 장의 마지막에 나온 주변 사람들의 자로에 대한 평가가 어떤 의미인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小邾(소주)의 射(역)이 句繹(구역) 땅을 가지고 노나라로 망명 와서 말하기를 ‘만일 季路(계로)가 나와 약속한다면 나는 노나라와 맹약을 하지 않겠다.’ 하였으니, 千乘(천승)의 나라에 그 맹약을 믿지 않고 子路(자로)의 한마디 말을 믿었으니, 자로가 사람들에게 신임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자로가 한 마디 말로 獄事(옥사)를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말하기 이전에 있어서 사람들이 스스로 그를 믿었기 때문이었으니, 승낙한 것을 묵힘이 없었음은 그 信(신)을 온전히 한 것이다.”     

종합해서 정리하자면, 원문에서 말했던 한 마디도 듣지 않았던, 어느 한쪽의 말만 들었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로(子路)라는 인물이 갖춘 사람됨, 그중에서도 그가 평생을 걸쳐 수양하며 실천으로 보여주었던 ‘믿음’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반 마디의 말이든, 어느 일방의 말이든 그 상황에 대해서 들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 대해 윤 씨가 붙인 주석은 정말로 강렬하기 이를 데 없다. ‘믿음이 말하기도 전에 있어서 사람들이 스스로 그를 믿었다.’ 이 문장이 곧 자로(子路)의 수행과 삶을 드러내는 설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장의 마지막에 강조했던 승낙한 것을 묵힘이 없었다는 것도 그저 성격이 급해서 승낙한 것을 바로 행하는 것으로 보여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 배치되는 언행을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승낙을 하는 말을 하고서도 그것을 말한 즉시 행하는 일이 드물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는 말을 하고서 그것을 바로 지켰다면 자로(子路)가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바로 행하는 것만으로 이와 같은 신뢰의 아이콘으로 인정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늦게라도 그 약속을 지키고 행하기는커녕,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차일피일 미루거나 나중에는 다른 말을 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누차 이야기한 바와 같이, 자로(子路)는 솔로몬의 지혜를 갖추지도 못했고, 머리가 좋아 공부한 것을 모두 기억하고 제자들 사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지도 못했다. 앞서 공부했던 ‘선진(先進) 편’ 17장에서 공자는 그를 ‘안(喭;거칠다)’라는 한 글자로 평한 바 있다. 심지어 자로는 스승에게 들은 내용을 실제로 행하고 실천하지 않고서는 다음 가르침을 듣기를 거부하는 우직함을 보일 정도의 인물이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장은 자로(子路)라는 인물에 대한 스승의 평가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안연(顏淵) 편’에 이 장이 들어온 것은 그야말로 편집의 실수가 된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이랄 것이 없는 다혈질의 주먹을 좀 썼던 인물이 성인 공자를 만나 자신이 가진 본성을 바꾸지는 못했을지언정 그것을 어떻게 수양을 통해 완성하였는지를 고스란히 잘 보여준다.     


‘편언절옥(片言折獄)’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으니 현명한 판결을 내려야 하는 판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전에 이야기하려고 했던 이미 우리나라의 교육부를 총괄하는 장관이 된 여자와 법비 이야기에 대해서 언급할 때가 온 것 같다.     


사실 이 장에서는, 옥사(獄事), 즉 소송에 있어서의 판결을 내리는 자가 얼마나 공정하고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전제를 깔고 있다. 이것은 판사가 자로(子路)와 같이 어떤 개인적인 부탁 인맥 등을 이용하거나 금품 향응 제공해도 그것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통령실에서는 그녀를 교육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하며 “정무·사법·행정분과 인수위원을 역임해 윤석열 정부의 국정철학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기획재정부 공기업 및 준정부기관 경영평가 단장을 맡아 공공기관의 경영실적 개선의 방향성을 제시한 바 있다”라고 하며 “공공행정 전문가로서 교육행정의 비효율을 개선하고, 윤석열 정부의 교육 분야 핵심 국정과제 실현을 이끌어줄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가 그나마(?) 전공 언저리에 있는 행정안전부나 환경부 장관의 하마평이 돈 적은 있어도 교육부 장관으로 지명된 것은 모두가 의아해했던 구석이다. 굳이 이 설명을 붙인 이유는, 인사는 그 정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첫 포문이기 마련인데, 그녀를 교육부 장관으로 지명한 새 정부의 메시지는 정부 관계자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지경임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지금 이 글에서 그녀에 대한 논평을 하자는 것이 아니니 개략적인 배경 설명은 여기까지만 하자.     


대학교수이던 그녀가 음주운전을 했다.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라는 불후의 망언(?)을 남겨 누누이 흑역사 짤을 방송가에 제공하는 그 친구보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0.251%로 훨씬 높아서 면허가 취소될 지경의 만취상태였다고 한다.(당시 면허 취소 기준인 0.1%보다 2.5배 높은 수치였다.) 그렇게 면허가 취소되고 위법이 적발되었으니 양형기준에 따라 형사처벌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기상천외한 일들은 그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한다. 약식기소로 벌금형이 떨어졌는데 벌금액이 불과 250만 원이었다. 그런데 더 어이없는 일은 뒤에 이어진다. 그녀가 벌금형을 불복하며 정식 재판을 청구하였고, 선고유예라는 판결을 받아낸 것이다. 그녀가 사립대 조교수 신분이었기에 정상적이라면 학교에 통보하고 징계가 이루어졌어야 한다.

그러면 총리는 미국인을 시키면 한국과 이해관계가 없어 적임자라는 논리가 성립하나?

그런데 그녀도 자신의 교원 신분을 밝히지 않았고, 대학은 그것을 대강 넘겼다. 그녀가 250만 원의 저렴하기 그지없는 벌금액을 받은 것도 모자라 정식재판으로 선고유예를 받은 것은 전체를 지휘한 법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변호사가 잘해서 되는 게 다가 아니다. 그렇게 선고를 유예해주는 상식을 뛰어넘는 면죄부를 준 판사가 있었다는 말이다.     


판결은 법률 기법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진작에 법조문을 모두 입력한 A.I가 판사를 대신한다면 우리나라의 법조비리는 90%가 줄어들 것이다. 판결이란, 인격에 토대를 둔 인간 행위여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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