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Jul 12. 2022

어떻게 덕을 높이고 미혹(迷惑)을 분별할 것인가?

그 시작이 내게서 말미암은 것이라면 책임 또한 모두 내 탓, 아니겠는가?

子張問崇德·辨惑, 子曰: “主忠信, 徙義, 崇德也. 愛之欲其生, 惡之欲其死, 旣欲其生又欲其死, 是惑也. '誠不以富, 亦祇以異.'”     
子張이 德을 높이고 미혹을 분별함을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忠信을 주장하며 義에 옮김이 德을 높이는 것이다. 사랑할 때에는 살기를 바라고 미워할 때에는 죽기를 바라나니, 이미 살기를 바라고 또 죽기를 바라는 것이 이것이 미혹이다. 진실로 부유하지도 못하고 또한 다만 이상함만 취할 뿐이다.”     

이 장에서는 자장과 공자의 문답을 묘사하고 있다. 두 가지 개념인 덕과 미혹함에 대해, 덕을 쌓는 것과 미혹을 분별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자장이 묻자 공자가 그 두 가지를 나눠 설명하고 두 가지 개념을 정리하여 설명하고 마치 결론 격의 마지막 문장으로 정리하는 듯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논어>에는 생각보다 공자에게 질문을 했던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자장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자장이 문제가 될만한 여지가 있는 주요한 질문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자장이 그만큼 괄목할만한 학문의 성취를 거두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최소한 <논어>에서 그가 던진 질문들은 결코 가볍게 넘길만한 내용들이 아닌 것이 다수 확인된다.      

그래서 그에 대해 간략하게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자장(子張)은 공자의 후기 제자로서 성은 전손(顓孫), 이름은 사(師), 자가 자장(子張)이었다. <사기(史記)> ‘중니 제자 열전’에 의하면 그는 공자보다 48살이 어렸는데 진(陳) 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노나라의 가까운 이웃나라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자장은 공자가 외유 중 진나라에 들렀을 때 제자가 되어 노나라까지 따라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랬다면 그는 통상적으로 젊은이들이 공자의 제자가 된 연령보다 다소 어렸던 나이부터 공자의 문하에 들어왔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자장에 대해서도 남아 있는 기록은 유일하게 이 <논어>밖에 없다. 그에 대한 공자의 인물평은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모자란다”라고 했을 때의 ‘지나치다(過)’는 것과 또 다른 자리에서 말한 ‘편벽되다(辟)’는 것이 있다.


스승 공자의 이러한 평가는 뒤에 배우게 될 ‘자장(子張) 편’에 실린 두 동문들의 평가인, “내 친구 자장(子張)은 어려운 일을 해내는 데에 있어서는 유능하다. 그렇지만 아직 어질지는 못하다.(吾友張也, 爲難能也, 然而未仁.)”와 “당당하구나, 자장은! 그러나 그와 함께 어짊을 도모하기는 어렵다.(堂堂乎, 張也!難與並爲仁矣.)”에 고스란히 이어져 있다. 역사적인 기록이나 다른 일화가 없이 인물됨에 대한 평가만이 남아 있을 뿐이라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관계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자장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공교롭게도 자장을 둘러싼 이런 평가는 공자가 진나라에 있으면서 한탄하며 했던 말인, “나를 따르는 젊은이들은 과격하고 단순하여 찬란하게 기치는 세웠으나 그것을 어떻게 마름질해 나가야 할지는 알지 못하는구나!(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라는 표현과도 아주 잘 부합한다.


다시 원문으로 돌아와 보자.

먼저 덕을 높이는 방법에 대한 설명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공자의 의도를 설명한다.     


충신을 주장하면 근본이 서고, 義(의)에 옮기면 날로 새로워진다.     


이 장에서는 사실 ‘愛之欲其生’이라는 문구로 더욱 유명한 ‘미혹(迷惑)을 분별하는 법’에 대한 공자의 설명이 핵심에 해당한다.      

‘사랑할 때에는 살기를 바라고 미워할 때에는 죽기를 바라나니, 이미 살기를 바라고 또 죽기를 바라는 것’이 미혹이라 설명한다. 한 번에 이 내용이 파악될 정도로 학문의 성취를 이룬 이들이 많지 않았음에도 공자는 이런 설명을 하였다. 눈높이 교육의 방편 설법에 의거하면 자장이 이 정도 내용을 알아들을 것이라 여겨 설명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텐데 생각보다 그 행간의 의미가 얕지 않다.     


그 의미가 명확하게 와닿지 않는 이들을 위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로 명쾌한 설명을 대신한다.     


사랑함과 미워함은 사람의 떳떳한 情(정)이다. 그러나 사람의 생과 사는 命(명)이 있어서 바란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고 미워함에 따라 살고 죽기를 바란다면 미혹된 것이요, 이미 살기를 바라고 또 죽기를 바란다면 미혹됨이 심한 것이다.     


유명한 문구라고 제법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책을 낸 이가 자신의 에세이집에서 ‘愛之欲其生’을 언급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사랑은 사람을 살아가게끔 한다’라고 풀이하며, 닥친 현실에 대해 녹록지 않더라도 사랑을 동력으로 주어진 삶을 이겨낸다는 식으로 쓴 것이 생각났다. 대개 다른 사람의 말이나 글을 인용할 때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난 뒤에 쓰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고전을 인용하면서 고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어디서 주워들은 내용을 자신이 알고 있다고 여겨 그저 가져다 붙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맞다. 지금 이 경우에도 위의 원문에 봐서 알겠지만 미혹이라고 공자가 설명한 내용에 대해서 버젓이 이 유명 에세이 작가는 <논어>를 제대로 독해할 수 있는 수준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자신이 어디서 주워들은 대로 쓰고 멋대로 해석해서는 그 자신의 미혹됨을 온몸으로 실천하여 보여주었다. 아마도 밑의 캘리그래피나 글 조각 따위를 보고 그렇게 지레짐작하고 썼을지는 모르겠으나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 말은 제발 함부로 아는 척 인용하지 말자.

자공이 대답한 내용을 공자의 대답이라며 버젓이 원문을 이용하며 쓴 글이 아무리 지방 신문이라지만 버젓이 실리는 것도 이제 특이할만한 일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정도는 약과라고 할 수도 있겠다. 녹취가 너무도 간편해진 요즘은 말도 그렇지만, 글이란,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달고 출판 간행된 서적에 글로 남긴다는 행위는 당연히 증거로 남아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공자는 늘 말을 삼가라고 가르쳤다. 말을 삼갈 진대 글을 함부로 내 갈겨쓰는 것은 더더욱 할 수 없는 일임은 재차 강조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한 글을 로맨틱하기 그지없다며 여기저기 퍼다 인용하고 필사하는 이들까지 생기는 것은 잘못된 인용과 오독과 무지가 가져온 파급이 얼마나 많은 호도(糊塗)를 불러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 심각함을 개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마지막 결론 격으로 사용되었다고 설명했던 ‘誠不以富 亦祇以異’이라는 여덟 글자에 대해서는 이 장의 의미에 부합하는 것인가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논란이 있다.     


먼저 이 문구의 의미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이는 《詩經(시경)》〈小雅 我行其野(소아 아행기야)〉의 말이다. 옛 주석에 “夫子(부자)가 이것을 인용하여 살거나 죽기를 바라는 자가 남으로 하여금 살거나 죽게 할 수 없는 것이, 이 시에서 말한 것처럼 부함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남에게 괴이함만 취할 뿐임을 밝힌 것이다.” 하였다.     

이 마지막 구절에 인용된 <시경>의 구절이 이 장의 결론인 듯 포함된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각종 이설이 분분하다. 가장 대표적인 의견으로 인정받고 있는 정자(伊川(이천))는 주석을 통해 이 글의 내용이 잘못 들어간 것이라는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는 錯簡(착간)이니, 마땅히 제16편(계씨) 12장의 ‘齊景公有馬千駟’의 위에 있어야 한다. 이 아래 글에도 ‘齊景公’이란 글자가 있으므로 인하여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정자의 분석대로 이 여덟 글자를 계씨(季氏) 편의 12장 맨 앞에 붙이고, 이 장에서 빼고 나면 두 개의 장이 군더더기 없는 아주 깔끔하게 떨어지는 해석을 갖게 된다. <논어>의 편집이 잘못되었다고 지적되는 부분이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결론은 이미 책이 편찬되어 여러 학자들에게 해석으로 문제가 제기될 뿐 뚜렷한 오기(誤記)라고 판정되었거나 그럴 수는 없는 상황이다.      


원문에서 말하는 미혹됨을 구별하는 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대인들에게 다소 생소한 개념인 ‘미혹(迷惑)’이라는 부분을 명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의혹(疑惑)’정도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인데. 본래 ‘혹(惑)’이라는 개념은, 철학적 측면으로 설명하자면, ‘인간이 의도적으로 인지하거나 지각한 상태가 아닌 상태에서 범하게 되는 모순적 상황’을 의미한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개념은 바로 인지하고 있거나 지각한 상태에서 판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본능적인 것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인데, 계산하고 따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 마음이 드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모순된 상황’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혹’은 내가 생각하건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혹’이란 나의 이성적이지 않은 본능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 벌여놓은 모순에 대해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본래 누구나 혼란스러워할 수 있는 부분을 배움과 수양을 통해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감정에 휘둘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지는 모순된 상황을 만들지 않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 바로 원문에서 공자가 제시한 사례인 것이다.     


한편, 살기를 바란다거나 죽기를 바란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감정과 대비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로, 결국 자신이 상대나 그 상황에서 ‘잘되기를 바란다’는 것과 ‘잘 안되어 망하기를 바란다’는 실제적인 해석으로 파악하는 것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운 표현일 수는 있겠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감정은 논리적인 것으로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을 모순된 상황을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 이 표현을 했던 공자의 의도였을 것이라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그러한 공자의 설명을 이해한 양씨(楊時(양시))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을 정리한다.     


“당당하구나, 자장이여! 〈그러나〉 그와 함께 仁(인)을 하기가 어려웠으니, 그렇다면 善(선)에 성실하고 잘못을 보충하여 私(사)에 가리지 않은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하기를 이와 같이 하신 것이다.”     

자장과 공자

이 장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가르침이라면 아마도 ‘미혹을 분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앞에서 간략하게 미혹됨에 대해서 설명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왜 자장의 입에서 덕을 높이는 것과 짝을 지어 나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공자가 왜 어려운 철학적인 상황을 사례로 들어 설명하였는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감정이 늘 좋은 결말을 맺는 것은 아니다. 칼부림까지 하면서 끝이 지저분하고 안 좋아지는 것은 죽도록 사랑한다고 붙어 다녔던 이들에게서 벌어진다. 전혀 모르는 사이이거나 소원했던 사이에서 뜬금없이 불타는 분노나 적개심이 일어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믿고 사랑했다고 하는 경우, 그 끝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귀결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 ‘돌아버리는 상황’을 직면하곤 한다.   


누구보다 아끼고 믿고 사랑했던 이들이기에 배신이, 질투가, 그 존엄했던 존경이 이내 불타오르는 분노와 애증과 미움으로 화하여 상대에게 이르기도 전에 자신의 불태워버리고 마는 결과를 낳곤 한다.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시비(是非)를 분별하려고 배운다고 누누이 공자는 가르쳐왔다. 그런데 이 장에서의 가르침은 조금은 감정적이지만, 이 역시 공부의 이유이고 목적이라며 인간의 본질로 쑤욱 들어가 수양의 방향을 제시한다. 결국은 그 맥락은 같다. 덕을 쌓는 것이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미혹됨이 없으려면 그저 많은 것을 아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공자는 이 장을 통해 다시 역설한다.     


누군가를 믿고, 따르고, 사랑하고, 아끼고 하는 마음들은 결국 내가 결정한 것이다. 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아집으로 혹은 사욕 때문에 따랐다가 필요가 없어졌다고 잘리고 버림받고 나서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배신당했다고 분노의 불길에 사로잡히는 것 역시 자신의 공부가 부족한 것이고 수양이 부족한 것일 뿐이다. 아울러 그 얄팍한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하여 그렇게 따르고 믿던 이를 저주하고 안되길 바라고 하는 것 또한 자신의 공부가 그리고 수양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증거이자 부끄러운 성적표인 것을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이제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나이가 된 당신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찌 그들의 탓이고, 시대의 탓이랴?


매거진의 이전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 과연 상대의 잘못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