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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19. 2022

바르게 따를 수 있는 전례가 없어서 못 따르겠는가?

사욕에 맞추려니 앞뒤가 안 맞을 뿐인 것을.

子曰: “魯衛之政, 兄弟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魯나라와 衛나라의 정사는 형제간이로구나.”     

일곱 글자, 그것도 형이상학적으로 곱씹을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닌 그저 사실관계에 대한 진술이 다이다. 배우는 자들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논어>를 처음 보는 초심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내용이 왜 별도의 장으로 <논어>에 실렸는지, 아니 어떻게 이런 내용조차 한 장으로 소개될 수 있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을만한 내용이다.     


이 뜬금없는 일곱 글자에 고개를 갸웃할 배우는 이들을 위해 주자는 무슨 의미에서 공자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     


노나라는 周公(주공)의 후손이고 위나라는 康叔(강숙)의 후손이니 본래 형제의 나라이며, 이 당시 쇠하고 혼란하여 정사도 서로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탄식하신 것이다.     


촌철살인(寸鐵殺人).

이 일곱 글자의 행간에 그저 형제의 나라라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망해가는 꼬라지가 똑같다는 비판과 탄식이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이런 이야기가 튀어나왔는지는 구체적으로 고증된 바 없으나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건대 공자가 위나라에 있을 당시 자신이 적통(嫡統)이라고 여기던 고국 노나라와 위나라가 그 뿌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나왔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유추만이 가능할 뿐이다.     

정작 자신의 고국, 노나라에서 계손씨를 비롯한 삼환(三桓)의 전횡으로 인한 혼란에 실망하여 도저히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을 것에 절망하고 들어간 위나라를 보니 위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인물들이 나라를 좀먹고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을 위정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더라도 발견할 수 없었던 현실이었다. 영공(靈公)이 살아있을 때는 영공과 그 부인 남자(南子), 그리고 주변에 있는 자기 사리사욕만 추구하는 간신배들 때문에 나라는 조용할 날이 없었고, 그렇게 영공이 세상을 뜨자 다음에 등장한 출공(出公) 첩(輒)과 그 아버지 과외(蒯聵) 사이의 치열한 권력 투쟁과 그로 인한 국론의 분열로 위나라는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공자의 천하주유를 표기한 지도

공자의 이 탄식은 여러 가지 회한을 담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도통(道統)을 계승하는 노나라가 제대로 예악을 갖추고 바로 섰다면 위나라 역시 그 모습을 보고 굳이 누군가 바로잡으려 들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그 풍모가 전파되어 바로 섰을 것이라는 회한이 가득 담겨 있다. 이제까지의 공자의 가르침에 의하면, 어른이 되는 자, 먼저 가는 자, 백성들을 다스리는 자가 먼저 솔선수범으로 그 바름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주변은 바로 서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정작 노나라의 정치 상황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권력을 잡은 자들의 그 참람된 행동들로 인해 엉망이 되어버린 질서와 예악이 결국 악순환을 이루면서 천하가 썩어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여 더욱더 깊은 탄식이 나왔을 것이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나라라도 그럴진대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곳이 이렇다는 것은 노나라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을 먼저 강조한 것이고, 위나라에서 배울 것이 없어 그렇게 되었다는 묵직한 돌려차기식의 비판에 다름 아니다.     


형제의 나라이니 서로 배워가며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공자의 바람이었는데, 오히려 안 좋은 것만 보고 배워 더 악화되어 가는 악순환의 고리를 이어나가 그것이 천하에 퍼져나가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난형난제(難兄難弟)가 되어 버리고 만 상황에 대한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형제의 나라가 아니라 하더라도 주공(周公)의 가르침을 정치에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위정자라면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음을 공자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이 장을 통해 가장 비근한 노나라와 위나라의 관계를 언급한 의도에는 더욱 묵직한 핵펀치가 들어가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모범이 되어야 할 나라가 그렇지 못한 것도 문제이지만, 성현들이 남긴 가르침을 찾지 어렵고 배우기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것을 제대로 계승하여 따르려는 자들이 없는데, 형제의 나라라고 연관이 있고 가까운 위나라조차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데, 아무런 연고도 없고 거리상 먼 다른 나라들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당대 삐뚤어져가는 세태에 대한 일침을 담은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현의 가르침을 껍데기만 배운 자들이 오히려 그것을 곡학아세(曲學阿世)하면서 자신의 사욕(私慾)을 채우는 것에만 사용하여 세상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에는 사용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 근래 공부했던, 계강자(季康子)의 다스림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이 장에 이르기까지 공자의 일관된 가르침은 ‘위정자의 솔선수범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엊그제 새 정부가 출범한 지 100일이 되었다며 대통령이라는 자가 기자회견을 자청하였다.     

뜬금없이 대통령실 대변인도 아니고 홍보수석도 아닌 대통령이 직접 읽어 내려가는 원고의 절반 이상을 100일 동안 자기 정부에서 이룬 성과랍시고 떠들어대는 것을 보면서, 굳이 하나하나 지적하지 않더라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과 경제 공황사태로 흘러 한국의 부동산이 주춤한 집값까지도 자신들의 정책이 획기적인 성공을 거둔 성과라고 침을 튀겨가며 말하는 것에는 고개를 돌리는 정도가 아니라 리모컨을 화면에 던질뻔한 분노를 삭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자신을 지지하던 지지율의 절반이 넘게 박살 나서 날아가버린 원인을 묻는 기자의 첫 번째 질문에 답변이랍시고 억지로 여유 있는 척 굴며 내놓은 동문서답도 못지않았다. 사실 그 첫 질문은 가장 뼈아픈 질문일 수 있는 자기반성의 판을 깔아준 배려 섞인 질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준비된 같잖은 수박껍데기 핥기로 일관하였다.     


‘국민을 받들고 면밀하게 지금까지 잘못된 부분은 들여다보고 있으니 제대로 돌아보고 잘못된 부분을 찾아보고 고치겠다.’      


겉은 번드르르해 보이지만 실제적인 내용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속 빈 강정식의 답변이 일관되게 시작되었다. 그에게 아부하려는 보수언론 출신의 늙은 자는 서슴없이 ‘질문이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답변이 구체적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말장난으로 그걸 의견이랍시고 변명해댔다.     

<논어>를 읽으며 내가 우리의 세태를 조명하는 것은 <논어> 공부가 단순히 고문을 공부하기 위함이거나 공자의 깊은 뜻을 되새기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르기 위함이다.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여 잘못을 반성하고 그것을 고쳐나가는 것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가르침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배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본연의 진리에 충실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다소 피로감이 느껴질 수도 있는 정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국정농단 사태 이후 정치가 엔터테인먼트화 되면서 국민들은 정치를 예능만큼이나 우습게 쉽게 접한다. 아니, 좀 더 면밀하게 보는 이들은 느끼겠지만 실제 한국 정치는 어떤 예능보다 재미있고 어이가 없으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허탈감을 느끼게 만든다.     


예컨대, 요 며칠 전 공부에서 본 바와 같이 법령을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법령을 만드는 이들이 그것을 솔선수범하여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였다. 군사정권에 반발하여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라며 항거했던 수많은 민주투사들에게 판사복을 거들먹거리며 흔들고 자리에 앉아 실형을 선고하여 그들을 전과자로 만든 이들이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국회 선진화법이라는 법령을 자신들이 만들어놓고 학교 다닐 적에 가투 한번 나가본 적도 없고 화염병은 고사하고 스크럼 한번 짜 본 적이 없는 작자들이 국회 복도에서 어깨너머 슬쩍 봤던 데모 흉내를 내고 법 제정을 막겠다고 동료 국회의원을 감금하고 문서 팩스를 찢어버리는 짓까지 하고서는 수년이 지나도록 형사처벌을 받고 있지 않는 것이 바로 당신들의 나라이다.     

자신이 무려(?) 쉰이나 되었고 검사 짓을 20여 년을 넘게 했다면서 당당하게 자신이 장관으로서 부족한 점이 없는 전문가라고 당당하던 법무부 장관은 목소리를 높여가며 연일 방송에 나와 자신의 정치적 포인트를 쌓는다고 착각하는지 신이 나서 새 정부의 변죽을 울리고 그 중앙에 서 있다.     


그의 말처럼 검수완박 때문에 깡패들이 설치기 시작하고, 마약 청정국에서 마약에 찌든 나라로 전락하게 된다면서 검사들만이 이 나라를 구할 것이라고 떠들어댄다. 그렇게 언론에 나대고 싶어 하는 그가 왜 전직 법무부 차관이라는 이가 버젓이 옷 벗고 여성을 유린하는 화면에 그의 얼굴이 판별되지 않는다는 검찰의 의견이 나왔을 때는 함구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 당시에도 그는 검사였고, 지금은 법무부 장관이지 않은가?


전직 법무부 장관인 서울대 법대 교수의 딸이 그리고 그 아들이 기득권자들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한 짓을 기소해놓고서 자신의 딸이 벌인 부정행위가 언론에 드러나고 그 일에 자신의 처형과 그녀의 딸이 연루되었다고 하는데 왜 그는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더 이상 언급을 회피하자고 하는가?     

검사로서 대통령의 오른팔 역할을 한 이가 그렇게 날뛰고 소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지경이니, 그것을 보고 배운 망둥어들이 뛰지 않을 리 있겠는가? 대통령이 검사일 때 그 검사실의 검찰 수사관 출신이라는 자마저도 정치하겠다고 튀어나와 대통령이 그 능력을 검증했다면서 뜬금없이 여당 비대위의 위원으로 추천되는 이 상황에 도대체 무엇을 보고 따를 것이며 무엇을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늘 지적되는 고질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경찰과 검찰이 썩은 조직이라 지탄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외부나 제3의 기관이 감찰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해결은 아주 간단하다. 그들의 비리와 부정에 대해 수사하고 감찰할 수 있는 기관이 생기고 그 기관에서 제기능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면 된다.


사실 그 첫걸음이 문재인 정부에서 사법개혁을 목놓아 부르고 제정한 ‘공수처’였다. 지금 공수처가 없나? 그런데 지금 공수처에서 그 수사를 하고 있다는 자들의 면면을 보라.      

고품격 스릴러 반전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너무도 정의롭고 너그러운 미소를 띄우는 자가 결국 부정을 저지른 자들과 가장 가까웠던 사이임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장면을 마주하는 것이 반전이 아닌 당연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만한 일이네.’라는 말은 옛말이다. 소설 이론의 가장 기본 ‘개연성’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는 현실에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은 아예 소재로 삼지 않는다.      


어제, 뉴질랜드에서 현지 남자 직원을 성추행했다고 하여 나라 망신을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엔 네덜란드의 대사관에서 문제가 터졌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왜 뉴질랜드 대사관에서 인도 국적의 직원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인도 출신의 남자 40대 남자 직원이 20대 한국 여자 행정직원을 지속적으로 성추행했다고 한다. 참다못한 20대 여자 직원은 증거가 될만한 정황을 모두 녹취하여 대사관에 성추행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외교부에서는 남자 직원에게는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내리고 휴대전화에서 연락처를 삭제하고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동선 분리 조치를 했단다. 대기업도 아니고 현지 한국 대사관이다. 동선이 얼마나 넓은 지는 모르겠으나 그 좁은 공관에서 과연 여자 직원은 언제 어디서 그 남자 직원을 다시 만날지 두근거리는 하루하루를 보냈어야만 했음에도 외교부는 그렇게 안일하게 일처리를 끝냈다.     


보도로 진상이 불거지자 외교부는 '이번 사안을 관련 지침에 따라 엄중히 처리했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되풀이했다. 엄중한 처리? 그 인도 남자 직원이 얼마나 대단한 임무를 수행했기에 그렇게 일처리를 했는지에 대해 세부적인 진실까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여자 직원은 결국 사직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택했다. 이쯤 되면 도대체 누가 피해자인지를 헷갈리게 된다.     


이 장의 가르침은, 악순환에 대한 비판이다. 멋모르는 자들이 이 고사성어를 마치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그들의 실수를 탓하기 전에 형이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고 동생이 그것을 따라 함께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공자의 이상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악화를 구축하고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누구인가? 영화에서처럼 세계 정복을 하려는 대단한 빌런 따위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겠다며 배우고 익힌 것을 활용(?)하는 그 간악한 존재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의 피라미드 구조로 양산되는 수많은 악은 결코 본래 악이 아닌 당신의 주변에 있는 바로 그들이고, 당신이라는 것을 언제쯤 깨닫고 고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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