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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01. 2022

시골 농부의 아들인 흙수저로 태어나 자본 하나 없었지만

위인전을 탐독하며 위인들의 다른 점을 따라 걸어 미래를 향해 가다.

244번째 대가의 이야기.     


1958년, 전라남도 광산군 평동면(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광주일고 합격 통지를 받던 날 돌아가셨고, 이로 인해 방황하던 그는 신뢰, 성실, 정직을 강조하는 어머니의 가르침 덕에 겨우 방황기를 끝내고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 돈을 꿔달라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자기 것을 나눠줄 정도로 인정이 많았지만, 그가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할 때는 1년에 한 번씩만 용돈을 줘서 돈을 계획적으로 사용하고 관리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했다고 한다.      


고려대학교에 입학 후 경영학 강의를 수강하던 중 “자본시장의 발전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는 교수의 설명을 듣고 난 이후, 증권 시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학교 2학년 시절,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명동의 큰 손이던 투자자 백희엽 씨를 찾아가 기업의 흐름을 읽는 능력과 투자의 철학을 배웠다. 이때 답답할 정도로 정석 투자를 고집하는 백 여사를 보면서, 우량주에 장기 투자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믿음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과정과 가르침을 바탕으로 그는 실전 투자는 물론이고 가치투자에 대한 기본 개념을 갖추게 된다.      


어느 정도 기본기를 갖췄다고 생각했을 즈음, 어머니가 보내준 생활비로 주식 투자를 시작해 당시의 대한민국 증권 1번지인 명동에서 주식투자를 잘하는 청년으로 이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실제로 개인투자자로서의 이때 투자경험이 이후 그의 투자 철학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증권사, 자산운용사, 보험사, 캐피털회사를 중심으로 미래에셋그룹을 이끌고 있는 수장으로 이른바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으로 불리는 박현주(朴炫柱)의 이야기이다.     


미래에셋을 창업한 그는 은퇴 후를 대비해 미래에셋금융그룹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면서 조직을 한층 젊게 가져가겠다며 정년제도를 마련했고, 자신의 세 자녀들은 현재 미래에셋에 근무하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너 경영’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으며 이른바 한국 재벌의 등식인 2세 경영, 3세 경영이 자신의 기업에서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신선한 충격을 준 바 있다.

박현주는 책을 통해 세상을 알게 됐다. 그가 어린 시절 가장 많이 읽은 책은 위인전이었다. 성공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산다는 점을 독서를 통해 깨닫고 배웠다. 대학 시절부터 경영자가 돼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리더십 관련 공부를 열심히 했다. 박현주에게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1980)이었다. 그는 이 책을 무려 19회나 반복하며 열독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미래’라는 말에 매료됐다. 그는 미래 트렌드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이후 미래학 관련 서적을 탐독하게 됐다.     

 

이후 터진 ‘IMF 구제금융 사태’라는 초유의 국가위기 상황은 역설적으로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주식시장을 포함한 금융계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중 각종 ‘게이트’나 주가조작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이전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이는 그를 포함하여 한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투자 회사를 설립해 운영하다가, 1986년도에 동양증권에 입사하였다. 1988년부터 한신증권에서 금융상품 운용을 담당했고, 이후 32세에 전국 최연소 지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듬해 대한민국 증권사 지점 중 1위의 영업실적을 달성하였고, 곧이어 임원으로 승진하며 샐러리맨으로서의 성공 신화를 쓰며 증권가의 스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때의 조직관리 경험은 그에게 조직 구성원 개개인의 역량을 믿고 지지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했고, 이는 훗날 미래에셋 경영의 토대가 되었다.     


그가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지점훈은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였다. 여러 회사들이 고액 연봉과 승진을 제시하며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지만 오래도록 간직한 꿈과 신념이 있어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1997년 6월 회사를 나와 미래에셋벤처캐피털과 국내 최초 전문 자산운용회사 미래에셋 투자자문을 설립했다. 창업 후 6개월 만에 외환위기를 겪었으나, 소수의 시각에서 투자를 바라보고자 하는 그의 남다른 인사이트와 한국 경제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투자 성과를 이끌었다. 강남 본부장으로 승진하는 등 잘 나가던 도중 같은 강남 지역 본부의 젊은 지점장들(최현만, 구재상)과 함께 독립했다.      


1997년에 미래에셋벤처캐피털과 미래에셋 투자자문을 시초로 1998년 미래에셋자산운용, 1999년 사이버증권사 E*미래에셋증권을 각각 설립했다. 벤처캐피털 시절 외환위기가 닥치자 가격이 급락한 채권에 투자해서 대박을 쳤고, 1998년 ‘박현주펀드’로 알려진 뮤추얼펀드를 출시하면서 수익률 90% 이상을 기록한 후 99년 ‘바이코리아펀드’가 시중에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자 증시로 돈이 흘러들어 먼저 나왔던 펀드가 수익률이 올라가는 혜택도 봤다.     

그것이 바로 ‘다음커뮤니케이션’ 투자인데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테크 버블이 불면서 24억을 투자한 '다음' 주식에서만 1000억 원을 벌면서 초대박을 친다. 2000년대 초반 그 유명한 ‘디스커버리’, ‘인디펜던스’ 펀드를 출시한다. 그전까지의 펀드들은 폐쇄형 스폿형이라고 해서 몇 명 돈 많은 사람들한테서 돈을 모은 후 주식에 투자하고 일정 수익이 되면 환매하는 구조였다.      


구조상 단기투자나 작전이 횡행했는데 펀드 환매일 근처가 되면 미리 알던 기관이나 외국인들이 시장을 폭락시키는 사태까지 벌어지곤 했다. 디스커버리 인디펜던스는 공모형 개방형으로 누구나 투자할 수 있고 따로 환매일이 정해지지 않아 그 전 펀드들과는 차별점이 있었다. 이 펀드들을 계기로 소위 간접투자, 펀드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때마침 외환위기 졸업, 테크 버블, 중국 성장 등 테크트리를 제대로 타면서 2007년 호황시절에는 수익률이 1,000퍼센트에 육박한다. 이른바 ‘적립식 펀드’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소액 장기투자를 권장했고 이맘때쯤 나온 펀드가 3억 만들기 시리즈. 은행들이 판매에 가세하면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다. 국민은행에서만 단일 펀드 시리즈가 판매잔고 1조 수준에 육박할 정도였다. 당시 증권사와 은행 지점들은 ‘우리도 미래에셋 펀드를 판매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영업하는 등 웃지 못할 광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당시만 해도 ‘펀드=미래에셋’이 공식일 정도였는데 문제는 이 미래에셋이 증권인지 운용인지 생명인지 일반인들은 잘 구분하지 못했고, 생명사 가서 펀드에 가입하거나 보험 상품 클레임을 걸기 위해 증권사 지점을 방문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까지는 증권사의 존재감이 떨어지는 편으로 펀드 판매창구로서의 역할일 뿐 실질적인 주도권은 운용사에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미래에셋 디스커버리, 인디펜던스, 3억 만들기 시리즈 성공 이후 중국 증시가 엄청난 폭등을 기록하면서 미래에셋 차이나솔로몬을 위시한 중국 펀드들도 엄청난 수익을 기록한다. 이후 출시된 인사이트 펀드는 투자 대상이 따로 정해지지 않은 당시로선 특이한 형태의 펀드였는데 말하자면 주식, 채권, 원자재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투자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서 잘하면 대박, 못하면 쪽박을 찰 수 있는 구조였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박현주 펀드’로 마케팅되면서 시중자금을 단 3주 만에 4조 원 흡수하며 전무후무한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2008년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이러한 성공신화는 한순간에 타격을 받으며 휘청거리게 된다. 일단 미국을 위시한 글로벌 증시가 그야말로 반토막이 났고 미래에셋이 자랑하던 펀드들의 수익률도 당연하게 급락했다. 중국펀드는 고점에 물린 사람들은 단기간에 수익률이 -70% 정도까지 폭락하면서 증권사는 수익에 타격을 받게 된다. 그 자랑으로 불리던 펀드마저 ‘반토막 펀드’라는 오명으로 불리며 비아냥거리가 되기도 했다.      


가뜩이나 위탁 수익이 작던 상태라 펀드 잔고 급감은 여러모로 악영향을 미쳤다. 2005년도에 50~60개 정도였던 미래에셋증권의 지점 수는 2008년 초에 200개에 육박할 정도로 늘어났었는데 늘어난 지점수만큼 직원들도 많아졌던 상황이었다. 소규모였던 회사가 단기간에 급성장하기 위해선 외부 인재 영입이 필수였던 관계로 활황장에서 높은 연봉에 많은 직원들을 영입한 것이 큰 부담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하지만 곧 코스피는 회복세로 접어들었고 그는 겨우 경제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인사이트펀드는 7년이란 인고의 시간을 지나 플러스 수익률로 돌아섰다. “실패하더라도 모든 경험은 한국에 남는다”는 교훈은 그를 더욱 단단하게 다져주었다. 고통과 실패의 경험으로 쌓은 장기투자 노하우는 결국 든든한 보약이 됐다.      


2019년 3월 박 회장은 미래에셋그룹 임직원에게 과거를 회상하며 사내 편지를 썼다.      


“위기는 미소 띤 얼굴로 찾아온다. … 항상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유지하고 글로벌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길 바란다.”     


그의 그룹 이름이 ‘미래’인 것은 그가 어느 방향을 지향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박현주는 창업 초기부터 저축자산의 투자 자산화를 예견하고 개인투자자를 위한 간접주식투자상품 개발에 주력했다. 예금상품이나 채권 이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투자자들에게 높은 수익률을 제공하겠다는 목표 아래 미래에셋은 채권형 펀드가 아닌 주식투자펀드 개발에 올인했다.


성장성이 높은 상장기업 주식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주식운용에 나선 것이다. 금리가 하락하는 저금리 구조로 진입하리라는 중장기 예측 아래 개발한 주식형 펀드는 투자자에게 높은 수익률을 제공했다. 종목 선정에 있어서도 업종 대표주를 중심으로 우수기업을 선정하는 전략적 투자 개념을 도입했다. 이는 간접금융 상품에서 직접금융 상품으로 금융중개 기능이 탈은행화(Disintermediation)하는 추세와도 맞아떨어졌다.     


이는 그가 지향하는 미래를 예측하고 선도하겠다는 방향은 처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관되어온 그의 캐치프레이즈가 되어버렸다. 미래를 본다는 것은 기존의 흐름에서 1위를 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자신이 이끌어나가는 쪽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현주가 미래에셋에서 추구한 차별화 전략 중 하나인 ‘펀드 판매채널의 혁신’을 봐도 그 부분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전술했던 바와 같이, 상품 판매 네트워크가 취약했던 미래에셋은 남다른 판매 채널 전략을 채택해 큰 성과를 냈다. 미래에셋과 관련이 없는 은행과 직접적인 경쟁상대가 아닌 증권사들을 펀드 판매 창구로 이용하는 역발상이 통했다. 다른 금융회사의 견제를 받지 않고 고객을 확보하는 효과적인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은행 판매 채널은 미래에셋의 적립식 펀드 판매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끌어 냈다. 은행 적금처럼 고객이 매달 자동이체 방식으로 일정 금액을 불입하는 적립식 펀드는 중산층의 자산형성에 기여하는 상품이다. 적립식 펀드는 주식시장의 변동성 위험을 줄여주는 투자수단으로 평가된다. 이는 평균 주식 매입 가격을 낮추는 효과를 낳는다. 미래에셋은 적립식 펀드에 대한 잠재고객을 은행 창구 판매를 통해 자연스럽게 확보한 셈이다. 나아가 미래에셋생명이 적립식 퇴직연금상품을 개발해 선도적으로 판매하는 계기도 마련했다.     


증권업계의 후발 주자인 미래에셋증권은 온라인 증권거래를 통한 대폭적 수수료 인하에 앞장섰다. 미래에셋은 모든 지점 객장에 주식시세 전광판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존 위탁매매 수수료 위주의 수익구조에서 벗어나 ‘종합자산관리’ 서비스로 전환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대부분의 증권사가 고객의 이익에 반해 빈번한 매매를 유도함으로써 수수료 수입을 증대시키는 ‘푸시 전략’을 펼친 상황에서 미래에셋만의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코로나로 인한 세계경제의 흔들림은 주식과 코인 열풍으로 개미들을 지옥으로 떨궈버렸다. 주식이나 코인이 아니면 돈을 벌 수 없다는 둥 동학 개미니 어쩌니 하면서 학생들까지 등록금으로 모아둔 돈을 투자금에 쏟아부었다가 깡통을 차는 지경에 이르렀다. 방송에서 주식과 코인 열풍을 떠들정도였다면 이미 꼭짓점에서 번지점프를 할 준비를 다 마친 것임을 주식을 모르는 이들도 알고 있어야만 했다.     


주식이 침체에 이르자 갈 곳 잃은 개미들을 이끈 것은 해외선물 시장이었다. 해외선물이 새롭게 나온 상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증권사와 유사 투신사들이 열성적으로 광고를 하고 주식의 침체와 손실을 단기간 내에 선물로 회복할 수 있다는 마케팅으로 개미들을 꼬이게 하였다.     

미워하는 이에게는 주식을 소개해주고, 증오하는 이에게는 선물을 소개해주라는 그 바닥(?)의 격언이 있다.     


내부 세력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 내부 정보라는 것을 받아서 주식으로 대박을 터트린 자들은 없고, 고수라고 하는 이들에게 정보를 달라고 해서 몇 푼 먹어봐야 스스로 그것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원리나 이유 혹은 그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가 그런 방식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바 없다.     


이른바 ‘리딩 방’이라는 유사 투신사의 닥치고 따라 하기로 돈을 벌어보겠다는 안일한 마음은, 그들에게 고정적인 수수료를 제공하는 ‘호구’에 불과할 뿐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쓴다. 왜 오르는지 왜 떨어졌는지 내가 왜 돈을 날리게 되었는지 반성하지 않고 분석하지 않고 패인을 알지 못한 채 그저 그것을 복구하고 일확천금을 얻어보겠다는 심리는 백전백패로 당신을, 그리고 당신의 가족을, 그리고 당신의 주변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어들일 뿐이다.     


공부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한다.


어떤 원리인지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 안 먹고 안 입고 아끼고 아낀 수백수천수억을 투자하는 것은 확률 0%의 도박보다 오히려 더 위험한 것임을 안다면, 공부하지 않고,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막연하게 그저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이다.     

박현주에게 시련과 실패가 있었듯이 누구에게나 실패와 시련은 온다. 중요한 것은 그 실패에 대한 패인을 분석하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다시 준비하는 이는, 그저 감정적으로 이번에는 요행이 자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 기름통을 품에 안고 불길에 들어서는 자와 분명히 다르다. 그러려면 뼈를 깎는 반성과 노력, 그리고 수양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투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우리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뿐인 원칙임을 당신이 깨닫고 이해하는 날이 오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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