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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13. 2022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도 행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훌륭한 가르침이 없어서 바로잡히지 않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齊 景公이 孔子에게 政事를 묻자, 孔子께서 대답하셨다. “군주는 군주 노릇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하며,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하는 것입니다.” 公이 말하였다. “좋은 말씀입니다. 진실로 만일 군주가 군주 노릇을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못하고 자식이 자식 노릇을 못한다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내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이 장은 제 나라의 경공(景公)이 공자를 만나 정치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대해 답하는 내용이다. 다른 문답 구조와 조금 다른 것은 공자의 대답에 대해 경공(景公)이 자신의 이해를 부연설명으로 답하는 구조를 통해 기존의 제자들이 취했던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대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시기는,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천하를 주유하던 시기 제 나라에 머물렀을 때이다. 공자의 나이가 35살의 젊은 시절이던 노나라 소공(昭公) 25년에 노 나라에는 큰 변란이 일어난다. 노 나라 정권에 3대에 걸쳐 권력을 전횡하던 대부가문인 계손씨(季孫氏)가 있었고, 맹손씨(孟孫氏)와 숙손씨(淑孫氏)도 저마다 자신들의 권력을 참람되이 주장하고 있어 소공은 그야말로 이름만 있는 힘없는 군주였다.      


결국 소공은 기회만 있으면 계손씨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리고 벼르고 벼르던 중 그해 9월 투계(鬪鷄)에 얽힌 일을 빌미로 계평자(季平子)에게 쳐들어갔다가 도리어 삼환(三桓)의 역습을 당해 제(齊)나라로 망명하게 되는 파국을 맞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막장으로 흘러가버리게 되자 노나라는 군주도 없이 계손씨가 전횡을 일삼음으로써 큰 혼란에 빠졌다. 공자는 마침내 혼란한 노나라를 등지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제 나라로 떠나게 된다. 공자는 마흔이 되기 전이었으나 이미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일종의 학단이었다.

본래 '학단'이라하면 공자의 학덕을 흠모하여 모인 것이고 배움을 찾아온 것이라고는 하지만, 우수한 이들이 모이게 되면서 상당한 규모에 이르게 되면서 그들이 스승님으로 모시는 공자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어느 나라에서도 무시할 수 없을만한 상당한 것이어서 이미 공자는 중국 전체가 주목하는 인물로 부각되어 있었다. 이때 제 나라에 들어가 만난 경공과 독대한 것이 바로 이 장의 내용이 오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로 그 시기이다.     


굳이 이 장의 대화가 오갔을 배경 설명을 길게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공자의 사상과 정치관이 확고하게 자리잡아 무르익었을 시기와 비교해서 행간의 의미를 살펴보라는 힌트를 주기 위함이다. 마흔이 되기 전인 30대 중반의 공자가 이미 칠순이 넘겼을 때의 학문관이나 정치관의 기반을 확실하게 다졌다는 증거가 되는 내용이 바로 이 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 나라에 갔던 공자가 결국 제 나라의 경공에게 중용되지 못하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오게 되는 상황은 앞서 살펴본 ‘공야장(公冶長)편’의 16장의 주석과 뒤에 공부하게 될 ‘미자편(微子篇)’의 3장에 상세히 언급하고 있으니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더 보충하여 이 장에 등장하는 제 나라 경공(景公)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간략하게 알아보자. 제 나라는 현재의 산동성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 동쪽에 자리잡고 있던 대국으로, 임치(臨淄)를 수도로 삼고 있던 나라였는데, 경공(景公)은 기원전 547년부터 490년에 걸쳐 무려 58년동안이나 군주의 자리에 있었던 인물이다. 오랜 기간을 권좌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가 위정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갖췄다거나 업적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기록에 전하는 그의 대한 언급을 종합해 보면, 우유부단한 성격에 사적인 물욕만 강했던 인물로 모범이 될만한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자기 발로 걸어들어왔던 공자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중용하지 못한 채 시간만 질질 끌었던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주자는 이 장의 배경설명에 대한 주석으로 짧게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齊景公(제경공)은 이름이 杵臼(저구)이다. 노나라 昭公(소공) 말년에 공자께서 제나라에 가셨다.     


이 장에서 정치의 요점으로 대답한 공자의 언급은 이미 내가 앞서 몇 번이나 공부하며 언급한 적이 있던, 저 유명한 ‘정명론(正名論)’이다.       

“군주는 군주 노릇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하며,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하는 것입니다.”    

 

이 정명론(正名論)이 이미 공자의 나이 30대 중반에 정립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바로 이 장이다. 이 설명에 대해 주자는 당시 경공의 상황에 맞춰 공자가 답변했음을 다시한번 환기시키듯 다음과 같은 설명하고 있다.

    

이는 人道(인도)의 큰 법이요 政事(정사)의 근본이다. 이때에 景公(경공)이 정권을 잃어서 대부인 陳氏(진씨)가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후하게 베풀었고, 경공이 또 안에 총애하는 후궁이 많아 태자를 세우지 않아서 군신간과 부자간에 다 그 도를 잃었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이로써 말씀해 주신 것이다.     


사실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은 그 자체만으로 너무 유명해서 주자의 이 해석을 통해 이 장의 경공에게 맞춤설명으로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논어>에 등장한 모든 문답이 그러하였듯이 30대 중반의 공자는 이미 그 때에도 질문을 한 이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 그의 눈높이에 맞춘 방편설법으로 설명하여 그가 가장 깨달음을 얻기 쉽게 일러주는 방식을 취했다.     


노 나라의 군주가 도망을 나오고 군주가 없는 상태에서 대부인 계손씨가 전횡하는 것을 참다못해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 자신의 고국을 떠났던 공자는 제 나라에 도착하여 노 나라보다 더 낫다고 할만한 정황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고 실망한다. 무엇보다 제 나라의 대부는 무능한 군주보다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는 처지였고, 오랫동안 군주자리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군주노릇을 하지 못한 경공은 자신이 언제까지나 군주자리에 있으려고 사욕을 부렸는지 자신의 후사를 정해놓지도 않아 정치는 불안정하기 그지없었던 상황이었다.     

그 상황을 알고서 이 장을 다시 읽어보면, 공자의 말은 단순한 정명론(正名論)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경공에게 있어 공자의 대답은 돌직구보다 더 묵직한 ‘당신이 지금 제대로 군주노릇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어 군주가 도망쳐나간 내 고국 노나라보다도 못한 지경임을 알지 못한단 말인가!’라고 소리없는 일갈을 내지른 셈이다.     


그런데 경공은 이 젊은 저명한 학자의 설명에 자신이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며 거들먹거리듯 토를 달아, 훌륭한 말이라고 공감을 표한다. 그런데 공감을 표하는 방식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위정자인) 내가 먹을 수 없다’며 그 당위성에 대한 강한 긍정을 표한다.     


굳이 이 장을 공자의 대답으로 끝내지 않고 경공의 이러한 방식으로 끝낸 것에는 배우는 자들을 위한 보이지 않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단 이 부분에 대해 주자가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보고 그 행간의 의미를 파악해보기로 하자.     


景公(경공)이 공자의 말씀을 좋게 여겼으나 능히 쓰지 못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繼嗣(계사, 후계자)를 정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陳氏(진씨)가 군주를 시해하고 나라를 찬탈하는 禍(화)를 열어놓았다.     


주자의 설명에 의하면, 경공은 결국 겉으로만 공자의 말을 좋다고 맞장구쳤을 뿐 그 말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고, 실제로 기본적인 후사를 정하는 일조차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않아 대부가 군주를 시해하고 나라를 찬탈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였다고 강하게 성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굳이 이 장의 마지막을 공자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했는가 싶을 정도로 그저 입으로만 공감하고 실천하지 못했던 경공의 대답으로 매듭지은 것에 대한 의미를 양씨(楊時(양시))가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설명한다.     


“임금이 임금된 所以(소이, 이유)와 신하가 신하된 소이와 아버지가 아버지된 소이와 자식이 자식된 소이는 반드시 道(도)가 있는 것이다. 경공이 夫子(부자)의 말씀을 좋게 여길 줄 알았으나 그 所以然(소이연)을 돌이켜 찾을 줄은 알지 못하였으니, 그 말을 기뻐하기만 하고 그 깊은 뜻을 찾지 않는 자이다. 齊(제)나라가 이 때문에 亂(난)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이 장의 가르침은 사실 저 유명한 정명론(正名論)이 아니다. 정명론(正名論)은 배우는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진리 중의 진리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한 공자의 설명방식이 보여주는 정수일 뿐이다. 정작 이 장의 가르침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은 마지막에 제대로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입만 살아서 거들먹거린 위정자, 경공(景公)을 보여주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가르침이다.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정치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된 이래로 수많은 위정자들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지혜를 구한답시고 수많은 스승과 현자와 성인을 찾아 배움을 청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훌륭한 선생님을 못 찾아서 선정(善政)을 펼치지 못했다는 말은 동서고금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일이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결국 훌륭한 선생님에게 배워 훌륭한 위인이 있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탕자가 되었다거나 제대로 정치를 펼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산속에 숨어 혼자서 학문을 즐기는 은자(隱者)를 찾아 배움을 찾고 천하를 구하는 가르침을 달라고 하여 도움을 받으려는 행위는 본래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겠다는 마음가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가짐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가 필수적으로 갖춰져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그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강한 의지와 실천에 옮기는 실행력이다.     


거들먹거리며 있는 척하고 멋있어 보이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멋진 말에 부합하는 실천을 보여주는가하는 점은 세 치 혀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자는 이미 경공(景公)을 만나 이 대화를 나누면서 그에 대한 관찰과 면밀한 분석을 마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공이 가장 시급하게 취했어야 할 다스림의 정수를 가장 근본이 되는 것으로 설명했던 것은, 그가 그 가장 기본이 되는 것조차 갖추지 못하고 제대로 된 다스림이란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묻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함을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공자의 시대만 그러한가? 이 대화가 있은지 수천년이 지나 다른 행성으로 날아가 그 곳에서 사는 것이 상상만이 아닌 최첨단 과학의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하는 자들이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는 단 일보도 진전된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 옛날보다 더 안좋은 쪽으로 퇴보했거나 악화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추악한 민낯을 드러낼 뿐이다.     


현자에게 가르침을 구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듣고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고, 취사선택을 하려는 인간의 얄팍한 본성은 결국 올바른 가르침을 들어도 자신의 것으로 취하지 못하는 모순을 바로잡지 못한다.      


예컨대,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라는 명제에 대해 그것이 틀린 말이라고 부정하거나 비난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혹은 사회에서 잘못된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보는 그들의 시선과 태도를 보라.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자신이 긍정하고 옳은 이야기라며 공감하고 자기 자식들에게 그렇게 해야한다고 가르치던 명제를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대기업의 회사원, 지자체의 공무원, 외교부의 외교관, 검찰의 검사와 수사관, 경찰조직의 경찰, 법원의 판사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지적 수준이 떨어지거나 문해력이 떨어져서 잘못된 것에 대해 바로잡지 못한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잘못된 일에 동조하고, 그것이 세상에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서로 암묵적 동조를 해가면서 사회를 좀 먹는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너무도 허탈하게 늘 같은 대답을 목도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그 알량한 사욕(私慾)을 위해 그런 짓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행하고 있었다.

아침마다 이 글을 읽으며 인문학적 소양을 채우고 있다는 당신은 어떠한가?


진정 그들과 다르다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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