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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03. 2022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것은 결코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통달과 유명의 차이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여.

子張問: “何如斯可謂之達矣?” 子曰: “何哉爾所謂達者?” 子張對曰: “在邦必聞, 在家必聞.” 子曰: “是聞也, 非達也. 夫達也者, 質直而好義, 察言而觀色, 慮以下人. 在邦必達, 在家必達.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邦必聞, 在家必聞.”     
子張이 물었다. “선비가 어떠하여야 이를 達이라고 이를 수 있습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인가? 네가 말하는 達이란 것이.” 子張이 대답하였다.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명성)이 나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는 것입니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達이지 達이 아니다. 達이란 질박하고 정직하고 義를 좋아하며, 말을 살피고 얼굴빛을 관찰하여, 생각해서 몸을 낮추는 것이니,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達하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達한다. 聞이란 얼굴빛은 仁을 취하나 행실은 위배되며 여기에 머물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난다.”     

이 장에서는 두 가지 개념이 등장한다. ‘達’이라는 개념과 ‘聞’이라는 개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도 마찬가지인 것은 어떤 개념을 자신이 알고서 사용한다고 하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 장을 통해서 공자는 일러준다.     


제자인 자장(子張)이 과연 그 두 가지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을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진정한 단어의 의미와 그 단어의 의미를 넘어서 어떤 가치관을 추구하고 지향해야 하는가에 따라 늘 사용하던 단어조차도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장(子張)이 공자에게 지향해야 할 바로 ‘達’을 설정하고 어떻게 해야 그것에 이를 수 있는가를 묻는 것으로 이 장은 시작한다. 공자의 새로운 대답 방식을 통한 가르침은 이 장에서 정말로 그 단어가 갖는 가치와 지향점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공자가 힐문하는 것으로 방향을 튼다. 주자는 ‘達’이라는 단어에 대해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達’은 德이 남에게 믿어져서 행함에 얻지 못함이 없음을 이른다.     


<논어>를 제법 읽었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이 장을 가르치며 ‘達’이 어떤 의미인지를 물으면 저마다 대답을 하는 듯 하지만 명확하게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한 이를 나는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하였다. 그들이 혼란스럽게 된 가장 큰 이유는 ‘達’이란 개념을 한국어로 온전히 해석하여 명확하게 설명해놓은 해설서가 없기 때문이다.     

본래 ‘達’의 사전적인 의미는 ‘정통(精通)하다’, ‘통달(通達)하다’. ‘막힘이 없다’고 나온다. 정통하다는 것은 어떤 사물에 밝고 자세히 알고 있어 이치에 밝다는 것이고, 통달하다는 것은 막힘이 없이 환히 통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달인(達人)’이라는 용어도 좀 더 사전적으로 정확하게 풀자면, 널리 도리에 정통한 사람, 혹은 사물 일체에 대해 달관(達觀)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단어를 곱씹다 보면 그 의미가 지향하는 바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는데 옛사람들도 그렇지만 요즘 사람들은 특히나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나 행간의 색깔을 읽어내는 것을 귀찮아하고 섬세하게 따져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공자가 다시 그 정확한 의미를 묻는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힐문의 의도를 해설한다.     


子張(자장)이 외면을 힘썼으니, 夫子(부자)께서 이미 그가 발문한 뜻을 아셨다. 그러므로 도리어 詰問(힐문)해서 장차 그 병통을 드러내어 치료해주려고 하신 것이다.     


子張(자장)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미루어 짐작할만한 해설이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공자는 자장(子張)이 잘못 인식하고 있던 단어의 의미는 물론이고 무엇을 지향해야 할 바인가에 대해 제대로 일러주기 위해 물은 것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子張(자장)은 ‘達’의 의미를 나라에서나 집안에서나 이름이 알려져 소문이 자자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 설명에 대해 주자는 ‘聞’을 ‘명예가 드러남’이라고 말한다. 공자의 단호한 설명처럼 그가 ‘達’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은 ‘聞’이지 결코 ‘達’이 아니다. 그래서 주자는 이 두 가지 개념이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聞(문)과 達(달)이 서로 비슷하나 똑같지 않음은 바로 誠(성, 진실)과 僞(위, 거짓)가 분별되는 것이니, 배우는 자가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이미 밝게 분별하시고 아랫글에 또 상세히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눈깔자로 주의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바로 ‘誠(성, 진실)과 僞(위, 거짓)가 분별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뒤에 구체적으로 공자의 설명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聞(문)과 達(달)이 갖는 가장 큰 차이와 분별점은 진실됨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부분이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내면적인 부분과 외면적인 부분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유명해지는 것은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사람들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다. 즉, 내 자아적 의식을 통해서 유명해지고 싶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사람들이 그렇게 판단하고 만들어낸 허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達’에 대해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자장(子張)이 설명한 나라에서도 유명하고 집안에 있어도 유명하다는 말을 래퍼의 각운처럼 차용하여 활용한다. 다소 굴욕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방식인데, ‘너의 잘못된 설명을 그 틀에 맞춰 명확하게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마’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達에 대해 ‘질박하고 정직하고 義를 좋아하며, 말을 살피고 얼굴빛을 관찰하여, 생각해서 몸을 낮추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은 다소 하나로 일관된 설명이 없어 보이는 듯 하지만, 결국 내재적인 자아와 관련되어 있음을 파악하는데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통해 그 이해를 돕는다.     


안으로 충신을 주장하고 행하는 바가 宜(의, 義(의))에 합하며, 남을 대함에 살피고 겸손함으로써 자신을 기름은, 모두 스스로 안을 닦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德이 자기 몸에 닦아져서 남들이 믿는다면 행하는 바가 저절로 막힘이 없을 것이다.     


주자의 주석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자신의 의지를 통해서 그렇게 할 뿐이지 남이 알아주는 것을 바라는 것에 지향점을 두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聞)’과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라는 설명에 다름 아니다.     


이어지는 ‘聞’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면, ‘얼굴빛은 仁을 취하나 행실은 위배되며 여기에 머물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여 이른바 표리부동(表裏不同)함을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뒤이어 각운으로 활용한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난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당연히 샌다는 신랄한 비판의 일침이다. 이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얼굴빛을 좋게 하여 仁(인)을 취하나 행실은 실제로 위배되며, 또 스스로 이것을 옳다고 여겨 忌憚(기탄)하는 바가 없으면, 이는 실제를 힘쓰지 않고 오로지 이름을 구함을 힘쓰는 자이다. 그러므로 헛된 명예가 비록 높으나 실제 德(덕)은 병든 것이다.     


왜 유명해지고 싶은 ‘聞’을 표리부동(表裏不同)함으로까지 힐난하는가에 대해서 주자는 명확하게 그것이 실제를 힘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제에 힘쓴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자신만이 아는 부분을 말하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실천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만 헛된 명예를 추구한다는 설명을 덧붙인 것인데, 입으로는 고담준론(高談峻論)을 읊어대는 듯 하지만 결국 배운 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가식에 불과한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입으로만 옳은 것을 떠들어대고 실천하지 않는 목적이 결국은 헛된 명예를 얻기 위함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자(伊川(이천))는 이 장의 가르침에 대해 지향해야 할 바에 앞서 어떤 것을 지양해야 할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배우는 자들을 위해 설명한다.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실제를 힘쓸 것이요, 명예를 가까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명예를 가까이 함에 뜻이 있으면 큰 근본이 이미 상실되니, 다시 무슨 일을 배우겠는가. 명예를 위하여 배운다면 이는 거짓이다. 지금의 배우는 자들은 대부분 명예를 위하니, 명예를 위함과 이익을 위함은 비록 淸(청)과 濁(독)이 똑같지 않으나 이익의 마음은 똑같은 것이다.”     


‘명예를 목적으로 두지 말라’는 정자의 설명은 배우는 자들이 근본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님을 경계하는 말이다. 별 특별한 내용이 없는 듯 하지만, 결코 간과하지 말하야할 지향점은 ‘실제에 힘을 쓰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실제’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이제까지 당신이 당연하고 평범하다고 여겼던 그 단어에 다시 한번 곱씹어 진의(眞意)를 파악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윤씨(尹焞(윤돈))는 이 장에서 결국 공자에게 라이브로 가르침을 받은 자장(子張)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성향을 바꾸지 못하고 ‘실제’에 힘쓰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이 장의 핵심을 정리한다.     


“子張(자장)의 학문은 병통이 실제를 힘쓰지 않음에 있었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씀해 주신 것이다 독실히 하는 일이었으니, 내면에 충적되어서 외면에 발로되는 것이다. 당시에 문인들이 직접 聖人(성인)의 가르침을 받았는데도 잘못됨이 이와 같음이 있었으니, 하물며 후세에 있어서이겠는가.”     


실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는 그렇지 못하고 헛된 명예만을 따르고 유명해지고자 하는 것에만 치중하는 이들을 지칭한 ‘聞’의 개념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는데, 앞에서 상세히 설명하지 않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한 가지 있었다. 

                   

바로 ‘居之不疑’라고 원문으로 적힌 ‘여기에 머물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내가 해석한 문구이다. 왜 헛된 명예를 찾고 실천하지 않는 이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런 묘한 설명을 했을까? 이런 부분을 그저 아무런 의심 없이 스쳐 지나가며 읽기 때문에 백번을 읽어도 <논어>의 진수를 읽어내지 못하는 실수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여기에 머문다’는 의미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음을 의미한다.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하거나 회의를 할 생각 없이 앞으로 나아갈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심이 왜 반성의 의미를 갖는지 논리적 비약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아할 수도 있지만,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고 자신의 위치를 의심하고 자신이 노력하지 않는지를 의심하고 왜 더 노력하지 않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 자신을 채찍질하게 된다.     


자기반성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그 자리에 ‘안주(安住)’하게 된다. 편안한 것은 익숙한 것이고 익숙한 것에 만족하게 되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에서 오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싶어지지 않게 된다. 그 과정을 설명하는 아주 좋은 예는 살이 찌는 이치이다.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당장 입에는 너무 맛있다. 그리고 맛있는 것을 잔뜩 먹으면 움직이고 싶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으면 배에 음식이 가득하니 졸리다. 졸리면 그저 편하게 자면 그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 아주 건강하고 말라있던 사람이 점점 살이 찌고 움직이지 않으며 앉은자리에서 꼼짝하기 싫어하게 되면 살이 붙고 근육이 퇴화하고 온몸이 지방이 붙기 시작하면서 돼지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한꺼번에 풍선처럼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살을 빼는 것도 조금씩 진행되는 것처럼 돼지가 되는 과정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나태가, 그 안일함이 조금씩 조금씩 그를 거대한 돼지로 만들어가고 움직이기 힘든 지경까지 가는 것이다.      


매일같이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이 뚱뚱해져서 다리를 붙여 앉을 수 없게 되고 쩍벌남이 되어버린 것을 ‘편하다’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에게 편하다는 말인가? 헛된 명예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성형을 하고 외모를 바꾸려 든다. 그것조차 노력의 일환이라고 우기고 싶다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성형을 하고 비싼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하는 것보다 것은 본능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구는 이들이 국민을 위해서 그것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달(達)’은 고사하고 ‘문(聞)’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이 여기는 것이 나 혼자만의 착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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