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Jul 19. 2022

자신의 생각을 객관이라는 이름으로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

소인이 하는 것이 바로 ‘내로남불’이라는 공자 설명 버전

子曰: “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 남의 악함을 이루어주지 않으니, 小人은 이와 반대이다.”     

사실 이 장의 바로 앞장 하나를 건너뛰었다. 그 내용이 ‘博學於文, 約之以禮’라고 하는 것인데 이미 ‘옹야(雍也) 편’ 25장에 나와서 공부를 한 바 있고, ‘자한(子罕) 편’ 10장에도 비슷한 구절이 실려 있다. 그래서 공부한 내용을 생략하고 그 다음장이 이번 장으로 넘어왔다.     


이 장은 다시 군자를 설명한다. 방식은 전에 설명했던 바와 같이 반대 개념인 소인과의 대조를 통해 군자가 어떤 것을 하고 어떤 것을 하지 않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한다. 내용은 간단하다. ‘군자는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善)을 꾸며주되 악(惡)을 꾸며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배우는 자들에게 금과옥조(金科玉條)와 같은 말이고 새겨둬야 할 부분이라서 인지 <명심보감(明心寶鑑)> ‘존심 편(存心篇)’에도 실려있는 구절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철학적인 이야기를 꺼낼 것이 많은 관계로 이야기가 확장되기 전에 원문의 이야기를 주자가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成(성)’은 이끌어 주고 권장하여 그 일을 이루는 것이다. 군자와 소인은 마음에 둔 것이 이미 厚薄(후박)의 차이가 있고, 좋아하는 것이 또 선악의 다름이 있다. 그러므로 그 마음씀의 같지 않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좋게 이끌어주는 방식이 칭찬에 있는지 비난에 있는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스승의 입장에 되거나 다른 사람을 일깨워주는 입장이 되었을 때 칭찬만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가 공감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도 없는 칭찬이나 영혼 없는 격려로 군자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은 당연히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주자의 설명에서 말하고자 했던 군자와 소인의 마음씀이 차이가 있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곰곰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먼저 앞서 후술 하겠다고 했던 이 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철학적인 선(善)과 악(惡)의 개념에 대해서 반대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뜬금없이 선과 악의 반대 개념이라고 하니까 반대되는 개념을 말하면서 무슨 반대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할 학도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바로 설명하자면, 선(善)의 반대 개념은 악(惡)이 아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선(善)의 반대 개념은 ‘불선(不善)’이다. 말 그대로 선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악(惡)은 선의 반대 개념이 아닌 독립된 전혀 다른 개념이다. 예컨대,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은 선행이지만, 악행(惡行)은 선행의 반대말이 아니다.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이 선행의 반대 개념이다.      


선악의 개념은, 굳이 논리학이나 철학적을 끌고 설명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아주 단순 명료한 개념임에도 사람들이 혼동하고 정반대의 개념으로 생각하게 된 많은 잘못된 개념 중의 하나이다. 누구나 선과 악이 반대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옆의 사람에게 묻고 당신의 무지(無知)를 확인하고 싶어 하기 전에 당신이 <노자(老子)>를 읽고 그 개념을 먼저 바로잡기를 권장한다. <노자(老子)>의 제2장 구절에는 다음과 같이 선과 악을 설명한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惡已. 皆知善, 斯不善矣.”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고만 알고 있으나 실상 그것은 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선을 선이라고 알고 있으나 실상 그것은 불선(不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것이다. 대표적으로 아름다움과 추함은 주관적인 것이다. 절대적으로 모두에게 아름다운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추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기가 어렵다. 선과 악도 절대적이기에 앞서 충분히 주관적일 수 있다. 악당에게는 자신들이 행하는 행동이 절대선이고 자신들을 방해하는 것이 악일 수 있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개념으로,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악당 보스를 따라다니는 노란 미니언즈가 사람들에게 귀엽다고 사랑을 받는 것도 그렇고, 할리우드 영화에서 어느 시점부터 멋진 빌런이 주인공만큼이나 강력하고 주목받게 된 것도 모두, 사람들의 인식과 개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보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 부르고 악이라 부를 뿐의 개념은 그것이 절대적인 개념으로 못 박듯이 새겨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 선의 반대가 불선임을 알았으니 다시 원문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다른 사람을 잘 되게 해 주기 위해서 잔소리나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설명을 앞서 간단히 하였다.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리기 마련이고, 아무리 좋은 조언도 계속하게 되면 듣는 사람은 피하고 별로 좋게 여기지 않기 마련이다. 인간의 본능이 그렇기에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선한지 불선한지 역시 받아들이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과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조언을 하는 사람이 모두 다른 입장으로 다른 생각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공자는 무슨 기준에서 군자란,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 남의 악함을 이루어주지 않는다고 한 것일까?     


현대 해설서에서 쉽게만 번역하고 그저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좋은 얘기를 해주고 헐뜯지 않는 것이 군자라는 식의 뻔하고 구태의연한 해석은 공자가 본래 이 장에서 이야기하려는 형이상학적인 심오한 철학을 형이하학적인, 수준 낮게 그저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의 방식으로 이해한 것뿐이다. 내가 굳이 복잡하지도 않은 이 짧은 문장을 해석하는 데 있어 철학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을 소개하고 노자의 도덕경까지 소개한 것은 이 장의 숨겨진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고자 하는 사전작업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의 해석을 다시 한번 잘 곱씹어 읽어보라. 방점은 ‘남’이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가 아니고 사회적인 인식에 맞춰서가 아닌 ‘남’의 아름다움을 이뤄주고 ‘남’의 악함을 이루어주지 않은 것이다.      


물론 현대 해설서에서 그저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도 객관적으로 ‘틀리다’고 할 것은 아니다. 선하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돕고, 나쁘고 안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돕지 않는다라고 설명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바다를 설명하면서 ‘파랗고 시원하며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바다에 대한 설명이 틀리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설명을 듣고서 바다에 대해서 알았다고도 설명할 수 없으니 지금의 이 설명은 보다 깊이 있는 사고를 위한 설명방식을 위한 공부라고 여겨두고 본인의 사고를 확장하는 방식을 연습하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듯싶다.     


원문에서 ‘남’에 방점이 있다고 한 것은,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상대방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선하지 않은 것’이 아닌 ‘악함’이라고 여긴 것은 남의 악함이기는 하지만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두 가지이지만 이 원문은 양방향의 입장 차이를 철저하게 구분하여 말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때문에 이 심오한 방식의 논법을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 눈높이를 맞추되, 그의 언행이나 태도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내가 느끼는 눈높이가 된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내가 편협하지 않고 제대로 시비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배움을 강조한다. 뭘 제대로 알아야 판단을 하던 판결을 하던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은 지식을 배우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그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가치관을 완성하고 다른 사람의 악함을 판단할 수 있도록 다양한 경험과 능력을 갖추도록 요구한다.     


그 경험과 능력을 갖춘다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끊임없는 생활에서의 실천을 통한 수양을 의미한다. 그저 책에 있는 지식을 머릿속에 넣고 달달 외우기만 하는 것이 실제 생활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이유가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을 자신의 사욕을 위해 자리를 탐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 자신보다 부족한 이들을 돕거나 공직에 나아가 백성을 위해 그 지식과 경험을 쓰기보다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쓰는 경우가 워낙 허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장에서의 가르침은 수천 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정치계에 아주 정확한 비슷한 용어로 대체되어 설명할 수 있다는 웃픈 상황이 발생한다. 바로 한국의 정치계에서만 한정된 유행어로 ‘내로남불’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장의 상대적인 가르침은 사실 모든 군자가 되고 싶어 하는 배우는 자들에게 교훈이 되겠지만 늘 그렇듯이 위정자들에게 필수적인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정치하는 사람만큼 다른 이들을 위하고 다른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직업도 없다. 다른 사람들이 뽑아주지 않으면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평가되며 다른 위정자들과 끊임없이 비교를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의 아름다움’은 앞서 말한 것처럼 내가 보이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빨간당 파란당의 붕당정치를 하는 정치인들을 보라. 여의도에 기생하는 그들의 행동은 이 장에서 공부한 상대적인 가치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참담하기 그지없다.     


철학을 공부하고 동양고전을 가르치는 것으로 일반인들에게 유명했던 교수가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그가 평생에 먹지 않아도 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전공을 설명하고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통해 사회적으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할 때만큼 사람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가 욕을 먹게 된 이유는 하나였다. 그가 정치논객이나 쓴소리를 하는 사회조직에서의 장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특정 붕당의 한 정치인의 지지자를 표방하며 마치 그의 멘토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그의 정치활동에 대해 개인적으로 힐난하거나 성토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동양고전을 전공으로 하고 공부를 했다고 하는 그 역시도 그 지경이니, 제대로 공부를 하지도 않고 그저 정치를 먹고사는 밥벌이로 여기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얼마나 더 하찮은 개념일 것이며 그렇기에 그들이 결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의 악함을 판단함에 있어 ‘객관적’이기는커녕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혹은 자신의 재선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정도로 판단을 하게 되니 그것이 더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라 지적할 수밖에 없다.      


남의 아름다움을 이뤄주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권력도 아니고 돈도 아니다. 그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들어준 뒤 그가 원하는 방식의 완성을 도와주는 것이다. 또 남의 악함을 판단함에 있어 자신의 사욕(私慾)과 관련하여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기준으로 삼는 순간 그것 자체가 추하고 악한 모양새 그 자체가 되어버리고 만다.     

최근에 뉴스인지 엔터테인먼트용인지 모를 케이블과 뉴스 시간에 떠들어대는 정부에서 문제시 삼고 있는 두 가지 이슈를 접하면서 이 장의 가르침이 떠올랐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서해에서 탈북한 것으로 판정된 공무원의 사망사건과 뜬금없이 튀어나온 북한 어선에서 살인을 저지른 이들에 대한 강제 인도절차에 대한 문제 제기가 바로 그것이다.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은 뉴스를 통해서든 신문을 통해서든 그 이슈에 대해 명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지도 않고 그저 카더라에 휩쓸려 저마다 의미 없는 추임새를 곁들이고는 한다.     


늘 <논어 읽기>를 통해 공부하면서 강조하지만, 우리 사회의 어떤 작은 일이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건이든 사실관계에 입각하여 명확하게 사안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며 문제가 되는 일이다.     

험악한 북한 살인범을 우리 사회에 함께 살게하는 것은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라고 인터뷰했던 당시 빨간당 정보위원장

그 사건을 처리하던 당시 빨간당에게 정보를 감춘 것도 아니고, 그들이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으로서 활동을 못한 것도 아니다. 그들이 정권을 잡고 있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도 아니고, 그저 그 당시에 그들이 직무유기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 커밍아웃을 하는 것뿐이다. 지금 언론에 떠들어대고 있는 기레기들이나 공안검사를 비롯한 검찰이라고 하는 자들 역시 그때 어디 틀어박혀 감금되어 있던 것이 아니란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국민을 위해 뛰는데 권태를 느낄 틈이 과연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