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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17. 2022

당신은 배워 익힌 것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

몰라서 못쓰는 자는 없다, 알면서 악용하는 자만 있을 뿐이다.

子曰: “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亦奚以爲?”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詩經> 삼백 편을 외우더라도 정치를 맡겨줌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四方에 使臣감에 혼자서 처결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운들 어디에 쓰겠는가.”     

이 장의 가르침은 짧다. 짧은 내용일수록 더 심오하고 어려운 내용임은 앞서 몇 번이나 강조한 바 있다. 세부적으로 보면 이 장은 두 가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결국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     


첫 번째는 <詩經> 삼백 편을 모두 외우더라도 정작 정치를 맡겼을 때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는 일침.     


두 번째는 그렇게 많이 공부했다고 자부하는 자가 정작 현실정치에 혼자서 놓여졌을 때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그렇게 공부한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장의 요지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아무리 배우고 익히고 공부했다고 하는 자들도 실제로 그것을 실천에 적용하여 활용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굳이 이 짧은 내용을 두 가지 내용으로 가를 것도 없는데 굳이 첫 번째 항목을 따로 하나로 나눈 이유는, 왜 하필이면 ‘<詩經> 삼백 편’을 배움의 정점으로 표기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마음에 품고 곱씹어보라는 의미에서 나눈 것이다.      


<詩經>에 대한 의미는 앞서 공부하면서 몇 번이나 설명한 바 있지만, 대강 흘려듣거나 <詩經>을 제대로 공부해보지 못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시를 모아 묶은 책을 공부하는 것과 그것을 정치에 반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고 그저 또 대강 해설 편만 보고 넘어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자는 이 부분에 다음과 같은 해설을 통해 그 궁금증의 실마리를 열어준다.     


‘專(전)’은 홀로이다. <詩經(시경)>의 詩(시)는 인정에 근본하고 사물의 이치를 다하여 풍속의 성쇠를 징험 하고 정치의 잘잘못을 볼 수 있으며, 그 말(내용)이 온후하고 화평하여 풍자해서 깨우침에 뛰어나다. 그러므로 시를 외우는 자는 반드시 정치에 통달하고 말을 잘하는 것이다.     


주석에서 주자가 설명한 바와 같이 <詩經>은 그저 시를 모은 시집이 아니다. 중국 전국에 걸쳐 각 지역의 노래를 모은 것이다. 그 노래는 백성들이 지은 민요(民謠)와 같은 것으로 그들이 겪은 생활상과 현실적인 백성들의 고충과 요구가 담겨 있다. 공자가 <詩經>에 비중을 두었던 이유는 음악적인 것도 있고, 정서적인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비중은 백성들의 목소리가 담긴 살아있는 민원이 고스란히 그 노래에 담겨 있기에 그것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 당시 그곳의 백성들이 어떤 힘겨움이 있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는데 배우는 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주 상세하고 강력했기 때문이다.     


사서오경(四書五經)에 <詩經>이 들어가는 이유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고 당시에는 물론이고 지금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고유명사나 지역 사투리가 잔뜩 들어간 시 모음집을 뭐하러 공부하느냐고 구시렁거리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그 행간의 의미에 대해 이 장을 통해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詩經>이라는 경서(經書)가 갖는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서 공자의 가르침을 통해 다시금 되새기며 이 장에서 궁극적으로 공자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에 더 다가가 보도록 하자.     


정자(伊川(이천))는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지만 묵직하게 정리한다.     


“經書(경서)를 窮究(궁구)함은 장차 실용에 쓰려는 것이니, 세상에 시를 외우는 자들이 과연 정사에 종사하고 혼자서 처결할 수 있겠는가. (절대로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그가 배운 것은 章句(장구)의 지엽적인 것일 뿐이니, 이는 배우는 자들의 큰 병통이다.”     


사실 이 주석의 핵심은 글자에 나와있지 않아 내가 괄호로 표기한 행간에 있다. 이 장의 원문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공자가 강조하면 쓴 ‘정치를 맡겨줌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四方에 使臣감에 혼자서 처결하지 못한다면’이라는 내용에 이미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점을 확실하게 꼬집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자는 이미 주석의 결론에서 그저 글로만 배웠을 뿐,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고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배우는 자들의 병통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선언적으로 일침을 가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장의 가르침은 아주 간단명료한 듯 하지만, 그 내연을 확장해놓고 보면 굉장히 다양한 현실적인 실패 케이스에 대해서 권계의 메시지를 나열하고 있다.     


여기서 배우는 자들의 병통이라고 말한 부분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확장되고 더욱 곪아 썩어 터져가고 있음을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그리고 지금 24시간 터져 나오는 엔터테인먼트 같은 정치 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을 이론으로만 배워서 실제에 사람에게 적용하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차라리 글로만 내용을 공부하고 익혀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스킬이나 응용력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실천하려는 노력을 통해 시행착오를 거쳐 바꿔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론적인 공부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이론적으로조차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서 자신이 상당한 실력자이며 숨겨진 고수이고 당대 최고의 학자인 양 입으로만 나대는 이들, 그리고 자신의 공적이 아니면서 묘하게 포장하여 마치 그런 것인 양 지금의 지위를 얻어낸 정치적인 능력만이 뛰어난 자들을 우리는 한두 명 보아온 것이 아니다.     

반대로 실전에서 날고기던 스타플레이어였던 이가 감독으로 돌아서서 자신의 플레이는 고사하고 팀워크를 아울러야 한다는 감독으로서의 기본 성취조차 이루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져 버린 예도 적지 않게 보아왔다. 오히려 플레이어로서는 제대로 된 유명세는 고사하고 주목도 받아보지 못했던 이가 뒤늦게 스타 감독으로 그 자질을 드러내는 경우가 더 많이 눈에 띈다.     


스타플레이어가 자신의 전성기를 구가하듯 관리자가 감독의 역할로서 힘을 최상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부분은 이 장의 가르침과는 조금 거리가 있기에 그 부분에 대한 논의가 다시 언급될 때 상세하게 설명하기로 하고 또 다른 사례를 살펴본다.     


교수 출신이든 국회의원 출신이든 자신들의 분야에서 차곡차곡 올라가지 않은 이가 낙하산으로 장차관으로 내려오면 내심 자신의 승진을 고대하던 국장부터 자신과 연관이 있는 상사에게 눈도장을 찍었던 중앙 공무원들은 그들에게 전문성 어쩌고를 논하며 자신들만의 리그로 윗사람을 은따시키는 과감함을 보인다. 흰머리 휘날리던 통역관 출신의 여자 장관이 마피아들에게 그런 취급을 당했던 것을 필두로 적지 않은 이들이 그런 취급을 받았더랬다.     


그런데, 정말로 그 부서에서 공무원으로 시작해서 올라왔다는 자들은 달랐던가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흰머리 휘날리던 통역관 출신의 여자 장관 이후 장관이 된 이들이나 현재 그 마피아들의 장관을 하는 자는 자신이 처음 공직을 그 부서에서 시작했으니 그와 같은 부류라고 억지로 우기며 전문성이 있는 장관이라고 떠들어대며 다닌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쪽에서 공직을 시작한 공무원도 아니다. 

게다가 그렇게 자기 부서에서 잔뼈가 굵어 국장까지 올랐던 자들이 차관이 되고 위에 올라가서 업무의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그들만의 논리일 뿐 실제로 그들 중에서 임명직이 아닌 청문회를 거쳐야 할 인물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부도덕한 행실을 당연스레 여기며 자행했는지 영혼이 탈탈 털리며 대대로 집안 망신을 당하는 흑역사를 창조하는 장면을 우리는 수차례 목도해왔다.     


그들이 과연 배운 것을 제대로 업무에 적용하는 법을 모르거나 익숙하지 못해서 그런 일을 벌인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아예 자신이 책을 통해, 그리고 선생님을 통해 배울 때는 분명히 올바른 것이라 배우고 익힌 것을 자신의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위해 사용하거나 배운 것은 배운 것일 뿐 교과서적인 윤리적 기준은 그저 책 속에 있는 것일 뿐 현실에서는 그 핵심에 해당하는 도덕적인 기준이라던가 다른 사람을 위해 배우고 익힌 것을 활용하여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실 따위 헛소리에 불과하다며 비아냥거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거들먹거리며 강단에 서서 있어 보이는 척을 해야 하거나 방송에 나와 자신이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정치인이 되었다고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썩소를 날리며 구라를 칠 때 그저 그 교과서의 내용을 언급하고 공자를 언급하고 성인을 언급한다.     

더 서글픈 사실은 일찌감치부터 ‘폴리페서’라고 불리는 교수들이었다. 학계에서 이미 학자라는 소리를 듣기보다는 ‘요령이 좋은’ 혹은 ‘연구비를 묘하게 잘 끌고 오는’ 교수로 유명했던 그들은 학술적인 연구성과에 치중하기보다 어떻게 해서든 힘이 있고 권력이 있는 자들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 나라의 눈먼 돈을 챙기는 것에 관심이 지대할 뿐이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걸치고 있던 정치 쪽으로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는 것은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의 미래가 왜 스스로 망쳐지고 암울해져가는지에 대한 원인에 대해 조금 논의를 심도 있게 확장해보고자 한다.     


미국의 교육현장에 가보면, 한국의 학생들이 대학입시에 앞서 탁월한 성적으로 서양 학생들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의 고등학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 나오는 수학 시험은 영미권의 수학을 전공한다는 학생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른바 변별력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수준이 높아지고 시험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수학과 영어를 공부한 아이들이 대학에 오고 나면, 참 묘한 일이 벌어진다. 아이들의 수학능력(修學能力)이 나날이 떨어져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어이없는 모순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지 진단하고 그것을 보완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 잘난 교육부는 물론이고 교육현장에서도 어느 한 명 제대로 메스를 들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이다. 근본적인 잘못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지만, 한정된 대학에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변별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시험을 위한 시험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블랙코미디가 계속될밖에 없다는 변명이 난무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고 고전을 읽어 보다 폭넓은 사고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얻는 것조차 작음의 현실은 교육시스템적으로 막고 있다. 한가롭게 고전을 읽는 고등학생은 교실에서나 학원가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유명한 문학작품 한 편 제대로 된 소설 한 권도 진중하게 생각하며 읽어본 학생들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이 풀어낸 언어학 수준의 영어문제나 수학과 수준의 수학 문제는 그들이 대학을 입학하는 것과 동시에 휘발되어버리는 선발을 위한 시험성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된다. 그나마 사리사욕을 위해 법을 공부했던 법비들은 그 법을 통해 나쁜 놈들을 처벌하고 억울한 사람을 구명하는 것에 사용하지 않고,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시스템적으로 형사처벌을 피해 이익을 챙길 수 있는지를 궁구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짓을 하면서 최소한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사회적 분위기여서는 안된다고 도덕적 마지노선을 암묵적으로 동의하던 과거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나마 부끄러워하던 그 일말의 양심마저 호로록 다 타버리고 그들은 그것을 노하우라고 말하고 삶의 지혜라고 당당히 떠들며 자기 부모와 자식 앞에서 자신이 슬기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기까지 한다.     

도대체 어느 지경까지 타락하고 망가져야 제정신을 차릴 것인가? 그 뻔뻔한 몰골로 정말로 수갑을 차고 수의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서도 한때의 실수일 뿐이라고 여기며 1심에 실형을 받고 2심에 슬그머니 집행유예로 나와 다시 피부과에 가서 구치소에서 상한 피부를 되살리고 그간 쌓아놓은 부정한 부(富)를 가지고 외제차 뒷자리에 거들먹거리고 앉아 그 수치스러운 마지막 자신의 직함으로 불리는 것에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않는 이 지저분한 것들과 함께 공기를 공유하는 것이 아까운 느낌은 나만 느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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