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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02. 2022

열아홉 딸이 사고로 죽어 10년간이나 절필을 했어도,

스스로 고독으로 침잠하여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을 완성해내다.

245번째 대가의 이야기.     


1802년 프랑스 제1공화국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나폴레옹 휘하의 군인으로 출세하여 장군까지 진급한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왕당파 집안의 여인이었다.


군인이던 아버지의 직접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의 여러 도시를 전전하던 그는 10살 때 코르디에 기숙학교에 입학한 이래, 독서와 시 창작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자신의 일기에 “나는 샤토브리앙(프랑스 낭만주의 작가의 선구자)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고 적어, 불과 11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문호가 될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로, 이후 정치인이었고, 낭만파 시인이었던,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이자 서양 문학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빅토르 마리 위고(Victor-Marie Hugo)의 이야기이다.     


빅토르 위고는 19세기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거장이었다. 1802년에 태어나 1885년에 죽음을 맞았으니 얼추 한 세기를 다 살았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위고의 83년간에 걸친 일생은 19세기 사회의 변천과 함께 그 사상의 흐름이 보수주의에서 자유주의 또한 공화주의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일관해 흐르는 것은 인류가 한없이 진보할 것이라는 낙관적 신뢰와 이상주의적 사회 건설을 향한 불 같은 정열이다.


이와 같이 정열적인 웅장함은 감상에 빠지기 쉬운 낭만파 시인에게는 볼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그의 비길 데 없는 천성과 함께 위고를 낭만파 지도자로 만들었고 19세기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시인의 한 사람이 되게 하였다.

위고는 소꿉친구인 아델 푸셰와 스무 살이 되던 해서 결혼해서 발표한 첫 시집 <오드와 잡영집(Odes et Poésies Diverses)>(1822)로 주목을 받았고, 희곡 <크롬웰>(1827)과 시집 <동방 시집>(1829)을 간행하고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소설 <아이슬란드의 한(Han d'Islande)>(1823), <뷔그자르갈(Bug-Jargal)>(1826), <사형수 최후의 날(Le Dernier jour d'un condamné) (1829) 등 왕당파적·가톨릭적인 색채가 농후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이후, 여러 잡지에 문학평론을 싣기도 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간의 문학 논쟁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낭만주의 문학 이념의 초석을 다졌다.      


마침내 위고는 희곡 <크롬웰(Cromwell)> (1827)의 서문 발표를 통해 고전주의 문학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서면서 낭만주의 작가들의 수령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크롬웰(Cromwell)>에 붙인 서문은 고전주의 이론에 대항한 낭만주의 연극이론의 선언서로서 더욱 유명하다. 7월 혁명의 해인 1830년 2월에는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의 초연에 즈음하여 낭만파와 고전파 간에 문학사상 유명한 ‘에르나니 싸움(La Bataille d'Hernani. 또는 ‘에르나니 논쟁’)’이 일어났다.     


이 싸움에서 위고는 고전파의 방해에 대비하여 미리 수많은 동지를 '박수치는 사람'으로서 극장 안에 배치, 청년시인 고티에가 빨간 조끼를 입고 싸움의 앞장을 섰던 일화는 유명하다. 상연은 야유와 박수가 엇갈리는 가운데 별다른 지장 없이 끝나 낭만주의는 마침내 결정적인 승리를 획득했다.     


이 싸움의 승리 후에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를 압도하여 이후 1850년경까지 문단을 점유했으며, 위고는 더욱 왕성한 활동을 보여,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Notre-Dame de Paris)> (1831)로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한편, 크롬웰은 고전주의 연극의 신조였던 이른바 ‘삼일 치의 법칙’(행위, 시간, 장소의 통일)을 과감히 깨트린 작품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당대에는 워낙 파격적이어서 상연이 불가능했지만, 그 희곡의 ‘서문’이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위고는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이후 그는 시집 <동방시집>(1829)을 간행하고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1832년에 위고는 쥘리에트 드루에라는 여배우를 처음 만났고, 이후 반세기 동안 지속된 두 사람의 불륜 관계가 시작되었다. 사실 위고의 생애를 언급하면서 그의 수많았던 여성편력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기가 어렵다. 자녀를 넷이나 낳은 본처 아델은 남편의 외도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자신도 비평가 생트뵈브와 외도 행각을 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여도 그들은 가정을 깨지 않고 40년 넘게 꿋꿋이 법적인 부부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린 위고의 애정 행각은 말년까지도 계속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웠던 애인은 레 미제라블의 원고를 정서하고 망명지까지 따라가는 등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쥘리에트였다. 1841년에 위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지만, 1843년 가을에 제일 아끼던 딸 레오폴딘이 신혼이던 열아홉 살 때 센 강 하류의 빌키에에서 보트 전복 사고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위고는 6개월이나 펜을 들지 못할 정도로 깊은 좌절과 혼란의 시기를 보냈다.     


그 일로 충격을 받아 우울증에 시달리던 위고는 결국 작품 활동을 한동안 중단했다. 글쓰기를 포기한 대신 정치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위고는 왕실과의 친분으로 1845년에는 자작 작위를 받지만, 그해 여름에 여배우 레오니 당트와의 간통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는 굴욕까지 당하게 된다. 이후 그는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한 채 필생의 대작 <레 미제라블>의 집필에 몰두한다.     


1848년에 2월 혁명이 일어나자 위고는 보궐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위고는 루이 나폴레옹을 지지했지만, 곧이어 반동 정치가 시작되자 격렬하게 정부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인다. 1851년 12월에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정을 선언하자, 반정부 인사로 낙인찍힌 위고는 벨기에로 피신한다.     


망명 중에도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계속 발표하던 위고는 결국 벨기에에서 추방되어 프랑스 서부 해안에서 가까운 영국령 채널 제도의 건지 섬으로 향한다. 부인과 자녀는 물론이고 애인 쥘리에트까지 위고를 따라 함께 망명길에 오른다. 1859년에 루이 나폴레옹은 사면령을 내렸지만, 위고는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망명지에 남아 있었다.      


고독한 망명 생활 중에서 그는 오롯이 창작에만 그 열의를 쏟아부었고, 위고의 시집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징벌(Les Châtiments)> (1853), <명상시집(Les Contemplations)> 1856), <세기의 전설(La Légende des siècles), (1859)(제1집),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1862)>, <바다의 노동자(Les Travailleurs de la Mer)> (1866) 등의 대표작이 연이어 간행된다.     

1870년에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이 몰락하자, 위고는 9월 5일 밤에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해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다. 국회의원에도 당선되었지만 복마전 같은 현실에 실망한 나머지 금세 의원직을 포기해버리고 정치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그해 3월 13일에 위고의 큰아들이 갑작스레 사망하고, 불과 일주일 뒤에 파리에서는 코뮌이 수립되었다가 두어 달 만에 분쇄된다.      


벨기에에 머물던 위고는 비록 코뮌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 가담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그로 인해 위고는 졸지에 코뮌 동조자로 오해받아 벨기에에서 추방당했고, 이후 파리로 돌아와서도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망한 위고는 가족과 함께 예전의 망명지인 건지 섬으로 떠나, 그곳에서 1년간 머물며 말년의 대표작인 <93년(Quatrevingt-treize)> (1874)을 집필한다. 1876년에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1878년에 뇌출혈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위고는 그의 대표작인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개인의 욕망에 눈이 어두워 살인까지 저지르는 프롤로 주교를 그린 바 있다. 가톨릭 교회는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과 <레미제라블> 등의 걸작들을 금서로 지정해 신도들이 읽지 못하게 하였다. 가톨릭과 화해하지 못한 위고는 교회의 기도마저 거부했다.     


1881년 2월 26일, 위고의 80세 생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군중이 그의 집을 찾아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한 위고는 8월 31일에 유언장을 썼다.     


“신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 사상만 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내겐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극빈자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 데 쓰이길 바란다. 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이다. 교회의 기도를 거부한다. 바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단 한 사람의 기도이다.”     


2년 뒤에 그는 위의 유언장을 더욱 짧게 고쳐 썼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5만 프랑을 전한다. 그들의 관 만드는 값으로 사용되길 바란다. 교회의 추도식은 거부한다. 영혼으로부터의 기도를 요구한다. 신을 믿는다.”     


1885년 5월 18일에 위고는 폐렴으로 병석에 눕게 된다. 그리고 불과 4일 만에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검은빛이 보인다.”였다. 그날 밤에 파리에는 천둥과 우박을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6월 1일에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졌고, 200만 명의 인파가 뒤를 따르는 가운데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문학사가 랑송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1885년 장례식 전경
“그의 시신은 밤새도록 횃불에 둘러싸여서 개선문에 안치되었고, 파리의 온 시민이 판테온까지 관의 뒤를 따랐다.”     



오늘 당신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빅토르 위고의 인생에 돋보기를 들여다 댄 것에는 그가 수많은 여성편력을 통해 간통으로 감옥생활까지 한 행실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딸아이가 결혼을 하자마자 남편과 강에서 배가 전복하며 사망한 사건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혹평이 그를 10년간의 절필로 이끌었던 그의 인생의 실패는 단 한 번뿐인 실패가 아니었다.


간통으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치욕을 겪고서 그가 칩거하면서 완성시킨 <레 미제라블>도 사람들은 작품을 기억할 뿐 그가 그 치욕을 피해 칩거하여 쓰기 시작한 글임을 기억하지 못한다.      


오늘 그의 실패와 좌절을 자세히 보여주는 이유는 바로 그런 실패와 좌절과 치욕을 그가 어떻게 이겨내고 다시 일어섰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아울러, 위고가 절필을 하면서 정치 쪽으로 투신했던 것은 정치에 욕망이 있어서가 아니었음을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그는 글을 통해 사회를 변혁해보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얼마나 민중예술을 강조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예술은 민중을 위해 만들어지고 모든 것은 신으로부터 와서 민중에게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신은 원칙이고 민중은 예술이 도달해야 하는 종착점이며 예술과 연극은 민중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작품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 묻어 있다. 1869년에 발표한 <황량한 세월(Les Années Funestes)>에서 그는 프산 노동자들의 현실을 이렇게 그렸다.     


“그 사람,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나, 우리는 모두 광부였다. 작업은 가혹했고 주인은 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빵이 모자라서 석탄을 깨물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불쾌하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일을 조금 줄이고 임금을 조금 낫게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우리에게 주었는가? 총탄이다.”     


살면서 실수는 누구나 한다. 도덕적으로 완벽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도덕적으로 혹은 자신의 철학을 입으로만 떠들며 추악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위인(?)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들의 부도덕하고 추악한 사욕(私慾)으로 얼룩진 인생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뤄낸 성과로 그들은 훌륭하다고, 대단하다고 기억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1861년 6월 30일 아침 8시 30분, 창문 너머로 비쳐 드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나는 <레 미제라블>을 끝냈다네. (...) 이제는 죽어도 좋아.”      


젊은 시절부터 사회 고발 소설을 구상했던 위고는 1845년부터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가 16년 만에 망명지인 건지 섬에서 탈고했다.      


“단테가 시에서 지옥을 그려냈다면, 나는 현실을 가지고 지옥을 만들어내려 했다.”      


집필 당시에는 제목이 <레 미제르>(Les Misères, 비참함)였지만, 나중에는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불쌍한 사람들)로 바뀌었다. 주인공 이름 역시 원래는 ‘장 트레장’(Jean Trejean)이었지만, 나중에는 ‘장 발장’(Jean Valjean)으로 바뀌었다.     


<레 미제라블>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소설 가운데 하나지만 이 작품을 ‘완독’한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축약이나 각색이 아닌 ‘무삭제판’ <레 미제라블>을 읽어보면, 그 유명한 장 발장의 이야기가 소설 분량 중 3분의 1 가량에 불과하며, 나머지 3분의 2에서는 19세기 초의 프랑스 사회와 풍습, 그리고 다양한 문제에 관한 저자의 견해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위대한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레 미제라블>은 인간의 갖가지 ‘전형’을 그려낸다.     


한때의 실수로 전과자가 되었다가 개과천선하지만 영원히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 장 발장,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로 집요하게 장 발장의 뒤를 쫓는 형사 자베르, 모두가 외면한 장 발장에게 자비를 베푼 밀리에르 주교, 가난과 학대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소녀 코제트, 사랑과 우정에 온 몸을 바치는 열정적인 청년 마리우스, 어떤 상황에서든 이득을 추구하기에 혈안이 된 악당 테르디니에 등등.     

그의 작품에 투영된 인물 군상들이 어디에서 나왔을까를 가끔 생각해본다. 그가 살아오며 만났던 혹은 그 상상의 산물로 나온 인물상들 중에서 가장 친숙하고 많이 활용된 인물상은 바로 그 자신이었을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위고는 강력한 휴머니즘의 소유자인 동시에 강력한 에고이즘의 소유자로서 이중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정치적으로는 카멜레온에 가까운 변신으로 주위 사람들을 계속해서 놀라게 만들었다.      


젊은 시절에는 열혈 왕당파로 행세하며 왕실과의 친분을 자랑했지만, 여러 차례의 변모 끝에 결국에는 열혈 공화파가 되었다. 얼핏 보기에는 지조 없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휴머니즘이 위고의 최우선 신조였음을 기억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 때문에라도 위고는 왕당파나 공화파나 극좌파에 전적으로 동조할 수는 없었고 종종 상황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고, 그렇기에 사람이다.


실수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우울증이 심각해져 절필을 하고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그러면서도 그는 80이 넘는 생애를 버티고 또 버티며 자신을 고치고 수정하고 완성시키려 했다.     


당신의 고단한 삶이 지금의 실패가, 아직도 복구되지 못한 그 힘겨운 과정들이 당신을 집어삼켜 무릎 꿇게 만들어버리지 못하도록 굳건하게 이겨내고 일어서라고 위고는 작품을 통해, 아니 자기 인생 전체를 통해 외치고 있다.     

그 목소리가 들린다면, 결코 그 정도 고난과 고통에 무릎 꿇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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