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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01. 2022

도둑 걱정 말고 더 큰 도둑질하는 자신 먼저 돌아보라.

지지율이 떨어져도 국민 기대에 부응한다는 헛소리하는 자들에게.

季康子患盜, 問於孔子, 孔子對曰: “苟子之不欲, 雖賞之不竊.”     
季康子가 도둑을 걱정하여 孔子에게 (대책을) 묻자, 孔子께서 대답하셨다. “진실로 그대가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비록 (도둑질하는 자에게) 상을 주면서 도둑질하게 하더라도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다.”     

앞 장에 등장했던 계강자가 다시 공자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혜안을 구하려 드는 모습이다. 그런데 앞장에서 조금 완곡하고 묵직했던 답변이 이제는 훨씬 더 무게를 더한 철퇴로 직접적인 그의 변화를 촉구하며 매번 말로만 물으면서 실천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일침을 가하고는 가르침이다.     


이전에 설명한 바와 같이 계강자는 당대 최고의 실권자였다. 아무리 선생님이라 부르며 예의를 갖추고 의견을 묻더라도 공자의 이런 돌직구는 앞 장에서 공부했던 완곡한 자신부터 제대로 하면 모든 것이 바르게 된다고 설명하는 약간 강한 바른말보다 수위를 한참 넘어 있는 모습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일단 주자의 해설을 확인하고 나서 다시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그대가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비록 백성들에게 상을 주면서 도둑질하게 하더라도 백성들이 또한 부끄러움을 알아서 도둑질하지 않을 것’ 임을 말씀한 것이다.     


오히려 주자의 해설도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풀었을 뿐, 다른 의미를 찾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지 주자의 해설에서 원문에 없는 것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바로 위정자가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위정자가 탐욕을 부리는 것과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호씨(胡寅(호인))는 주자의 설명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당시 시대상과 공자가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님을 배우는 자들에게 상세히 설명해준다.     


“계씨는 정권을 도둑질하고 강자는 嫡子(적자)를 빼앗았으니, 백성들이 도둑질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었다. 어찌 그 근본을 돌이키지 않는가. 공자께서 탐욕을 부리지 말라는 말씀으로써 啓導(계도) 해 주셨으니, 그 뜻이 깊다. 적자를 빼앗은 사실은 《春秋左傳(춘추좌전)》에 보인다.”     


공자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실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일화가 있다. 




계씨 가문이 노나라의 실권자 가문이 되었던 즈음, 계강자의 고조부 계무자가 당시 법무부 장관 격인 사구(司寇)였던 장무중(臧武仲)을 다음과 같이 질책하였다.     


“도대체 왜 도적을 단속하지 않는가?”     


그러자 장무중(臧武仲)은 당당한 태도로 오히려 도적이 들끓는 원인 제공자로 계무자를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귀하께서 바깥의 도적을 불러 성대하게 예우를 하는 판에 무슨 수로 나라 안의 도적을 막겠습니까?”     


이렇게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장무중(臧武仲)이 누구인지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노나라의 장씨(臧氏) 가문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노나라에서 장씨(臧氏) 가문은 유명한 삼가(三家)와 더불어 매우 중요한 가문이었다. 시조라 할 불리던 인물이 노나라 제14대 군주 혜공(惠公)의 동생 장손구(臧孫彄), 즉 장희백(臧僖伯)이었다. 세 대부 가문의 시조라 할 삼형제는 혜공의 손자이자 환공(桓公)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혜공의 동생인 장희백(臧僖伯)은 삼가(三家)의 시조 경보(慶父)나 숙아(叔牙), 계우(季友)에 비하면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라 장 씨 가문은 삼가(三家)보다 훨씬 유서 깊은 집안이라 할 수 있다. 위 주석에서 언급된 <춘추좌전(春秋左傳)>의 기록에 의하면 이 집안은 노나라의 대부로서 주로 사구(司寇)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논어>에 제법 등장하여 지혜로운 인물로 언급되면서도 사치하고 자기과시하는 측면이 있다며 공자의 평가를 받은 장문중(臧文仲)이 바로 장무중(臧武仲)의 할아버지이다.      


그런 꿇릴 것 없는 전통을 가지고 대대로 법무무장관직을 이어온 가문이었으니 아무리 계무자가 당대의 권력자라 하더라도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기개가 있을 만도 했던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위의 대화가 오고 가게 된 배경은 대략 이러했다.     

노나라의 인접국 중에 ‘주(邾) 나라’라고 하는 소국이 있었다. 주 나라의 대부였던 서기(庶其)가 칠(漆)과 여구(閭丘)라는 땅을 가지고 노나라로 망명하였는데 계무자가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며 군주의 고모뻘이던 여인을 부인으로 삼게 해 주고, 그를 따라온 종자들에게도 크게 포상하는 일이 있었다. 그 사실이 도의에 맞지 않다고 장무중을 비롯한 바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불만이었다. 그런데 마침 노나라에 도적들이 들끓고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이에 계무자가 장무중이 자신의 업무를 태만히 한다면서 질책하자 위의 살벌한(?) 날 선 대화가 오가게 된 것이다.     


장무중의 생각엔 명색이 실권자로서 집정 대신을 하면서도 자기 나라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온 큰 도적놈에겐 왕실의 여인을 하사하고, 버금가는 도적에겐 노비와 집을 하사하였고, 그다음 도적에게는 화려한 의복과 장신구를 내리면서 자신에게는 좀도둑을 잡지 않는다고 하니 말이 안 되는 지경이 도저히 묵과할 정도를 넘어섰다고 본 것이다.     


이제 이 장의 공자의 말이 그저 칠순을 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노인네의 객기가 아님을 명확하게 이해하겠는가? 공자 역시 잠시이긴 했지만, 노나라에서 사구(司寇) 벼슬을 맡아 제대로 된 정치를 펼쳐보고자 하는 뜻을 품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결국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공자는 벼슬을 그만두고 심지어 자신의 조국인 노나라를 떠나는 처방을 내리고 천하를 주유하기까지 하였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자신의 꿈이 있고 이상이 확고했으며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자부했던 시기도 있었을 것이다. 앞의 공부에서 전술했던 바와 같이 이미 공자의 공부와 이론적인 바탕은 30대 중반에 완성되어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이론적인 지식 기반을 통해 그는 이제 세상에 그것을 적용하기만 하면 잘못 돌아가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에 차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포부로 가득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칠순이 다 되도록 천하를 주유하여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위정자를 만나지 못하였고, 겨우 제자의 추천으로 고국으로 돌아와 칠순이 넘도록 등용되지 못하였고, 이루어놓은 것 하나도 없이 죽음을 준비하는 나이에 이르렀다. 자신의 피 같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야만 했고, 자신을 대신하여 도통(道統)을 이어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제자가 먼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 고국의 실권자라는 자가 묻는다, 나라에 도둑이 들끓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한심했을 것이다. 아니, 화가 났을 것이다. 이 장에서 공자의 말이 조금 과도할 정도로 날이 서 있는 이유는 위의 설명한 배경에 의거한 것이자, 크게 두 가지 이유이다. 하나는 그렇게 묻고 대답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정말로 그 근본적인 원인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습관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그 답답함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으로 그렇게 말해줘도 어차피 듣지 않는 그의 실천하지 못하는 뻔뻔함 때문에 호된 죽비를 내려치게 된 것이다.      

뻔한 내용이라 그저 스쳐 지나가며 읽었던 원문을 다시 꼼꼼하게 들여다보자. 공자의 설명에 의하면, 도둑들에게 상을 주면서 도둑질을 하라고 해도 도둑질을 하지 않게 될 가장 기본적인 핵심 개념으로 ‘탐욕’ 때문이라고 보았다. 조건절을, ‘위정자가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이라고 한 것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논리적으로 정리하면 그와 같은 결론이 나온다.     


‘탐욕’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위정자의 탐욕과 도둑들이 들끓는 것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저 막연히 위정자가 탐욕스럽기 때문에 위에서 그러니 나도 그래도 된다고 그렇게 도둑이 많아지는 것이라고 보고 반대로 위정자가 탐욕을 보이지 않으면 주자의 주석에서 설명했던 대로 도적들을 포함한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이 부분에서 중간 과정의 다양한 단계가 생략되었다고 본다. 사실 위정자가 올바른 언행을 보이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공자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나라가 바로서기 위해서는 가정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가르침의 기본 중의 기본이 바로 그것의 증명에 다름 아니다.     


나라를 다스리느라 가정에 소홀해서 자식이 범죄를 저지르고 능력 안 되는 자식을 편법으로 의사를 만들고 법조인을 만들겠다고 의전원이나 치전원에 넣고, 로스쿨에 넣는 것이 일반화되는 순간, 사람들은 저들도 그렇게 하는데 우리도 돈 벌고 그 위치에 올라가 그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니 바르지 않은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가 아니라 나도 돈 있는 교수이고 국회의원이며 법조인이라면 내 자식에게 그렇게 해줄 텐데 내가 지금 그렇게 해줄 수 없는 위치이기 때문에 어차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저들이 하는 것에 대해 배 아파하고 억울해하는 차원에서의 분노가 ‘국민여론’이라는 것이다.     

공자가 궁극적으로 지적하고 했던 것은, 위정자, 한 사람의 탐욕이 없어지는 것만에 그치는 것이 아닌 연쇄 파급 효과를 생략하여 이미 누차 강조했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논리를 역설한 것이다. 위정자가 자신부터 본보기를 보이고 탐욕으로 올바르지 못한 신하들을 엄벌에 처한다면 그 밑에 있는 자들은 당연히 자신의 탐욕을 위해 공공연하게 벌이던 짓을 꿈도 꾸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궁극의 정치이자 본보기의 정치이다. 위정자가 시작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명료하다. 자신이 탐욕으로 잘못된 행실을 보이지 않음과 동시에 그렇게 하는 이들을 엄벌에 처한다면 실천이 뒤따르게 된다.     


입으로는 바른 것을 추구한다고 떠들어대면서 정작 자신의 탐욕을 위해 ‘법적으로만’ 문제가 되지 않으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식으로 넘어가려는 위정자들의 행동은 오히려 부패가 빠르게 진행되도록 덮개를 덮어 촉매제 역할을 할 뿐이고 그것은 언제가 더 심각하게 불거져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될, 생명에 지장이 갈 수준까지 치명적인 모럴해저드를 배태하고 만다.     

1970년에 발표되어 숱한 화제를 뿌리며 당대 지식인들에게 경종을 울렸던 김지하 시인의 담시(譚詩) <오적(五賊)>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이두식 한자로 표기했지만 그 당시의 오적이라고 지목된 존재들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위직 공무원, 군 장성, 장차관이었다.     


공자의 지적이 있어온지 이미 수천 년이 지났고, 대한민국에서 김지하라는 시인이 지적한 구체적인 썩은 부분이 언급된 지 무려 50년이 훌쩍 지났다. 당신이 보기에 그 오적이 달라지거나 변했나? 아니다. 그 오적은 이 장의 우려와 마찬가지로 재벌 2세와 3세로 확장되어갔고, 국회의원의 자식과 가족, 보좌관등으로 퍼져나갔으며, 지자체 공무원과 그 아래 9급 공무원이 거액의 돈을 횡령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장관직 청문회에 등장해서 그 오래된 악행과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부끄러운 민낯을 모두 드러내면서까지 그 정도 개망신을 감수하면서라도 장관직을 평생에 한번 달아보겠다고 줄을 서는 국회의원, 교수, 법조인, 의사 출신들의 인물들이 구더기처럼 그 아래에서 드글거리고 있다. 임명직이라는 차관이라는 이들은 결국 정권이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자기 조직 내에서 편당(偏黨)을 이루어 자신의 사욕(私慾)과 정비례하는 방향성을 영점 조준하여 끝없는 탐욕을 위해 기어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국민에 지지율이 상대보다 높았다는 이유로 선택된 정권이 국민들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유례없는 바닥을 향해도 자신들이 가는 방향대로 할 뿐이면서 ‘국민만 보고 간다’라고 한다. 그 외계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오직 나 한 사람뿐인가?        




400여일간의 쉼없는 연재일중 처음으로 열흘정도 휴재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변변찮은 글이라 많은 분들이 기다려주셨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글을 시작할 때부터의 마음을 기억하며 아직도 수양이 부족한 나 자신에게 해주는 가르침이고 공부였음을 상기합니다.

아침마다 함께 공부해주며 걸어가주는 학도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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