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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16. 2022

당신이 하는 일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 확신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樊遲請學稼, 子曰: “吾不如老農.” 請學爲圃, 曰: “吾不如老圃.” 樊遲出, 子曰: “小人哉樊須也! 上好禮, 則民莫敢不敬; 上好義, 則民莫敢不服; 上好信, 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 則四方之民襁負其子而至矣, 焉用稼?”     

樊遲가 농사일을 배울 것을 청하자, 孔子께서 “나는 늙은 農夫만 못하다.” 하셨다. 菜田 가꾸는 일을 배울 것을 청하자, “나는 늙은 원예사만 못하다.” 하셨다. 樊遲가 나가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小人이구나, 樊須여. 윗사람이 禮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義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信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실정〔情〕대로 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렇게 되면 四方의 백성들이 자식을 포대기에 업고 올 것이니, 어찌 농사짓는 것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이 장에서 언급된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는 표현 자체는 뒤에 공부하게 될 ‘헌문(憲問) 편’의 43장에도 비슷한 것이 등장한다. 물론 그 내용뿐 아니더라도 앞서 공부한 계강자의 다스림을 묻는 연이은 질문에서 공자가 대답해주었던 대맥이라 할 수 있는 윗사람이 솔선수범을 보이는 것이 가장 큰 다스림의 기본이라는 가르침과도 맞닿아 있다.     


앞서 번지(樊遲)가 질문하는 과정 중에 알아듣지 못하여 두 번 묻는 것 같은 모습이 등장했을 때 주자는 그 확인하는 질문 과정이 그가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예의 기본을 갖추지 위함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예의 기본과정이라고 하더라도 그 방식을 자신이 이해한 것을 확인하는 질문의 형태로 하는 제자도 있었고, 더 나아가 스승의 행간의 의미를 묻는 제자도 있었는데, 번지(樊遲)가 하는 확인성 질문은 마치 그것이 예의 과정이라고 배워 형식적으로 묻거나 다른 현대 해설서에서 번지(樊遲)의 단순 무식함을 지적하듯이 정말로 몰라서 다시 묻는 것 같은 오해를 받을 여지도 적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위정(爲政) 편’ 5장에서도 그러했었고, ‘옹야(雍也) 편’ 20장과 ‘안연(顏淵) 편’ 22장에서도 다시 묻는데, 스승인 공자에게가 아니라 정말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동문인 자하(子夏)에게 되묻는 과정을 보면 어디까지가 예를 지키는 과정이라고 들어서 형식적으로 한 것인지 오해를 받기에 충분한 구석이 없지 않다.     


이 장에서는 드디어 스승에게 소인(小人)이라는 핀잔을 듣고 뒤에 나올 19장에서는 또다시 인(仁)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천연덕스럽게 다시 묻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이 장의 대화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어느 날 번지(樊遲) 스승인 공자에게 농사일에 대해 알려달라고 묻거나 채소밭을 가꾸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는 자신이 늙은 농부만 못하다고 가르쳐줄 수 없음을 완곡히 거절하고, 늙은 원예사만 못하다는 대답으로 역시나 거절한다. 왜 번지(樊遲)가 그것을 전문가도 아닌 공자에게 권했는지 그리고 왜 그런 대답으로 공자가 거절했는지에 대한 해설을 주자는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짧은 주석으로 대신한다.     

오곡을 심는 것을 ‘稼(가)’라 하고, 채소를 심은 곳을 ‘圃(포)’라 한다.     


주자의 주석을 볼 때도 행간의 의미나 방식에 해설하는 이로서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공자의 바로 이어지는 설명에 대해 주자가 여지를 둔 것임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 의미는 조금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번지(樊遲)가 스승의 심드렁한 반응에 밖으로 나가자, 孔子는 번지(樊遲)의 어리석음에 대해 한 마디를 던진다. 주자는 소인(小人)이라는 언급에 대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小人(소인)’은 細民(세민, 서민)을 이르니, 맹자가 말씀한 ‘소인의 일’이란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르침이 이 장의 핵심이다.      

윗사람이 禮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義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信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실정〔情〕대로 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렇게 되면 四方의 백성들이 자식을 포대기에 업고 올 것이니, 어찌 농사짓는 것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이제 왜 번지(樊遲)가 스승에게 농사를 짓는 방법에 대해 물었는지 그리고 왜 공자가 자신은 농사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말로 거절했는지 그 배경을 짐작할만한 설명이 나왔다. 명확하게 왜 번지(樊遲)가 농사일을 물었는지에 대해 파악할 수 없지만, 공자가 가르쳐 줄 것을 완곡히 거절했던 이유는 농사를 짓는 것이 배우는 자들이 알아야 할 근본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림을 먼저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강조한다.   

  

그 의미가 확 와닿지 않는 배우는 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로 공자의 가르침을 부연한다.     


禮(예) · 義(의) · 信(신)은 大人(대인, 위정자)의 일이다. 義(의)를 좋아하면 일이 마땅함에 합한다. ‘情(정)’은 성실함이다. 공경하고 복종하고 실정대로 함은 각기 그 類(류)에 따라 응하는 것이다. ‘襁(강)’은 실로 짜서 만들어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묶어 매는 것이다.     


굳이 위정자를 대인(大人)이라 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을 소인(小人)으로 폄하한 것이라 이해한다면 그것은 근시안적인 공부로 자신의 한계를 긋는 것이니 경계할 필요가 있다. 공자가 여기서 번지(樊遲)에게 소인(小人)이라고 한 것은 근시안적으로 당장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만 근시안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핀잔을 준 것이지, 농사짓는 농부 자체가 소인(小人)이라는 의미로 한정되어 사용된 것이 아니다.     


농부도 농부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식물을 경영하고 땅을 경영하지만, 백성들을 그리고 국민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일이 보다 더 큰 일이고 중차대한 일임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은 공자가 갑자기 농사를 잘 지을 수 없고, 채소밭을 원예사처럼 능숙하게 할 수 없다는 거절의 설명과 맞닿아 있다. 공자가 했던 것은 땅을 경영하고 농사를 짓는 일이 아니었다. 공자가 무엇보다 잘하는 것, 그래서 가르치는 것은 세상을 경영하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이었다. 그런데, 번지(樊遲)가 어떤 의도에서 그런 질문을 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뜬금없이 농사일이나 채소밭을 스승에게 묻고 가르쳐달라는 질문은 공자에게 있어 다소 굴욕적인 질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스승을 우직하게 따르던 번지(樊遲)가 스승을 능멸하기 위해 그런 질문을 했을 리가 없다. 때문에 공자는 번지(樊遲)가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상황이나 그 의도에 대해서 명확하게 읽어냈을 것이다. 번지(樊遲)가 이 장에서 다스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물었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스림의 큰 궤로 대답을 대신한 것은 아마도 그에 합당하는 대화가 오가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윗사람이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그의 그 모습을 따르려고 사방에서 몰려들 것이라는 설명의 가르침은 뒤에 공부하게 될 본편 16장의 가르침과 맞닿아 있다. ‘近者說 遠者來(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며,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오도록 하는 것)’이 바로 다스림(정사(政事))의 기본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굳이 번지(樊遲)에게 대놓고 설명을 해줘도 되는데 완곡하게 늙은 농부나 늙은 원예사만 못하다고 말한 것이나, 바로 꾸짖거나 탓하지 않고 번지(樊遲)가 자리를 뜰 것을 기다렸다가 가르침을 남긴 공자의 행동이 갖는 의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배우는 자들을 위해 양 씨(楊時(양시))가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정리한다.     

“樊須(번수)가 聖人(성인)의 문하에 있으면서 농사짓는 방법과 菜田(채전) 가꾸는 일을 물었으니, 뜻이 비루하다. 공자께서 말씀하여 물리치심(열어줌)이 옳을 터인데, 그가 나가기를 기다린 뒤에 그의 잘못을 말씀하신 것은 어째서인가? 그가 물었을 때에 스스로 늙은 농부와 원예사만 못하다고 말씀하셨으니, 거절하기를 지극히 하신 것이다. 번수의 학문이 의심컨대 이에 미치지 못하여 능히 묻지 못하였으니, 이는 한 귀퉁이를 들어 일러줌에 이것을 가지고 세 모퉁이를 반증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해 주지 않으셨고, 그가 이미 나감에 미쳐서는 끝내 깨닫지 못하고 늙은 농부와 늙은 원예사를 찾아가 배운다면 그 잘못됨이 더욱 커질까 두려웠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하시어 앞에서 말한 것이 뜻이 다른 데에 있음을 알게 하신 것이다.”     


이 마지막 주석은 이 장의 가르침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소상하고 세밀하게 일러준다. 무엇보다 가장 기본이 되는 가르침은 자신보다 46살이나 어린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우직한 아이가 스승은 무엇이든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겨 농사일을 묻고 채소밭은 어찌 가꾸는지를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聖人) 공자는 그 어리고 어리숙한 제자 번지(樊遲)의 면전에서 탓하지 않고, 그가 물러설 것을 기다려 조용히 가르침을 준다.     

물론, 번지(樊遲)는 그 가르침을 받는 자리에 있지 않으며, 그 가르침의 무게는 그가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가르침의 경지를 넘어선다. 아마도 우직한 번지(樊遲)는 밖으로 나가 늙은 농부나 늙은 원예사를 찾아 농사와 채소밭을 가꾸는 법에 대해 물으러 찾아가는 우직함을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자에게는 그가 할 행동이 모두 눈에 선하게 읽혔을 것이다.      


배움이 일정 정도에 다다르면 사람들의 생각이 보이게 된다. 바둑을 배우게 되면 하수들이 어디에 바둑돌을 놓은 지 그리고 왜 그런 짓을 하는지조차 읽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그래서 고수는 하수들이 어디에 돌을 놓던지 간에 여유 있게 그들의 실수를 추궁하며 어렵지 않게 바둑의 승리를 얻어낸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을 읽어낸다. 바둑은 승부를 얻고자 하는 게임이다. 고수가 하수의 실수를 추궁하여 이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닌 하수인 제자에게 가르침으로 일깨움을 던져 성장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하수의 팔목을 비틀 듯 간단히 이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한편, 하수인 제자에게 일국(一局)을 통해 성장하게 만드는 것이 어려운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은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이 없을 때에도 스스로 성장하고 생각하고 스승의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다.     


바둑도 그리 복잡하고 어려울진대, 세상을 경영하는 것은 어떠한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이 장의 마지막에 담겨 있는 공자가 한 모퉁이를 들어 나머지 세 모퉁이를 깨닫게 하고자 하는 가르침의 정수에 다름 아니다.     

바둑은 한 사람과의 일전이지만, 세상을 경영하는 것,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일국의 바둑보다 훨씬 더 복잡다단하다.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일정 경지에 올라 어리석은 자가 어떤 생각에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지 그리고 왜 그가 사리사욕을 위해 그런 잔머리를 굴리는지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간단한 일국(一局)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때로는 같은 사리사욕을 목적으로 혹은 각자의 사리사욕이지만 그 행동의 방향은 같은 곳을 향해 있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꾼들이 벌이는 정당정치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에는 지워졌을 거라며 그들은 키득거리고 있을지 모르나 2년여 전 빨간당은 국회 선진화법을 어기고 학교를 다닐 적에 데모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것들이 국회에서 스크럼을 짜고 법률을 어기고 몸으로 힘으로 다른 국회의원을 감금하고 법을 저지하기 위해 온갖 위법을 저질렀다. 이른바 국회 선진화법을 어긴 혐의로 기소된 그들은 2년이 넘어 3년이 다 되어가도록 형사처벌을 받은 이들이 없다. 그들 중에는 검사 출신 판사 출신의 법비들은 물론이고 날고기는 정치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폭우로 인명(人命)까지 앗아가 버린 현장에 현역 국회의원도 아닌 이가 자기 지역구라며 모여 키득거리며 망언을 하는 것이 고스란히 영상을 탔어도 사람들이 그냥 혀만 끌끌 차는 상황이 정상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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