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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l 18. 2022

국민을 위해 뛰는데 권태를 느낄 틈이 과연 있을까?

사욕(私慾)을 위해서 개발에 땀나듯 뛰는 정치꾼들에게.

子張問政, 子曰: “居之無倦, 行之以忠.”     
子張이 政事를 묻자, 孔子께서 대답하셨다. “마음에 두기를 게으름이 없음으로써 하고 행하기를 忠으로써 해야 한다.”     

이 장에서는, 다시 자장(子張)이 스승에게 정사(政事;다스림)의 요체를 묻는다. 앞에서 한번 설명한 바와 같이 자장은 <논어>에서 20회나 등장할 정도로 핵심적인 질문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이 많진 않지만 <논어>에서 등장하는 언급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성향은 추정할 수 있다. 


‘위정(爲政) 편’의 18장에서는 말을 조심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받았고, ‘선진(先進) 편’의 15장에서는 그가 지나치다는 평을 스승에게 받았고, 뒤에 공부하게 될 ‘위령공(衛靈公) 편’에서는 말은 진심을 다하고 거짓이 없어야 하고 행동은 독실하고 공손해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다. 자신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자장(子張) 편’ 3장에서는 좋은 사람과는 사귀고 좋지 못한 사람은 거부하라는 자장의 말을 자장의 제자가 다시 되뇌인다. 같은 편 15장에서는 자유(子游)가 그에 대해 어려운 일은 잘하지만 아직 인(仁) 하지는 않다는 평을 남기고, 16장에서는 증자(曾子)가 그에 대해 당당하긴 하지만 인(仁)을 함께 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를 남긴다.     


이와 같은 평가를 종합해보면, 그가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에 대해 다각도로 고찰하고 분석할 수 있기에 그에 대한 사람됨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러한 종합적인 정보를 기본적으로 상기한 상태에서 이 장에서 왜 스승 공자가 다시 자장에게 “마음에 두기를 게으름이 없음으로써 하고 행하기를 忠으로써 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주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공자의 이와 같은 가르침에 대해 주자는 어떻게 해석하였는지를 살펴보자.      


‘居(거)’는 마음에 둠을 이르니 게으름이 없으면 始終(시종)이 如一(여일) 한 것이고, ‘行(행)’은 일에 나타남을 이르니 忠(충)으로써 하면 表裏(표리)가 똑같아지는 것이다.     

제법 오래전에 ‘忠’이라는 개념에 대해 한번 정리해주고 현대적인 개념인 충성(忠誠)을 떠올리지 말라고 일러준 바가 있는데 잊어버린 학도들이 많아 또 그 개념을 쥐고서 왜 이 문장에 뜬금없이 ‘忠’이라는 말이 나오나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기를 바란다.     


‘忠’이란 진심을 다해 열의를 쏟아붓는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이 장에서의 확장된 의미로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아울러 원문에서 ‘無倦’을 나는 ‘게으름이 없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하였는데 그 의미도 조금 더 명확하게 이 장에서 사용된 의미를 길어 올려보자면, ‘권태를 느낄 틈이 없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인다’는 마음가짐과 실천하려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無倦’이라는 두 글자가 갖는 의미는 쉽게 지나칠 만큼 쉽게 이해가 되는 단어는 아니다. 원문의 해석처럼 그저 ‘게으르지 마라’로 새기는 해설서들이 많은 것은 그 정도의 수준으로 이해를 마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권태를 느낄 틈이 없도록 노력하라’는 의미로 새기게 되면 과연 언제 정무를 행하는 자가 권태를 느끼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과 권태를 느끼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게으르다는 것은 천성이 그럴 수도 있지만, 노력을 하지 않는 모습을 그저 지적하는 것일 수 있지만, 권태를 느낀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공식적인 책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 그 해야 할 책무란 정치이고 그 다스림이란 백성을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      


두 가지 개념이 갖는 가장 큰 차이는, 게으름은 나를 위한 개인적인 것일 수 있으나 권태를 느낀다는 것은 다른 이를 위해 해야 할 책무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경우를 의미한다. 때문에 이 두 글자가 갖는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가가 이 장을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대한 여부를 가르는 핵심 용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장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음가짐과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나누어 마음가짐을 게으름이 찾아올 수 없도록 해야 하되, 그 마음가짐을 가지고 실천하되 ‘충(忠)’의 정신을 담아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다.     


물론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자장(子張)이 전혀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라 그런 부분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고만은 100% 볼 수 없겠으나 자장이 여러 부분에서 받았던 평가를 생각해본다면 역시 마음가짐이나 실천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장에서 주의해서 새겨야 할 부분은 자장(子張)이 그 부분이 부족했기 때문에 지적했다는 방편 설법이 아니다. 자장이 물은 핵심 용어를 자칫 간과하기 쉬운데, 이 대답은 ‘다스림’에 대해 묻고 있다는 것이다.     


공자의 대답만 보면, 이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신독(愼獨)’ 즉, 개인적인 수양과 그 노력으로 보임에 손색이 없다. 그런데 분명히 자장은 스승에게 정사(政事)에 대해 물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연관성을 찾지 못해 갸우뚱하고 있을 배우는 자들을 위해 정자(伊川(이천))는 이 장에 대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한다.     


“자장은 인(仁)이 부족하여 성심으로 백성을 사랑함이 없었으니, 그렇다면 반드시 게을러지고 마음을 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으로써 말씀해 주신 것이다.”     

상황을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자장(子張)은 막연한 것을 물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관리직을 수행함에 있어 어떤 것을 가장 중시해야 할 지에 대해 스승에 물었고, 스승 공자는 자장(子張)이 늘 부족했던 부분을 지적해줌과 동시에 다스림에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준 것이다. 


늘 설명하며 강조하는 부분이지만 <논어>도 그렇고 공자의 가르침을 어렵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공자는 어떤 의미를 숨기거나 어렵게 이야기한 적도 없다. 그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자들이 그저 어렵다는 말로 자신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감추려 있지도 않은 허상을 만들어내고 안개를 뿜어냈을 뿐이다.    

 

공자는 끊임없이 가르침의 핵심에 결국 정치가 되었든 가정이 되었든 자신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였다. 위에서 정자가 주석을 통해 자장의 부족한 점을 설명하면서 말한 ‘자장이 인(仁)이 부족하여 성심으로 백성을 사랑함이 없었다’라는 것이 결국 그의 개인적인 수양이 부족한 것이 정치를 펼치는 행위에 있어서도 문제가 되었음을 연결시켜주는 설명이다.     


정치는 궁극적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공자는 가르쳤다. ‘어떻게 정치를 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위해’ 혹은 ‘누구를 위해’ 정치를 하는가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어야하고 고민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공자의 시대에도 그랬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정치를 하는 자들을 보라. 


국정농단 사태 이후 정치는 이제 그야말로 엔터테인먼트화 되어버렸다. 망해버릴 것으로 예상했던 언론사의 케이블 방송사 진출이 ‘국정농단’이라는 희대의 떡밥을 물고 기사회생 정도가 아니라 대낮 시간에 정치를 소재로 할 일없는 노인과 여성층을 주 시청자층으로 확보하는 것에 성공했다.     


거기에 더해, ‘유튜브’라는 새로운 놀이 매체가 돈벌이가 된다는 인식의 전환으로 특별한 자본금도 없이 사람들의 어그로를 끌기만 하면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직업란에 버젓이 ‘유튜버’라고 적으며 정치 선동을 밥벌이에 이용하는 몰지각한 자들의 난입까지 이루어졌다. 그들은 전직 대통령이 살고 있는 마을에 수시로 내려가 핸드폰만을 켜고 실시간 중계에, 슈퍼 챗을 받기 위한 몸부림까지 그야말로 난장판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현장에서 정치를 소재로 선동을 일삼는 유튜버에서부터 정치를 합네 하면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거나 배지를 달고 있지 않으면서도 정치인이라는 이름으로 그 언저리에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들이 얼마나 필사적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장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나서 현재 대한민국에서 그렇게 ‘정치’라는 것을 자신의 밥벌이로 삼는 자들을 분석해 보면, 자장(子張)이 어떤 부분이 부족했기에 공자에게 이런 가르침을 맞춤으로 들었는지를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먼저 국회의원을 보자. 그들은 공식적으로 당신이 투표를 통해 당신의 권리를 위해 대신 싸워달라고 돈을 받는 자들이다. 그들이 어떤 것에 열의(忠)를 보이던가? 판사 출신이어서 자신이 사찰의 대상이었고 불이익을 받았으니 그러한 말도 안 되는 불의가 다시는 일어나선 안된다면서 국회의원 배지를 단 자들이 과연 억울한 일을 당한 지역구의 주민이나 사법피해를 입은 국민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뭔가를 했던가? 자신이 경찰 간부 출신으로 조직의 불합리에 대해 자정 해내겠다고 그렇게 목소리를 높였던 이들이 결국 자기가 속했던 조직이나 사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았던가?     

아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의 이전 직위가 전문분야인 것처럼 소속위에 배당받아 당선되기 전에 그렇게 새롭게 뜯어고치겠다고 큰소리치던 조직의 썩은 구석을 고치기는커녕, 이전 조직의 후배들과 목소리와 이익에 수위를 조절해가며 당의 목소리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하면서 붕당을 이루고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권력을 이어갈까를 고민하고 안달복달하며 비례나 초선인가 싶을 정도로 배지를 달고 썩은 고인 물 행세를 하는 이들보다 훨씬 더 그들스럽게 군다.     


한번 그렇게 국회의원을 했거나 국회의원 배지 한번 달아보겠다고 그 언저리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자들은 또 어떠한가? 법비였고, 교수였으며, 전직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은 결코 권력의 단맛을 잊지 못하고 방송가를 전전하며 자신의 인지도가 떨어지고 잊혀질까 싶어 목숨 걸고 케이블 방송까지 나와서 되는 말 안 되는 말 떠들며 예능인(?)을 자처한다.     


최근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연일 떠들어대는 빨간당의 당대표 징계 논란과 관련하여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보고 있다가 어이없는 상황을 목도하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국회의원 한번 당선되지 못한 당대표라는 자가, 자신은 혁신할 생각 없이 살아남겠다고 당의 혁신을 입에 담으며 최고위원들과 동반사퇴를 통해 비대위를 꾸리게 되면 당대표의 지위와 상관없이 비대위원장을 할 수 있다는 꼼수를 계획하다가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던 것은, 국민들의 눈높이는 고사하고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너무도 어린 나이에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는 그가, 당대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꺼낸 꼼수가 수포로 돌아가게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최고위원이라고 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최고위원직을 내놓을 수 없다고 저마다의 셈법으로 거부의사를 명확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더 기가 막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읽을 수 있다. 지금 빨간당의 최고위원을 하는 자들을 보면, 국회의원직을 가지고 있는 자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도 적지 않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다니길래 최고위원직을 달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그들을 최고위원으로 뽑아주었는지를 살펴보면,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도, 도저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기상천외한 구도를 볼 수 있다. 


국회의원 신분이면서 최고위원직을 하는 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안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진다는 미명하게 2년 뒤에 있을 선거에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싶거나 비례대표 출신이라 정치적 인지도나 지명도가 낮아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각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기 위한 디딤돌이 바로 그 최고위원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회의 때마다 최고위원이랍시며 당대표나 원내대표의 곁에 앉아 언론에 노출되는 모습을 즐기는 것을 보면 그들의 그 얄팍한 계산법은 투명하다 못해 훤히 들여다보인다.     

파란당은 다르냐고? 이제 최고위원을 다시 뽑는다고 술렁거리는 파란당에 최고위원에 나서겠다고 하는 자들을 보라. 친명이 어떻고 친문이 어떻고, 확연한 당파 권력싸움을 아예 대놓고 하는 듯하면서도 무엇보다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2년 뒤에 있을 총선에 자신이 다시 국회의원 배지를 달 수 있는 인지도를 유지하고 계속해서 언론에 노출되며 정치인으로서 뭔가 하고 있다는 식의 정치 마케팅을 계속해서 할 뿐이다.     


이른바 ‘절친 형님 동생’이라고 너스레를 떨던 윤핵관의 핵심 커플이 점심식사 한번 같이 했다고 그 앞에 가서 카메라와 마이크를 대며 그것을 취재라고 부르는 기레기들 역시 그들의 부화뇌동에 한몫 거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악어와 악어새의 퍼포먼스이다. 그날, 기레기가 언제 다시 둘이 식사를 하느냐는 우문을 하자, 두 사람은 예정된 식사 약속이 너무 많아 다음을 기약하기 어렵다고 우답을 하는 것을 듣고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 식사 약속에 혹은 술 약속에 함께하는 자들이, 그들과 권력을 함께 향유하려 줄을 대는 자들뿐이라면, 그들이 정말로 국민을 위한다는 본래의 의무를 수행하느라 권태를 느낄 틈이 없었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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