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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18. 2022

왜 당신이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다고 생각하는가?

위정자에게 솔선수범을 최우선 덕목으로 강조하는 이유

子曰: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하더라도 따르지 않는다.”     

이 장에서는 앞서 일관되게 다스림의 정수로 지적했던 위정자 자신이 바르게 서며 따로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백성들이 따르고 사회가 바로 선다는 가르침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너무도 명료한 가르침에 주자는 따로 이 장에 대해 주석을 달고 있지 않다.     


다산(茶山;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이 장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실질적인 현장의 다스림을 앞에 붙인다.     


“束吏之本, 在於律己.(아전을 단속하는 일의 근본은 자기 스스로를 규율함에 있다.)”     


그런데 이 장도 자세히 뜯어보면, 의문이 없이 명료하지만도 않은 내용이 분명히 있다. 예컨대,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해결해야 한다. 도대체 왜 위정자에 대한 솔선수범이 중요하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이 장은 가지고 있다. 그 근거는 바로 ‘명령’이라고 해석한 단어와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바로 위정자가 법령(명령)을 제정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법령은 상식을 넘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강제적인 방식으로 사회 구성원에 해당하는 백성들을 규제하기 위해 제정하는 것이다. 다분히 위정자의 통치 의도가 반영된 정치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것이 위정자의 솔선수범과 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은가?


자신이 그렇게 하지 말라며 일부러 법령(명령)을 제정하여 내려놓고서는 자신이 그것을 지키지 않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한 가지로밖에 해석할 여지가 없다. 바로 자신이 초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다른 이들이 따르라는 전근대적인 제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정신 나간 통치자의 착각과 오만에서 오게 된 것이다.     


이 논의를 좀 더 깊이 있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법령이 누구를 위해 왜 지정하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공자의 시대에는 법령을 당연히 위정자가 지정했다. 지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전술한 바와 같이 상식적으로 법령을 정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를 넘어서 사회가 복잡다단화하고 사람들의 범죄행위가 거칠어지면서 그것을 규제하기 위한 처벌을 공식화하여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이유가 컸다.     


물론 범죄행위나 금지를 위해, 혹은 처벌을 규정하기 위한 법령(명령) 외에도 복지를 위한 다양한 법령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요한 법령의 제정이유는 사회질서를 위한 규제책이 기본인 것처럼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사실 법령의 본래 제정이유는 잘못된 이들이 많아져 그들을 규제하고 처벌하기 위한 것이 주가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위정자가 사회를 바로잡는 데 있어 백성들이 편하게 살고자 만드는 것이었다. 


너무 뻔한 소리 같지만 다시 한번 그 의미를 새겨보자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이 장에 비추어 확인할 수 있다. 위정자가 나라를 다스리기 편하기 위해 제정하는 것이 법령이 아니라 백성들이 살기에 편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만드는 것이 법령이라는 의미이다. 법령의 제정 취지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백성들의 삶이 그들의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되게 하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법령이라는 것이 본래 탄생한 취지는 바로 백성을 위함이었다는 것에 이론을 제기하는 자는 없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부터 그것은 오염되기 시작했다. 위정자들의 정무적인 판단이 들어갔고 정치적인 행동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 시대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정자의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 백성들에게 공포정치를 하거나 자신에게 쏠리는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위한 정치적인 퍼포먼스로도 악용된 바 있다.     


새삼스럽게 세계 정치사를 언급하고 설명할 의도는 없다. 이 장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법령(명령)을 만드는 자가 왜 솔선수범을 해야 하는지를 파악하려고 이 설명이 나온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편함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나에게 오롯이 편할 리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예(禮)라는 것이 마냥 편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을 하면서 누차 설명한 바 있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것은 내가 편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편할 수도 없다.     

공자는 이 장의 짧은 가르침 속에 그렇지 못한 위정자들의 내로남불을 먼저 꼬집고 있다. 자신이 편하고자 만드는 것이 법령이 아닌데, 자신은 지킬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백성을 편하게 통치하겠다고 만다는 것은 법령일 수 없다는 일침이 바로 이 장에는 담겨 있다.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위정자 역시 법령을 지켜야 할 백성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 공자가 당대에 보아왔던 위정자들은 치외법권, 아니 초외법권자들로 감히 그들에게 법령의 잣대를 들이밀 수 있는 법령 집행자는 없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직언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 장의 의미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조선 선조 7년(1574년) 조헌(趙憲)은 차마 작성하고서 올리지는 못했던 상소문에, 군주의 명령이 엄하게 지켜지게 하려면 군주 자신이 三畏(삼외)를 공경해야 한다고 했다. 그가 말했던 三畏(삼외)란, 공자가 ‘季路(계로) 편’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 天命(천명)을 두려워하고, 大人(대인)을 두려워하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세 가지를 가리킨다. 해당 장에서 더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천명(天命)이란, 일상의 몸가짐을 삼가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함을 말하고, 대인(大人)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계책을 가지고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는 사람을 가리킨다. 성인의 말씀이란, 경전과 역사에 실려 있는 교훈을 말하는 것이다.     

세 가지 두려워할 것이라는 표현도 자극적이지만 그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대상은 결코 법령을 지키지 못해서 처벌을 받을지도 모를 것이라는 무지한 백성이 아니다. 그 법령을 제정하고 그것을 준수하라고 시행해야 하는 위정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항목 모두에 위정자의 솔선수범이 강조되고 또 강조된다.     


그렇다면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들어가 보자. 왜 위정자들이 편하고자 만든 법령을 위정자들이 어기게 되는 것인가? 앞서 예법을 예로 들었으니 예법으로 이해해보자. 상대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걸음걸이를 공손히 하고 말을 공손히 올려서 하는 것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편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부러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상대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 내가 그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예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법을 지키는 것이 내가 편하기 위한 것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법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상호적인 작용이 일어나야만 한다. 상대가 예를 갖추어 나를 대하게 되면 상대가 나를 얼마나 존중하는가를 마음으로 느끼기 때문에 내가 상대에게 예를 갖추는 그 외적인 불편함이 더 큰 내적인 만족감으로 상쇄된다. 즉, 현대인들이 오해하듯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예법은 겉치레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에 행실과 말투가 공경스럽게 이루어지는데 쌍욕을 하고 서로 언성을 높이는 문제가 발생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어느 한쪽이 그것을 무시하거나 내가 받는 것은 좋지만 내가 하는 것은 불편하고 귀찮다고 내팽개치고 심지어 그 무례함을 지적했을 때 자신의 특권(부나 명예)을 내세우며 자신은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상호 정해진 사회적인 약속을 깨면서 불화(不和)가 일어나게 된다.     


아주 간단한 예가, 한국 정치계의 신박한 신조어 ‘내로남불’되시겠다. 다른 사람이 무단횡단을 하면 붙잡아 벌금을 매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내가 급해서 무단횡단을 했을 때는 그저 특수한 상황으로 봐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내가 바로 무단횡단을 했다고 끝까지 쫓아와 벌금을 매겼던 경찰이 바로 뒤에 국회의원이 무단횡단을 하는 것을 보며 경례까지 부치는 것을 본다면 어느 속 좋은 사람이 그 규정이 혹은 그 경찰이 혹은 그 사회가 제대로 되었다고 여기며 법령을 따르겠는가?     


이 장에서 공자가 지적한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일관된 선 위에 있음을 깨달으라고 소리치고 있다. 법령(규정)을 제정하는 이유는 그것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많아서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일부러 제정한 법령(규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일벌백계해서라도 사회질서를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이, 혹은 자신의 친척이 혹은 자신과 막역한 사이에 있는 자가 그것을 어겼을 때,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을 처벌하듯이 처벌할 수 있어야만 그 법령(규정)이 본연의 설립 취지에 따라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가장 기본에 해당하는 것은 법령을 제정한 자가 그것을 준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그 이전 상태의 근본을 돌아보라고 강조한다. 애초부터 그 법령을 지정하게 된 이유는 백성들이 그것을 어기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위정자가 그리고 그의 측근이라는 자들이 그것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이 공자의 분석이다. 만약 그들이 먼저 그런 행동을 보이지 않고 그런 일탈을 하지 않았다면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저들도 그렇게 하니 우리도 그렇게 해도 되지 않는가?라는 학습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장의 핵심은 바로 그 교육과정에 있다. 솔선수범을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공자가 기본적으로 백성들을 소인이라고 여겨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자는 기본적으로 백성들이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게 된 원인은 그저 인간의 본능적인 악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된 행위마저도 교육과정을 거쳐 무언가를 보고 인지하고 그것이 자신의 사욕(私慾)을 채우는 것에 도움이 된다고 알게 되었기에 악화를 구축하게 된다고 본다.     


즉, 본래 악행이나 사욕(私慾)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며 발전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칭 배웠다고 하는 자들이 보이는 행동을 보며 교육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악화가 구축되어간다고 본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분석과 설명은 수천 년이 지난 현대 사회에도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맞아 들어간다.      


경성제대의 교수들이나 고위 공직자라는 자들이 연구비를 횡령하거나 업무추진비를 자신의 쌈짓돈처럼 쓰고, 자신이 부양하지도 않는 부모님을 부양하는 것으로 서류를 꾸며 그 얼마 안 되는 부양수당까지 알뜰히 청구하거나 명의를 분리하여 투자를 목적으로 부동산을 사고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법인을 설립하는 등의 편법을 구사하는 것은 대부분 그들이 직접 하지 않는다. 그러면 대학 직원, 밑에서 그 일을 수행해야 하는 하급 공무원, 혹은 부동산 업자, 심지어 브로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새로운 편법 과정을 통해 그들이 하는데 왜 자신들은 할 수 없느냐며 당당하게 그 악행을 답습하고 더 대범하게 일을 벌인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하급 공무원이나 은행의 창구 직원이 수십억 혹은 수백억의 횡령을 자행하는 사건은 도무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수십수백억의 돈을 횡령하여 자신의 돈인 양 쓰고서도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버젓이 자기 자리에 있다가 체포되는 간 큰 하급 공무원, 창구 직원들을 보게 되었다.      


공자의 시대에는 법령을 위정자가 만들었지만,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령의 제정은 국회의 주요 역할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이른바 현대의 위정자라 불리는 정치꾼 국회의원들에 대한 국민들의 질타는 더욱 거셀 수밖에 없다.     


어제 새 정부가 들어선 지 100일째라며 포부도 멋지게 즉흥 기자회견에는 쥐약이라는 핸디캡을 가지 이가 주제와 상관없이 어떤 기자의 질문도 허용하겠다며 회견장에 섰다. 아무도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자회견이라는 것을 보았다.     

마네키네코마냥 고개를 연신 돌리는 것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되었지만, 역대 최저 지지율이라는 문제점에 대해 반성이나 그 대안은 고사하고 그가 더듬거리며 국민들의 절반 이상은 알아듣지 못할 브리핑 내용은 새 정부가 100일 동안 해낸 훌륭한 일이라는 업적에 대한 자기 찬사였다. 새 정부가 들어서서 잘한 일에 대한 업적 브리핑은 대통령이 기자회견장에서 대학생 1학년이 더듬거리며 읽어 내려가듯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여 발표할 내용이 아니다. 업적 평가를 하는 짓은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통해 광고할 때 써도 어이가 없다며 욕을 먹는 것이다.      


반장을 뽑고 100일이 지났는데 반이 개판이고 학생들이 반장이 개판이라 반이 개판이라고 욕설이 난무하여 담임이 반장을 교무실로 불렀다. 반장이 다짜고짜 자신이 100일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처리했는지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앉아 있다면, 담임이 그걸 뿌듯이 듣고 앉아만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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