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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22. 2022

당신은 얼마나 가져야 만족할 수 있는가?

결국 문제는 판단을 내리고 느끼는 내가 아닌가?

子謂衛公子荊: “善居室. 始有, 曰: ‘苟合矣.’ 少有, 曰: ‘苟完矣.’ 富有, 曰: ‘苟美矣.’”     
孔子께서 衛나라의 公子 荊을 두고 다음과 같이 논평하셨다. “그는 집에 거처하기를 잘하였다. 처음 (집을) 소유했을 때에는 ‘그런대로 모아졌다.’ 하였고, 다소 갖추어졌을 때에는 ‘그런대로 갖추어졌다.’ 하였고, 많이 소유하고 있을 때에는 ‘그런대로 아름답다.’ 하였다.”     

이 장에서는 공자(公子) 형(荊)이라는 위(衛) 나라 大夫에 대해 공자가 평가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공자(公子) 형(荊)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사료로 고증되어 있지 않지만, <좌전(左傳)>에 위나라 양공(襄公) 29년에 오(吳) 나라의 공자(公子) 계찰(季札)이 위(衛) 나라에 갔다가 그 나라의 어진 대부들과 만났다는 언급을 하는 부분에서 역시나 등장한다.     


당시 계찰이 만났던 인물 중에서도 특별히 어질다고 평가하며 언급한 군자가 여섯 명 있었는데 바로 거원(蘧瑗), 사구(史狗), 사추(史鰌), 공자(公子) 형(荊), 공숙발(公叔發), 공자(公子) 조(朝)가 그들이다. 여기서 사추(史鰌)는 뒤에 ‘위령공(衛靈公) 편’ 6장에 나오는 사어(史魚)이다.     

오나라 계찰

정확하게 공자(公子) 형(荊)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자(公子) 형(荊)의 인간적인 품격에 대해서는 이 장의 공자의 논평으로 아낌없이 드러난다. 먼저 주자가 이 이 장에 대해서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公子 荊(공자 형)은 위나라 대부이다. ‘苟(구)’는 그런대로 대강〔聊且粗略(요차 조략)〕이라는 뜻이다. ‘合(합)’은 모음이요, ‘完(완)’은 완비함이다. 순서를 따르고 절도가 있어서, 빨리 하고자 하고 극진히 아름답게 하고자 함으로써 그 마음을 얽매지 않았음을 말씀한 것이다.     


주자가 순차적으로 설명한 ‘合(합)’, ‘完(완)’, 그리고 ‘미(美)’의 개념 앞에 사용된 ‘苟(구)’와 합쳐져 그 의미가 어떻게 해석되고 이해하는가가 이 장을 이해하는 키워드이자 핵심 개념이다. 위의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 나는 목적어를 ‘재물’이라고 하지 않고 앞에서 먼저 언급된 ‘집(室)’이라는 개념이 나왔기에 그렇게 해석했는데 결국 ‘사재(私財)’를 대표하는 가시적인 부(富)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큰 범주에서 같다.     


‘合(합)’, ‘完(완)’, 그리고 ‘미(美)’의 개념 앞에 사용된 ‘苟(구)의 뜻을 해석함에 있어 내가 ‘그런대로’라고 풀이한 것은 그 세 가지의 용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만으로는 공자의 평가가 가지고 있는 행간의 의미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개념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일관된 하나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환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대로’라는 의미는 그 세 단계에 있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이 자신의 판단이나 생각에 영향을 줄만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공자가 굳이 부가 많아지는 세 단계로 설명하고서도 그거에 대해 공자 형이 ‘苟(구)’와 ‘合(합)’, 그리고 ‘完(완)’으로 표현한 것에는 일반인들과의 생각이나 표현에 비해 상당히 다른 부분을 보여준다. 그 가장 큰 차이는 부정어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갖춘 것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은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안다. 그런데 공자가 공자 형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도 부정적인 평가도 하지 않고 그저 그가 어떻게 말했는지만을 보여주고 서술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이 장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 가르침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그래서 공자가 의도했던 가르침에 대해 배우는 자들이 다시금 생각할 수 있도록 양 씨(楊時(양시))는 다음과 같이 이 장을 정리한다.     


“완전하고 아름답게 하기를 힘쓰면 마음이 물욕에 얽매여 교만하고 인색한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공자 형은 모두를 ‘그런대로’라고 말할 따름이었으니, 이는 외물로 마음을 삼지 않아 그 욕망이 충족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가 공부했던 내용들 중에서 안회(顏回)의 무욕(無慾)을 그린 ‘옹야(雍也) 편’의 9장이나 공자의 무욕(無慾)을 그린 ‘술이(述而) 편’의 15장도 같은 가르침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장에서 상대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공자 형을 등장시켜 담담하게 그의 발언을 통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리사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그리고 제대로 배우고 익힌 자들이 어떻게 외재적인 부와 명예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해 그 올바른 전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경제적인 부(富)에 대한 만족도는 인간의 본능과 맞물리면서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탐욕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라는 점을 굳이 철학을 공부하거나 배우는 자들이 아니어도 잘 알고 있다. 공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재산증식 행위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선을 보이지 않고 있다. 배우는 자들이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대상에 최소한 부와 명예가 들어가 있어야 하지 않는다는 권계는 언제나 강조하고 또 강조한 바이기도 하다.     


본래 이 장에서 사용된 ‘合(합)’, ‘完(완)’, 그리고 ‘미(美)’의 개념 앞에 ‘苟(구)’라는 ‘그런대로’를 넣지 않더라도 그 세 개념이 모두 심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단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공자가 공자 형을 허여(인정)하는 데 있어 ‘苟(구)’라는 ‘그런대로’라는 개념이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판단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먼저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없던 것이 생기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반가워하고 즐거워하며 그것으로 만족감을 느낀다. 아무리 욕심쟁이라고 할 지라도 없던 물건이 처음 생기자마자 더 많은 물건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다시 욕심이 불거지는 데에는 시간적으로나 심리적인 간극이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불거지게 되는데, 예컨대, 없다가 생긴 물건을 바로 소진해버리고 말아 다시 그 효용이 필요한 경우가 가장 일반적인 것일 테고, 조금 더 심각한 경우라면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드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내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때는 상대적인 비교대상이 없었지만 내가 무언가를 갖게 되고 소유하게 되면서 옆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른바 상대적 빈곤감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내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인간은 결코 상대적 빈곤감으로 인해 좌절하거나 질투하거나 자신이 없는 것을 갖추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지 않을 것이다.      


이 장의 핵심 개념이자 곱씹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던 공자 형이 갖춘 인간으로서의 품격, 바로 ‘苟(구)’라는 ‘그런대로’의 의미는 그렇기에 더욱더 가치를 갖는다. 그 단어 하나가 세 가지 단계의 앞 단어에 붙음으로 해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질 수 있는 사리사욕에 대한 부분을 자신이 지향하는 바와 단절시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苟(구)’라는 ‘그런대로’의 의미는 자의적 해석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 정도면 괜찮다’라는 의미를 갖는 뜻이다. 그 의미가 명확하게 배우는 자들에게 교훈으로 와닿게 하기 위해 공자는 그것을 3단계 즉 시유(始有)-소유(少有)-부유(富有)마다 똑같이 집어넣었다. 다시 말해, 처음 그것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부터, 조금 더 갖게 되었을 때나 더 많이 갖게 되었더라도 그것에 대한 자신의 본능을 조절하여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미혹시키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조금 엉뚱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부자인 이들을 많이 만나보고 경험해보았다. 그런 이들을 만나보고 내가 이제껏 공부하고 수양하면서 내린 진정한 부자에 대한 결론은 ‘진정한 부자는 자신의 지갑에 혹은 통장에 얼마의 돈이 있는지에 따라 생활패턴이나 행동이 바뀌지 않는 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 개념을 설명할 때 주로 예를 드는 것이 짜장면이 너무 먹고 싶은데 중국 요릿집을 지나는 상황이다. 내 지갑에 지금 만원이 있을 때 그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나는 짜장면을 먹을 수도 있고, 다른 것도 사 먹을 수가 있으며 집에 가서 그냥 집밥을 먹을 수도 있다. 때문에 짜장면을 사 먹지 않고 중국 요릿집을 그저 지나치는데 큰 심리적 고민이나 불편함이 없다.     


그런데, 내 지갑에 돈이 없는 상황에 중국 요릿집 앞을 지날 경우, 나는 당연히 내가 돈이 없기 때문에 짜장면을 사 먹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빈곤감에 심리적으로 상당히 힘겨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돈이 없기 때문에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사 먹을 수 없다는 자괴감마저 느끼게 되어 생리적인 공복감에서 오는 허기보다 더 큰 허탈감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부자들은 자신들의 지갑에 혹은 통장에 수많은 돈이 있다고 해서 돈을 펑펑 쓰고 돈이 없다고 해서 쓰지 못하는 단계가 아니라는 설명으로 귀결된다. 부자가 되어본 적이 없는 자들이거나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는 자들은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쓰고, 자랑하며 실제로 돈이 없으면 쓰지 못하고 그저 가난을 탓한다.      

부자이면서 쩨쩨하게 작은 것을 아끼네 잡지의 쿠폰을 뜯어두었다가 쿠폰으로 햄버거를 사 먹네 뭐네 비난 아닌 비아냥을 받는 부자들은 그들이 돈이 없기 때문에 혹은 그걸 아껴서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생활패턴대로 생활한 뿐인 것이다. 그들이 돈이 많다고 하여 그것을 자랑하고 그 돈을 펑펑 쓰는 부자는 내가 이제까지 아직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고위공직자들이나 국회의원들의 재산공개가 이루어지는 시기가 될 즈음이면 일반인들은 그들의 재산에 유독 관심을 보인다. 본래 재산공개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함으로써 그런 이들에게 국민들의 판단을 통해 걸러내라고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시기부터인가 자신의 본업이 정치꾼이지 않았던 자들이 평생 공직에 있던 자나, 기자로 십수 년을 일했던 자, 혹은 대학교수로 있었던 자들이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로 등록되면서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치부(致富)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시대가 되었다.     


그들의 본래대로의 월급생활로는 이룰 수 없었던 부가 차곡차곡 혹은 한꺼번에 쌓이기 시작한 것이 그 과정을 통해 드러나고, 이른바 강남 재건축이 확정된 아파트를 한 채씩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이 없는 것이 무슨 공식처럼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그들만의 리그였는지 정치꾼으로 데뷔하기 전에 자신의 재산에서 수십억을 등록하지 않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정신이 없어서 누락시켰다는 식으로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슬쩍 경정신고를 하고 고의적이지 않았으니 당선 무효형까지는 가지 않게 해 달라며 검찰과 대놓고 딜을 해서 기계적으로 한다는 검찰의 항소마저도 없던 일로 해버리는 작태가 벌어지곤 하였다.     

전체재산이 아닌 토지재산 공시지가 기준만도 이 정도.

본래의 취지대로라면 이른바 묻지 마 재테크를 통해 벌어진 도덕적이지 못한 치부 방식으로 부를 이룬 자들은 그에 합당한 사회적 처분을 받아야 옳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사회적 분위기는 생활비를 한 달에 몇천만 원씩 쓴다고 당당하게 청문회에서 떠드는 이들에 대해서도 ‘그 사람들은 언제고 그렇게 돈을 챙길 수 있는 사람들이지’라는 당연한 인식마저 해버리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공자가 이 장에서 공자 형에 대해 평가하면서 던져주는 가르침의 지향점은, 부정한 방법으로 사리사욕을 위해 부와 명예를 지상과제로 여기며 아등바등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치부(致富)의 방편으로 여기는 자들에 대한 일침이 아니다. 이미 그런 자들은 공자의 시대에도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다.      


이 장의 가르침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그것을 삶의 목적이라 여기고 자신의 알량한 배움을 사다리 삼아 언제 떨어져 꼬꾸라질지 모르는 이들에 대한 권계가 아닌, 이제 배우기 시작하여 어떤 것을 배움의 지향점으로 삼아야 할지에 대해 익혀야 할 이들을 위한 길잡이를 바로잡기 위한 데 있다.      

기사나 보좌관이 열어주는 차 문에 기대어 거들먹거리며 국회의원을 봉사직이 아닌 돈을 모으기 위한 권력을 이용하는 방편이라 여기는 자들의 재산목록과 규모를 보고, 부러워하고 자신도 언제든지 그럴 기회가 있다면 그들이 누리는 삶을 누려보고 싶다고 부러워하고 실제로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까지 하는 당신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그쪽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단 말이다.     


자신의 재산 모두를 기부한답시고 대대적으로 공헌하고 뒷구녕으로 더 많은 재산을 탐닉하겠다고 했던 대통령도 감옥으로 갔다. 자신은 자신을 위해 치부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서 자신의 뒤에서 권력 행세를 하는 이들을 양산시켰던 대통령도 감옥에 다녀왔다. 


그들이 덜 배워서 혹은 못 배워서 그리 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하나도 없다.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중요한 것은 배움의 지향점을 어디에 두는가에 있다는 것 역시 모르는 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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