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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08. 2022

당신은 조언을 누구를 위해 하는가?

혹시 자신을 위해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아집일 뿐이다.

子貢問友, 子曰: “忠告而善道之, 不可則止, 無自辱焉.”     
子貢이 交友에 대하여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충심으로 말해주고 잘 인도하되 불가능하면 그만두어서 스스로 욕되지 말게 하여야 한다.”     


이 장에서는 친구와의 사귐에 대해 설명한다. 주의해서 살펴봐야 할 부분은 진심을 다해 친구에게 충고하라는 내용이 아니라 그렇게 했는데도 통하지 않고 친구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만두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진심은 통할 것이라며 고집을 피우다가는 스스로를 욕되게 하고 말 것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다소 공자의 가르침이라고 보기에는 충격적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라 수천 년이 지난 지금의 사람들에게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과연 그 당시에 ‘친구’라 함을 어떻게 규정했는지 그리고 왜 공자가 이렇게 이야기하였는지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벗은 仁(인)을 돕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다하여 말해 주고, 그 말을 잘하여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리로써 합한 자이므로 불가능하면 그만두어야 하니, 만일 자주 말하다가 소원함을 당한다면 스스로 욕되는 것이다.     


주자는 이 주석에서 진심을 다한 조언이 통하지 않을 때 그만두어야 한다는 공자의 의도를 친구란 존재가 의리로써 합한 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의리로써 합한 자라면 더더욱 진심을 다한 조언을 해야 할 텐데 왜 그렇지 않은 이유로 제시하며 설명했을까? 그 힌트는 바로 주석의 첫 문장에 있다.      


궁극적으로 친구란 존재의 이상적인 역할은, 친구가 인(仁)을 완성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일 것이다. 그런 친구에게 조언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그 목적을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조언이 받아들여져서 진심이 통했을 때는 당연히 그 순작용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역작용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이 장에 숨겨져 있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개념인 ‘시(時)’가 등장한다. 앞서 공부할 때 한번 설명한 바 있던 유학의 개념 중에 ‘시중(時中)’이라는 것이 바로 그 ‘시(時)’의 개념을 아주 잘 설명한 말이다. ‘때에 맞춰서 행하라’는 뜻의 이 개념은 모든 행동이 진심을 담고 진실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때에 맞추지 못하면 그 효과를 제대로 얻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켜 일을 망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몇몇 현대 해설서에서 이 장의 설명을 하면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언급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무리 좋은 조언도 너무 자주 너무 많이 하면 아니함만 못하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그걸 읽으며 고개를 끄덕일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히 걱정스럽고 우려가 된다.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맞다고 할 수도 없는 해설이 되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이비(似而非).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뜻이다.     


고전을 해석할 때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해석하거나 이해할 때 사람들이 예를 드는 개념이나 사자성어는 그 자체가 틀린 경우는 없다.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사자성어의 의미가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이 장의 가르침에 그 개념이 비유로 적용되는 것은 억지스럽다는 의미이다. 얼핏 보면 그럴싸하게 들릴 수도 있다. 친구에게 옳은 말을 한다고 조언을 돌직구로 했다고 치자.


이 장의 가르침은 그것이 받아들여질 요량이라면 한 번만 해도 받아들여진다는 것이지, 한 번에 받아들여졌는데 계속해서 얘기하는 것이 역작용을 불러일으킨다는 설명이 아니다. 그 설명이 적확한 비유가 되려면 조언은 어떤 경우에든 한 번만 하면 된다는 식의 이상한 도식이 성립된다.     

오히려 이 내용은 좋은 뜻의 권면이라 하여 한번 받아들여졌다 하더라도 그 경우가 자주 반복하게 되면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어 결국 관계가 疏遠(소원)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후 과정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부가적으로 활용되어야 적확하다 할 부분이겠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장은 조언을 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원문을 자세히 보라. 벗을 사귐에 있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묻고 있지 않은가? 굳이 사람을 사귀는 것이라 하지 않고 벗을 사귐이라 한 부분도 가벼이 넘길 부분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우리가 가진 의문 중에서 왜 의리로 합한 사이이기 때문에 조언이 먹히지 않았을 때 그만두라고 했는지에 대한 답을 아직 못 얻었기 때문이다.     


그저 사람을 사귀는 경우라면, 주자가 주석을 통해 언급했던 것처럼 아무에게나 그 사람이 인(仁)을 완성하라고 조언을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앞서 ‘이인(里仁) 편’ 26장에서 子游(자유)가 “벗 사이에 충고를 자주 하면 이에 멀어지게 된다”라고 했던 내용을 공부한 바 있다. 앞에서 의문을 갖게 했던 의리로 맺어진 사이이기 때문이라고 주자가 설명한 부분은, 친구 사이란 혈연으로 맺어져 타고나면서부터 맺어진 의리의 관계가 아니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암묵적인 신뢰와 애정과 당연히 진정성을 가진 아끼는 마음에서 조언한다는 전제를 설정할 수 없다. 하여 忠告와 責善을 함에 있어 그 한도를 지켜야 한다. 그 한도에 대한 부분은 바로 ‘시(時)’이다.     

‘시(時)’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는 방법 중에 하는 ‘필요할 때’로 설명하는 것이다. 배가 고플 때 맛있는 것을 주는 사람만큼 고마운 것은 없다. 내가 아플 때 나를 치료해주는 사람만큼 은인도 없다. 내가 돈이 없을 때 돈을 아무 조건 없이 빌려주는 사람만큼 감사한 사람도 없다.


당연한 소리 같은가? 예시란 본래 이렇게 명확하고 당연하게 이해할 정도로 쉬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삶은, 그리고 현실은 그렇게 쉽고 딱 떨어지질 않는다.     


잔뜩 먹어 배가 부른데, 맛있는 것을 사 왔다고 하는 말은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나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던 중에 듣는 말보다는 당연히 덜 반갑기 마련이다. 내게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 어떤 선물을 준다면 그저 주는 것이니 고마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절실한 것이 아니었기에 극적인 감동이나 감사함이 덜하기 마련이다.     


이제 좀 애매해졌나?

주자의 주석에서 의리로 합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앞서 여러 장에서 공부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혈연으로 맺어진 부모나 받들어야 할 왕에게도 이 대원칙은 똑같이 작용한다. 아무리 좋은 조언이고 직언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절실한 상황에서 그 조언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본래 그것을 이야기하려는 사람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말하려는 사람의 진실과는 상관없이 그 가치가 바래지고 만다.     


이제 이 장에서 근원적으로 던졌던 화두에 대해 조금 더 한 차원 높여 심도 있게 들어가 보자. 내가 하는 말이 옳다는 인식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에게서 나온다. 대부분 공부가 얕거나 수양이 깊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생각을 대중의 생각이라고 내밀며 객관성을 담보하려 든다. 예컨대,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생각해!’라고 하는 것이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 말 자체가 모순이다. 여러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이거나 옳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자신의 생각이 절대다수의 의견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을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는 다수결은 불편한 구석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다. 구성원들의 의견에서 다수의 공감을 통해 불만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라도 한 번만 들어도 옳다고 여겨지는 사회정의는 분명히 있다. 돈을 먹고 벌을 받아야 할 이들의 죄를 덮어주는 경찰이나 검찰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그런 이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누가 봐도 언제 들어도 정론이다.      

하지만 그 정론을 실제로 작게나마 현장에서 푼돈(?)을 받거나 지인 사이라는 이유로 덮어주는 현장의 경찰에게 그의 친구나 그의 형제가 이야기한다고 가정해보자. 우리 사회 도처에 깔려 있는 작지 않은 직업군인 경찰 중에 말단 순경부터 서장이나 청장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진실을 은폐하고 혹은 자기 조직을 보호한다는 미명하게 거짓을 알면서도 적당히 넘어가고 왜곡하는 경우를 가족이나 친구가 봤다 가정하자. 당연히 정상적인 도덕적 관념을 가진 가족이나 친구라면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조언이나 돌직구를 맞은 당사자가 ‘내 주변에서는 정말로 큰돈 먹고 그 돈으로 잘 먹고 잘 사는 비리 경찰들도 많은데, 왜 나한테 이렇게 까칠하게 그래?’라며 마음을 먹는 순간, 그를 위한 걱정이자 정의에 엇나가 있다며 했던 조언은 참견이고, 거슬리는 말이 되고 만다.


그런 그의 심정이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계속 그런 잘못된 행동을 보이게 되면 가족은 당연히 걱정하게 된다. 괜히 그런 푼돈 때문에 경찰 옷을 벗게 되거나 심지어 형사 처벌되어 감옥까지 가게 될 수도 있으니 걱정되지 않을 수 없어 또 조언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듣고 있던 이에게는 그 불편함이 쌓여 폭발을 부르게 된다.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에게 그런 조언을 해주는 친구가 거슬리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사례를 듣는 당신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그 경찰이 썩었고 잘못되었다고 느끼겠지만, 지금 당신이 그의 입장이라면 그 조언을 가슴 깊이 받아들여서 개과천선할 수 있겠는가?     

얼굴도 모르고, 글만으로 엮인 브런치라는 공간에 500일에 가깝게 매일같이 글을 썼다. 처음부터 목적을 분명히 했었다. 올바름을 알리고 함께 공부하여 그 올바름을, 상식적으로 사회의 잘못된 구석구석을 바로잡는데 쓰기 위한 지렛대로 쓰겠다고.     


지금 매일 아침 연재하는 <논어 읽기>를 시작으로, 다양한 글을 쓰며 내 생각을 전했다.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과 많은 시간 그 사람의 생각과 사상과 행동을 관찰하고 검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중에서도 글은 그 사람의 그 깊은 곳에서 나온 글들은 한때의 글이 아닌 매일같이 날로 생산되는 글은 결코 가식이기 어렵다. 그래서 나를 오롯이 보이고 내 사상을 보이고 나와 함께할 수 있는 이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었다.     


<논어 읽기>를 통한 우리 세태를 읽는 것에, 같이 공분하고 공감해주는 댓글과 응원이 많아졌고,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처럼 행동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글을 쓰는 이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들과도 글로 친구를 맺었다.     


간혹 나 혼자서 게릴라전처럼 사회의 이곳저곳 썩어 있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사례들을 라이브로 공개하면 모두들 맞는 말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통쾌하다고 그래야만 한다며 박수를 치고 성원을 보내왔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https://brunch.co.kr/@ahura/1052


아주 작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오프라인으로 궐기대회를 나가 데모를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온라인 공간을 통해 공론화하고 그 과정을 통해 잘못을 바로잡아보자고 캠페인을 시작하자마자 그들은 저마다 갑작스레 꼬리를 내리고 자취를 감추고 바쁘다며 핑계를 댔다.     


오히려 당당하게, 나는 당신의 캠페인에는 동조할 수 없으나 내가 살고 있는 영역에서 나 나름대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 내가 말하는 정의가, 그 진실이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강조하게 되면 그저 시간 때우기 재미있는 글을 읽거나 읽으면 왠지 그 사람의 내공과 공부를 얻어가는 듯한 착시현상을 갖게 되는 인문학적 글을 읽는 것으로 자기만족을 갖고 싶어 하는 모니터 뒤에 숨은 소위 작가라는 타이틀로 불리기를 원하는 그들은 그저 그렇게 지내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요즘 들어 특히 수천 년 전 중원에서 공자가 느꼈을 그 고독감과 의아함이 매일같이 나를 뒤흔들어 한 시간 이상 깊은 잠을 들지 못하고 경련을 일으키며 퍼득거리고 일어나게 된다.     

자신이 공부하고 익힌 내용대로 행하지 않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 젊고 고지식했던 공자에게는 의문이었을 것이고, 나이가 들어 왜 사회를 바로잡자는 외침에 대해 그것을 할 수 있는 위정자들이 하지 않으면서 저리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모습으로 그저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지 답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그 가르침을 배우고 싶다면서 행하지 않는 바로 옆의 사람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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