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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04. 2022

진정, 어떻게 덕을 높일지 몰라서 못한다 생각하는가?

결국 모든 수행은 내 마음을 다스림에서 시작한다.

樊遲從遊於舞雩之下, 曰: “敢問崇德·修慝·辨惑.” 子曰: “善哉問! 先事後得, 非崇德與? 攻其惡, 無攻人之惡, 非修慝與? 一朝之忿, 忘其身, 以及其親, 非惑與?”     
樊遲가 孔子를 따라 舞雩의 아래에 갔었는데, “감히 德을 높이고 慝(간악함)을 다스리고 미혹을 분별함을 여쭙겠습니다.” 하였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좋구나! 네 질문이여! 일을 먼저 하고 소득을 뒤에 함이 德을 높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惡을 다스리고 남의 惡을 다스리지 않음이 간악함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루아침의 분노로 자신을 잊어서 〈화가〉 그 부모에게까지 미치게 함이 미혹됨이 아니겠는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혼란스러울 것을 감안하여 설명할 단어가 나왔다. 조금 생소하게 느껴진다고 보이는 ‘무우(舞雩)’는 지명이 아니다. 이미 ‘선진(先進) 편’의 25장에 한번 나왔던 단어이기도 한데, 이미 까맣게 잊었을 테니, 다시 간략하게 설명한다. 본래 이 단어는 ‘기우제(祈雨祭)’를 이르는 말이었다. 기우제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중 우단(雩壇)에서 지내는 기우제(祈雨祭)는 임금이 친림하여 지내기도 하였다. 우단의 기우에서는 악공과 무희들을 동원하여 음악과 춤을 행하는 의식이 있으므로 '무우제'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후 단어의 뜻이 변성되면서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를 지칭하는 말이 된 것이다.     

노나라의 무우(舞雩)가 있는 하천 기는 공자가 문하생들을 데리고 자주 바람 쐬러 가던 곳이었다. 기수의 북쪽에 우문이 있고 높이 3장의 기우제 단이 상당히 오랜 후대에까지 잔존했다고 기록에는 전한다.     


다시 본문의 질문과 대답으로 돌아와 보자. 번지(樊遲)가 묻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德을 높이고 慝(간악함)을 다스리고 미혹을 분별하는 방법론에 대한 것’을 묻는다.     


두 번째 항목에 독특한 단어가 나와 생소하여 배우는 자들이 혼란스러워 이해하기 어려울까를 걱정한 호씨(胡寅(호인))가 ‘慝(간악함)’이라는 단어를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慝(특)이란 글자는 心(심)을 따르고 匿(닉)을 따랐으니, 惡(악)이 마음속에 숨어있는 것이다. ‘修(수)’는 다스려 제거함이다.”     


위와 같은 해설에 근거하여 원문에는 ‘간악함’이라고 번역하였다.     


공자가 좋은 질문이라고 칭찬을 먼저 해준 것은, 두 가지 의미이다. 질문이 단순히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닌 번지(樊遲)의 이해도를 가늠할만한 수준의 내용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그 내용에 대한 부분이 실천과 수양에 연관된 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주자는 그 칭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해설하였다.     

자신을 위함에 간절함을 좋게 여기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공자의 가르침을 들을 시간이다.      

첫째, 일을 먼저 하고 소득을 뒤에 함이 德을 높이는 방법이다.

둘째, 자신의 惡을 다스리고 남의 惡을 다스리지 않음이 간악함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셋째, 하루아침의 분노로 자신을 잊어서 〈화가〉 그 부모에게까지 미치게 함이 미혹됨이다.     

세 가지 의미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은 상세한 설명을 통해 공자의 의도와 왜 번지(樊遲)의 질문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는지에 대해 풀이해준다.     


‘先事後得(선사후득)’은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음(소득)을 뒤에 하라.’는 말과 같다. 당연히 해야 할 바를 하고 그 공효를 계산하지 않는다면 德(덕)이 날로 쌓여도 스스로는 알지 못할 것이요, 자기 몸을 다스림에 오로지 하고 남을 책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惡(악)이 숨겨질 곳이 없을 것이요, 하루아침의 분노는 매우 작고 화가 그 부모에게까지 미침은 매우 큼을 안다면 미혹됨을 분별하여 그 분함을 징계함이 있을 것이다. 樊遲(번지)는 거칠고 비루하고 이익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로써 말씀해 주셨으니, 모두 그의 잘못을 바로잡으신 것이다.     


첫 번째 덕을 쌓는 방법으로 하는 행동으로 인해 얻을 것을 먼저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이익을 먼저 삼는 본능적인 방식에 대한 권계이다. 그것이 덕을 쌓는 방법이라고 굳이 설명한 이유는 그것까지 계산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두 번 돌린 설명방식이다. 


언제나 자신에게 어떤 것이 이익이 되는가를 먼저 따지고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언제고 의리 따위는 이익을 위해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 세상에 그득한 것은 공자의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두 번째로 간악함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에 자신을 다스리고 남 탓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한 것은 그 간악함의 본질이 남을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수양을 방해하고 자신을 망가뜨리는 원인이 된다는 권계에 다름 아니다. 주자가 해설에서 악(惡)이 숨겨질 곳이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 것은 모든 악(惡)이 자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이해하라는 배우는 이들을 위한 가르침의 또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실 앞의 첫 번째와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다. 이익을 위해 이해타산적으로 사는 이들은 결국 자신이 이익을 위해 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언제나 정당성을 부여하려 든다. 물론 세치 혀로 만들어낸 허황된 변명 구차한 명분일 뿐이다. 그런데 똑같은 행동을 하며 다른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그것은 도저히 용납하려 들지 않는다. 이른바 대한민국 신조어 ‘내로남불’이라는 간단명료한 설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세 번째로 미혹됨을 분별하는 것을 잠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다스리는 것에 비유한 것은 단순히 일순간의 분노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여 발생할 수 있는 더 큰 실수가 부모에게까지 안 좋은 영향을 미치게 만들 수 있음을 인지하고 제대로 파악해야 함을 말한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여 만들 수 있는 화가 그 분노보다 훨씬 여파가 크다는 의미를 이해하라는 권계이다.     

 

주석의 마지막에 주자가 늘 그러하듯이 공자가 질문을 던진 번지(樊遲)의 평상시 행동에 맞춰서 설명한 것임을 평소 번지(樊遲)가 어떤 부족한 점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해준다. 그 세 가지에 대해 힘써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물었던 번지(樊遲)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지하였기에 앞서 훌륭한 질문이라고 칭찬하면서도 진정으로 수양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일러준 것이다.     


대개 자신이 부족한 것을 아는 이가 자신의 부족함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를 스승에게 물으면 일단 그 부족한 점을 발견한 것이 대견하기에 칭찬하되, 그 부족함을 제대로 채울 방식을 그가 이해하기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일러줘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 방법이 간절한 제자에게 있어 그 설명은 더욱 가슴에 와닿을 것이기에 공자의 설명은 굳이 번지(樊遲)의 평소 행실에 맞춤으로 하지 않더라도 번지(樊遲)에게는 아프게 닿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장의 가르침에 대해 좀 더 형이상학적인 설명을 추가하기 위해 범씨(范祖禹(범조우))는 다음과 같이 내용을 풀이하여 정리한다.     


“일을 먼저 하고 얻음을 뒤에 한다는 것은 義(의)를 숭상하고 利(이)를 아래로 여기는 것이다. 사람이 이롭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덕이 높아지지 못하며, 자신의 과실은 스스로 살피지 않고 남의 과실만 알기 때문에 간악함이 다스려지지 못한다. 사물에 감응하여 동요되기 쉬운 것은 분노만 한 것이 없으니, 자신을 잊어서 그 부모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함은 미혹됨이 심한 것이다. 미혹됨이 심한 것은 반드시 細微(세미)한 데서 일어나니, 이것을 早期(조기)에 분별한다면 크게 미혹됨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분함을 징계함이 미혹됨을 분별하는 일인 것이다.”     


이 마지막 주석에는 이 장의 바닥에서부터 꼭대기까지 기본에서 완성을 논하고 있다. 핵심은 하나이다.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본성과 본능을 다스리기 위한 공부와 수양이 왜 필요한지를 역설한 것이다. 학문이란 모르는 것을 익히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수행을 위한 공부란 그저 단순하게 모르는 것을 익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학문을 익혀 곡학아세(曲學阿世)하며 자신의 출세와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로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모르는 것을 배워 익히는 것이 공부인 것이 아닌 것은 아니나 공부의 전부는 아니다. 공부는 모르는 것을 익히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르는 것을 배우는 즐거움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무지(無知)에서 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본능적으로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는 것도 사실이다. 고상하게 철학적인 내용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것은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 천둥벼락이 치는지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알고 있다면 천둥과 벼락이 하늘에서 내리는 노여움이라고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인간은 그렇게 하나씩 자신의 두려움을 정복해나갔다. 어느 정도 눈에 보이는 자연에 대해 익숙해지고 나서 인간이 공부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알거나 요령을 익히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보다 고차원적인 공부는 결국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시비(是非)를 가리기 위한 것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어떤 것을 행해야 하는지 어떤 것은 행해서는 안되는지 사리분별이 되지 않기 때문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단계에서는 두 가지로 나뉜다. 배운 것은 배운 것이고 자신을 위해 그 배움이라는 것으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손에 잡기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생긴다. 재미있는 것은 세상에서 그들을 ‘똑똑한 자’라 부르는 것이다.     


이 장의 가르침에서 ‘덕을 쌓는 방법’이라 설명한 방식에서 이익을 위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것에 비중을 두는 방식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덕이 쌓이게 된다는 표현이 나온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라고 설명한 것은 그저 ‘무언가’가 아니다. 바로 사욕(私慾)을 의미한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공자가 설명한 세 가지 방식이 모두 자기 자신의 수양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덕을 쌓기 위한 것이 목적으로 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쌓여나가듯이 잘못을 늘 다른 사람에게서 찾고 다른 사람들을 탓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으려 노력하게 되면 사회에서는 다툼이 차츰 없어지게 될 것이다.      


분노에 대한 설명 또한 앞서 두 가지의 개념에서 확장된 연쇄작용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사욕(私慾)을 위해 움직이는 본성을 다스리기 위한 공부와 수양이 지속되면 당연히 예상치 못했던 잘못이 발생했을 때 그것의 원인을 밖에서 찾지 않는다.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먼저 찾는 것이 군자라고 공자가 일렀던 것에는 막연한 도덕적 지향점이 아닌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수양의 기본 방식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쉽지 않다. 쉽지 않은 것은 그것이 본능을 ‘다스린다’는 표현으로 본능이 하고자 하는 바를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맞다. 그래서 세 번째 사사로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여 불러일으키게 되는 화가 부모에게까지 미칠 수 있음을 가늠하는 것이 미혹됨이 없다고 설명한 것이다. 결국 이 세 가지의 항목은 연쇄적으로 맞물려 하나로 이어진다. 인간의 추악한(?) 본능을 조절할 수 있기 위해 공부하고 수양한다는 배우는 자들이 지향해야 할 점을 명확하게 다시 한번 부각시킨 가르침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요즘 여당(與黨)이랍시고 빨간당에서 하는 짓이 가관이다.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아침부터 밤까지 방송 장사를 하겠다고 정치를 엔터테인먼트로 하는 케이블에서도 제대로 된 해석을 해주지 않는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지지율은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다. 외재적인 요인이 없음을 그들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외부에서 그리고 남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려 들고 계속해서 서로를 물고 뜯고 할퀴어댄다.      

연일 파란당에서도 헛발질에 뻘짓에 엄한 짓을 해대고 있기 때문에 외재적인 원인은 정말로 없다. 거리도 안 되는 북송 사건을 이슈화시키려 하더니 이도 저도 되지 않고 술 먹고 잡담하는 수준의 문자가 여당 실세와 대통령 사이에 오간 것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버젓이 잡히질 않나 그야말로 다방면에서 자살골을 넣겠다고 자신의 골로 몰려드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혼전 속이라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고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것 같은가? 

이유는 하나로 설명된다. 그들이 향하는 목적이 저마다의 사욕(私慾)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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