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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05. 2022

곧은 자를 등용하여 굽은 자의 위에 누가 둘 것인가?

인사권자가 위정자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당신에게.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樊遲未達,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樊遲退, 見子夏, 曰: “鄕也吾見於夫子而問知,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何謂也?” 子夏曰: “富哉言乎! 舜有天下, 選於衆, 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 擧伊尹, 不仁者遠矣.”     


樊遲가 仁을 묻자, 孔子께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셨다. 智를 묻자, 孔子께서 “사람을 아는 것이다.” 하셨다. 樊遲가 그 내용을 통달하지 못하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들어 쓰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리면 부정한 자로 하여금 곧게 할 수 있다.” 樊遲가 물러가서 子夏를 보고 물었다. “지난번에 夫子를 뵙고 智를 물었더니, 夫子께서 ‘정직한 사람을 들어 쓰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리면 부정한 자로 하여금 곧게 할 수 있다.’ 하셨으니, 무슨 말씀인가?” 子夏가 말하였다. “풍부하다. 그 말씀이여! 舜 임금이 天下를 소유함에 여러 사람 중에서 선발하여 皐陶를 들어 쓰시니 不仁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고, 湯 임금이 天下를 소유함에 여러 사람 중에서 선발하여 伊尹을 들어 쓰시니 不仁한 자들이 멀리 사라졌다.”     

이 장은 이전 장에 이어 다시 번지(樊遲)가 공자에게 인(仁)과 지(智)를 묻는다. 그리고 공자의 설명에서 앞의 ‘위정(爲政) 편’ 19장에서 배운 저 유명한 ‘擧直錯諸枉’이라는 문구가 다시 나온다. 앞장에서 당연히 기억할 것이라 생각하고 설명하지 않았던 제자 번지(樊遲)는 위정 편에서 공자의 마차를 모는 측근으로 나왔던 제자이다. 


그의 이름은 수(須)이고, 자는 자지(子遲)이다. 공자보다 36살이나 어렸는데, 공자의 마차(자동차)를 운전했다는 것으로 보건대, 제자라고는 하지만 학문적인 성취도가 높거나 여느 제자들처럼 학문에만 전념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농사짓는 법이나 채소 가꾸는 법 따위를 스승인 공자에게 물어 형이하학적인 질문을 한다고 소인(小人)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재치는 없었어도 비교적 성실하고 순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하는데 이전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어찌 보면 서민층의 가장 본능적인 성향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수양이 이루어지기 전의 일반인에 가까웠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해본다.     


언제나 그렇지만, 질문을 한 사람에 대한 배경지식이나 정보도 알면 도움이 되지만 우리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공자의 가르침이다. 공자는 아주 일반론적인 이전에 나왔던 개념으로 번지(樊遲)의 눈높이에 맞춰 복습(?)하듯 인(仁)과 지(智)를 설명한다.      

이 개념의 정의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하여 설명한다.     


사람을 사랑함은 仁(인)의 베풂이요, 사람을 앎은 智(지)의 일이다.     


하지만 이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 규정에 대해서 번지(樊遲)는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한 번에’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한 것은 번지(樊遲)가 아무리 학문에 전념한 학자형 제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공자를 측근에서 따라다니며 보고 들은 바가 있는데 그 말뜻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증씨(曾幾(증기))는 번지(樊遲)가 갸웃해하는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樊遲(번지)의 뜻은 사랑(仁(인))은 그 두루 하고자 하는데 지혜(智(지))는 선택함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된다고 의심한 것이다.”     


주석에 의하면, 번지(樊遲)가 이해한 상황에서는 두 개념이 반드시 하나로 통일될 필요까지는 없겠으나 그 맥락상 일관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왜 인(仁)은 취사선택이 없이 두루 사랑하라는 대개념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智)는 취사선택을 하라고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번지(樊遲)는 그 두 가지 사항이 모순된다고 여겼다는 해설이다.  

     

번지(樊遲)의 눈이 돌아가며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삽질(?)을 하고 있는 상황을 성인 공자가 읽어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바로 번지(樊遲)가 제대로 파악해내지 못한 지(智)에 대한 맞춤 후속 부연 설명이 이어진다.     


“정직한 사람을 들어 쓰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리면 부정한 자로 하여금 곧게 할 수 있다.”     

‘위정(爲政) 편’에서 한번 설명했던 이 부분을 복습하듯 설명해준다. 그런데 이 글이 왜 인(仁)과 지(智)를 설명하는데 튀어나오는지 이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번지(樊遲)처럼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보여 주자가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인다.


정직한 사람을 들어 쓰고 부정한 자를 버리는 것은 智(지) 요, 부정한 자로 하여금 곧게 함은 仁(인)이다. 이와 같이 하면 이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서로 쓰임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 이 정도 설명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딱 樊遲(번지)의 수준으로 일반인을 대표해도 될 듯하다. 번지(樊遲)가 또 어떤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혼자서 그러고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친절한 설명으로 번지(樊遲)의 머릿속 상황을 정리해준다.     


樊遲(번지)는 夫子(부자)의 말씀을 오로지 智者(지자)의 일이라고 여겼고, 또 부정한 자로 하여금 곧게 하는 이치를 알지 못하였다.     


부연설명을 들어도 그 의미에 대해서 와닿지 않았던 번지(樊遲)는 차마 다시 스승에게 또 묻지 못하고 가장 똑똑해 보이는 동문, 子夏(자하)를 만나 도대체 스승의 부연설명이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 묻는다. <논어>에서 적잖이 보이는 방식인데, 실제 질의문답을 하던 장소에는 있지 않았거나 혹은 함께 있었더라도 제대로 알아들은 다른 제자가 스승의 깊은 뜻을 재해석해주는 방식의 기록이다.     

그런데 스승이 내려준 가르침을 들은 자하(子夏)는 바로 그 의미를 이해하고 감탄에 마지않으며 무릎을 치고 번지에게 스승이 말하고자 했던 취지를 설명해준다. 자하(子夏)가 감탄한 이유에 대해서 주자는 다음과 같이 간략히 설명한다.   

  

그 포함한 것이 넓어서 다만 智(지)를 말씀함에 그치지 않음을 감탄한 것이다.     


이어 자하(子夏)는 번지(樊遲)에게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사례로 들어 그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시작한다. 사실 역사적 사실이라고는 하지만, 앞의 대전제가 여러 사람 중에서 곧은 사람을 등용하여 굽은 자들을 바르게 하였다는 설명을 하면서, ‘굽은 자’라는 표현 대신에 ‘不仁’이라는 구체적인 설명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인(仁)과 지(智)가 분리된 개념이 아니고 연쇄적인 개념으로 상호보완이 된다는 설명을 해주는 방식으로 지(智)에 한정된 설명으로 번지(樊遲)가 이해한 부분을 결국 인(仁)을 이루기 위한 교정 방식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이해하라는 눈높이 설명인 것이다. 

     

자하가 바로 스승의 설명한 근본 취지를 이해하고 나서 한, 이 역사적인 구체적인 설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주자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伊尹(이윤)은 탕 임금의 정승이다. 不仁(불인)한 자가 멀어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변화하여 仁(인)을 해서 不仁(불인)한 자가 있음을 볼 수 없어 멀리 사라진 것과 같음을 말하니, 이것이 이른바 ‘부정한 자로 하여금 곧게 한다.’는 것이다. 子夏(자하)는 夫子(부자)께서 인(仁)과 지(智)를 겸하여 말씀함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정자(伊川(이천))는 일반인의 수준을 대변하는 번지(樊遲)가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포함하여 그의 수준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왜 그런 방식의 가르침을 전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설명한다.      


“聖人(성인)의 말씀은 사람에 따라 변화해서 비록 淺近(천근)함이 있는 듯하나 그 포함한 것은 다하지 않음이 없음을 이 장에서 보면 알 수 있으니, 다른 사람의 말이, 천근함을 말하면 멂을 빠뜨리고 멂을 말하면 천근함을 알지 못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여기서 ‘淺近(천근)함’이라고 지칭한 것은 어렵게 말하면 ‘형이하학적인 것’을 말하고 쉽게 설명하자면 ‘알아듣기 쉽게 편하게 말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정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공자의 방편 설법(a.k.a. 눈높이 교육)이 듣는 이에 따라 아주 낮다고 볼 수도 있고 아주 훌륭하고 고명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두루 이해하고 안배하는 공자의 수준이 아니고서는 결국 고상하게 말하려고 드는 순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너무 이해하기 쉽게 말하는 바람에 그 핵심이 되는 더 큰 의미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있음을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생각해보라고 던진 화두와 같은 주석이라 하겠다.     


한편, 이 장에서 번지(樊遲)가 보인 행동, 즉,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동문인 자하(子夏)에게 찾아가서 묻는 행동에 방점을 찍은 윤 씨(尹焞(윤돈))는 그 행동을 칭찬하며 배우는 자들이 반드시 생각하고 따라야 할 부분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주석으로 실질적인 공부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배우는 자들이 질문할 때에는 다만 그 말씀을 듣고자 할 뿐만 아니라 또 반드시 그 방법을 알려고 하였고, 다만 그 방법을 알고자 할 뿐만 아니라 또 반드시 그 일을 행하려고 하였다. 예컨대 樊遲(번지)가 仁(인)과 智(지)를 물었을 적에 夫子(부자)께서 말씀해 주기를 다하셨으나 번지는 통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또다시 물었으나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물러가서 子夏(자하)에게 물은 뒤에야 이것을 앎이 있었으니, 가령 깨닫지 못하였다면 반드시 장차 다시 물었을 것이다. 이미 스승에게 질문하고 또 벗에게 변론하였으니, 당시에 배우는 자들이 실제를 힘씀이 이와 같았다.”     


어찌 보면 이 마지막 주석은 이 장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을지 모르나 <논어> 전체를 관통하는, 배우는 자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배우는가, 그리고 배워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의 재설정을 점검하라는 죽비에 다름 아님을 느낀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 마지막 주석은 결코 이 장의 가르침과 유리되어 있지 않음을 다시금 읽으며 발견한다. 주자가 이 주석을 이 장의 가장 마지막에 붙인 것은 단순히 좋은 의미이기 때문에 넣은 것이 아니라 이 장에서 공자가 일러주고자 했던 가르침의 행간 저 가장 밑에 깔려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어려운가?      


어제 <논어 읽기>와 함께 400여 일 전 브런치 연재를 시작했던 <인생에 실패했던 대가들의 이야기> 시리즈의 막을 내렸다. 1년이 훌쩍 넘을 이 시간 동안 브런치는 나에게 실험장이었고 수련장이었으며 사랑방이었고 강의실이었으며 다실(茶室)이자 주막(酒幕)이었다.     


글쓰기의 목적이 없을 수 없다. 목적은 늘 강조했듯 작가 소개에 나와있는 그대로였다. 글쓰기로 공감과 연대를 얻어 우리 사회를 좀 먹는 잘못들을 바꿔나가자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논어 읽기>를 통해 공부하고 점심시간 즈음에 <인생에 실패한 대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혹은 전혀 처음 보는 대가들의 인생을 촘촘히 들여다보는 글쓰기를 해왔다.     

수천 년 전의 성인이 남긴 가르침을 통해, 공부하여 얻고자 하는 것은 대단한 중국 역사나 인문학 고전을 읽었다는 만족감이나 잘난 척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인문학 열풍이라고 했지만 그저 자기 과시를 위한 공부로 전락하거나 제대로 책을 읽기 싫은 이들이 유튜브나 적당한 해설서를 통해 누군가 다 씹어서 먹여주길 바라는 안일함으로 ‘인문학’이라는 리본을 붙인 장사치들의 새로운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전락했는지도 모르겠다.     


공자는 그의 교육으로 제자를 양성했고, 그의 가르침으로 위정자들에게 세상을 바꾸자고 소리치고 천하를 주유했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지 못했고, 등용되지 못하였으며 어느 한 위정자도 바로잡지 못했다. 나는 400여 일간 매일같이 하루 A4 20매에 이르는 분량의 전투적인 글쓰기를 해왔으나 결국 라이킷으로만 공허한 댓글로만 정의를 말하고 상식을 말하는 브런치 작가들이라는 이들의 적나라한 민낯을 목도하고는 글쓰기의 동력을 잃고 말았다.     


이 장의 마지막 주석이 이 장의 가르침을 관통하고 있다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위정 편에 나온 문구를 다시 언급하며 공자는 올곧은 자(어진 이)를 등용하여 굽은 자(어질지 못한 자)를 바로잡아 인(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인(仁)이고 지(智) 임을 설명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이행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 바로 마지막 주석의 의미이다. 그 모든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지식과 진리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바로 당신이 실천하지 않으면서 누군가 그래 주지 않는다고 구시렁거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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