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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02. 2022

적당한 때 부는 바람은 풀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바람은 결코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

季康子問政於孔子曰: “如殺無道以就有道, 何如?” 孔子對曰: “子爲政, 焉用殺? 子欲善而民善矣. 君子之德, 風; 小人之德, 草. 草, 上之風, 必偃.”     
季康子가 孔子께 政事를 묻기를 “만일 無道한 자를 죽여서 道가 있는 데로 나아가게 하면 어떻습니까?” 하자, 孔子께서 대답하셨다. “그대가 政事를 함에 어찌 죽임을 쓴단 말인가. 그대가 善하고자 하면 백성들이 善해질 것이니, 君子의 德은 바람이요 小人의 德은 풀이다. 풀에 바람이 가해지면 풀은 반드시 쓰러진다.”     

이 장은 다시 계강자가 정치를 묻는다. 그런데 이번엔 계강자의 말이 더 날이 서 있다. 무도한 자를 죽여서 도가 있는 데로 나아가게 하면 어떠냐고 묻는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이미 죽여버린다면 도가 있는 데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죽은 자를 도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의문을 잠시 뒤로 미루고 공자의 대답에 집중해보자.      


여기서 그 유명한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라는 비유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 비유보다 훨씬 더 집중해서 봐야 할 것이 있다. 이 장에서의 핵심 용어는 이 비유가 아니란 말이다. ‘어찌 정치를 함에 있어 죽임을 사용하냐’며 꾸짖는 말이다. 이 말은 앞서 의문이었던 무도(無道)한 자를 죽여 도(道)로 나아가게 한다는 의문의 해답이기도 하다.      


‘사람을 죽인다’함은 폭정을 의미한다. 그 폭정은 공포의 정치이고, 공포의 정치는 백성들에게  폭압을 사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얻어내는 것을 계강자(季康子)는 도(道)로 나아가게 한다는 뻔뻔한 설명으로 대신한다. 그래서 공자가 그가 말하는 설명이 모순되었음을 먼저 말하지 않고, 다스림에 대해 물었으니 다스림은 죽임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한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공자의 의도를 풀이한다.     


政事(정사)를 하는 자는 백성들이 보고 본받는 바이니, 어찌 죽임을 쓰겠는가. 〈政事(정사)를 하는 자가〉 善(선)하고자 하면 백성들이 선해지는 것이다. ‘上(상)’은 一本(일본)에는 尙(상)으로 되었으니, 加(가)한다는 뜻이다. ‘偃(언)’은 쓰러짐이다.     


공자의 설명은 앞서 계강자에게 일러주었던 조언과 맥락을 똑같이 한다. 위정자가 원하는 모습이 있다면 그 모습을 먼저 본보기로 보이면 된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그 말을 단순히 앞에서와 같이 직설적으로 하지 않고 군자와 소인의 덕으로 빗대어 설명한다. 여기서 그 비유를 그대로 읽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또 의문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 나온다. 소인에게 과연 덕이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해야 초급은 벗어난 수준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의 군자와 소인은 앞에서 대척점으로 설명하던 군자와 소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중급에는 도달한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고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겨도 될 정도는 된다고 하겠다. 물론 군자를 위정자로 보고, 소인을 단순히 백성으로 보는 이분법식의 사고도 문제가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부분은 군자와 소인의 비유와 그 안에 군자의 덕과 소인의 덕으로 그리고 다시 그것을 바람과 풀로 세 번에 걸쳐 꼬이고 꼬인 비유를 거친 후, 그 풀이 바람이 가해지면 반드시 쓰러진다는 총체적인 비유로 마무리된다.     


당연히 쉽게 새길 수 있을만한 내용이 아니다. 이 어려운 비유의 향연이 이루어진 장에 대해 윤 씨(尹焞(윤돈))는 앞서 이 장의 ‘키워드’라고 말했던 죽임으로써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문장에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인다.     


“죽인다는 말이 어찌 인민(人民)의 윗사람 된 자의 말이겠는가. 몸으로써 〈백성을〉 가르치는 자는 백성들이 따르고, 말로써 가르치는 자는 백성들이 다투니, 하물며 〈백성을〉 죽임에 있어서이겠는가.”     


이 주석은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을 아주 잘 요약하여 설명한다. ‘몸으로써’, 즉, 솔선수범으로 보여주면 백성들은 따르지만, ‘말로써’ 즉, 입으로만 도덕군자 인척 하고 백성을 위하는 거짓 위정자인 척해봐야 백성들은 그것을 이미 알고서 따르지 않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투고 혼란을 야기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무리 문장이 방점을 찍는다. ‘하물며 죽임이라니’. 그것은 혼란을 야기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가는 길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죽이는 것, 즉, 강압적인 방법으로 한다는 것은 반대로 자신은 절대 솔선수범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강압적으로 하는 것은 그저 솔선수범을 보이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악이고, 악화를 반복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 장을 읽을 때면, 한때 문학을 좀 접했다고 하는 이들이라면, 그리고 시에 대한 감성과 시대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떠오르는 시인과 시가 있을 것이다. 맞다. 1968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풀>이라는 시를 발표한 시인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이다.     


내 브런치에 아직까지 시는 연재하지 않고 있으니 그의 시 전문을 여기 옮기는 것으로 대신해본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장을 읽고 이 시를 읽으니 어떠한가? 시인 김수영이 <논어>를 읽지 않고 이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이 시를 썼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시인 김수영이 이 장의 문구를 읽고서 거기서 영감을 얻어 지은 시라고 해설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지 않은가 말이다.     


이 시가 쓰인 60년대 말의 군부독재 정권의 삼엄했던 시대 정서에 빗대어, 운동권의 식자들은 이 시에서 등장하는 풀을 억압받는 민중으로 보고 바람을 민중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로 비유한 것이라 보았다. 이 장의 비유와는 한참 멀어지고 만 해석이라 하겠다.     


물론 이미 ‘민초(民草)’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백성들을, 사람들을 풀에 비유하는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생각이고 의식이었다. 이 장의 공자가 처음 풀로 백성들의 속성을 비유한 것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사람의 생각이, 그리고 인식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본래 이 장에 등장한 공자의 비유는, <서경(書經)> 주서(周書) 군진편(君陳篇)에 인용된 ‘너는 오직 바람이고 아래 백성은 오직 풀이라(爾惟風 下民惟草)’는 주공(周公)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시 이 장의 비유로 돌아와 보자. 군자의 덕이 바람인 것은 바람이 부는 대로 풀이 눕고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지 바람이 풀을 억압하거나 억지스럽게 바람이 원하는 대로 이끌기 때문이 아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풀이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며 바람이 강하게 분다고 해서 풀이 자신의 본성을 꺾고 계속 눌려 있는 것 역시 아니다.     


실제로 바람 역시 어떤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물체여서가 아닌 공기의 흐름을 타고 온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양사상의 오래된 지식은 바람 역시 자연의 흐름을 타고 흐른다고 생각했지 바람이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즉, 여기서 공자가 비유한 바람의 실체 역시 자연스러움을 당연히 그 바탕으로 한다.     

심지어 서양의 저 유명한 철학자 니체(F. Nietzsche)도 정치인이 아닌 철학자를 주어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철학자가 존경받는 존재가 되려면 자신이 하는 말을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철학자가 존경받는다는 것은 그가 가진 철학이, 뭇사람들이 따르고 싶고 따를만한 것이라고 여겨야만 그 가치가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철학을 만들고 그것을 포장하고 설명하는 것에만 치중한다면 당연히 그 어느 누구도 그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대한 철학자였던 그 역시 공자와의 교류도 없이 <논어>를 공부하지도 않았지만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것을 알고 아는 것을 뽐내고 자랑하는 것이 철학자를 훌륭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진리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철학을 실천해 보이는 솔선수범이 그의 철학을 완성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공부해왔던 공자의 가르침과 맞닿아 있다.     


‘국민만을 보고 가겠다.’

국민은 다양하다. 재벌도 있고, 하루하루를 걱정하며 연명해가는 서민들도 있다. 수천만 원이 하루 즐기는 돈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 년 내내 일해도 그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백성이고 국민이 된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교과서에서는 계층이 어떻든 빈부의 격차가 얼마나 크던간에 한 국민의 표는 가치가 똑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필드에서 정치를 하는 자들의 논리에 의하면, 한 국민의 표는 결코 한 국민의 표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그 표를 얻고 힘을 얻기 위해 실탄이라고 사용되는 돈을 스폰서해주는 이들의 힘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정권을 잡고 나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군부독재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계와 재계가 결탁되어 공존공생을 말하며 악어와 악어새 관계를 유지한 것은 정계와 재계가 굳이 혼인을 통해 중세 봉건사회에서나 보았음직한 혈맹을 만드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말 그대로 중세 봉건사회에서 최첨단 우주시대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바꾸지 않는 재력과 권력욕의 탐욕스러운 부분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에서 공자가 계강자에게 일침을 가하는 가르침을 던진 것은, 그들이 감히 선정(善政)을 말하고 도(道)로 나아가고자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눈도 하나 깜빡이지 않고 던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 장을 처음 읽거나 이제 그 본뜻을 조금이나 이해하는 학도들에게 일러주고 싶은 화두는 바로 바람의 정체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바람은 단순히 군자의 덕에 비유되고 끝나는 존재가 아니다. 수많은 현대 해설서에서 해놓은 것처럼 그저 솔선수범만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기에 바람의 존재는 시사하는 바가 훨씬 더 넓고 크다.      


생각의 실마리를 던져주자면, 바람은 결코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이다. 바람 역시 공기의 흐름, 즉 자연에 의해 순응하는 또 하나의 커다란 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보이지 않는 자연의 흐름을 읽어나가는 것이 올바른 다스림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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