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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24. 2022

잃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초심은 결코 못 찾기 마련이다

그들은 결코 당신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는다.

子曰: “苟有用我者, 朞月而已可也, 三年有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나를 등용해 주는 자가 있다면 1년만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니, 3년이면 이루어짐이 있을 것이다.”     

이 장의 글에는 자신의 고국을 떠나 14년간이나 천하를 주유하고서도 제대로 된 정치는 고사하고 작은 고을 한 군데마저 다스릴 기회를 얻지 못했던 공자의 평생에 담긴 절규가 눌러 담겨 있는 목소리가 울린다.      


삼십 대 중반에 이미 학문적으로 정점에 올랐다고 자부하며 세상을 경영하여 삐뚤어지고 어긋나 버린 사회를 올바르게 바로잡겠다고 마음먹었던 공자는 고국을 등지고 천하를 돌며 자신을 알아봐 줄 위정자를 찾겠다며 그렇게 먼 길을 나섰다. 10년이 넘을 것이라고 처음부터 생각했다면 그는 그 길을 그렇게 호기롭게 박차고 나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14년이나 되는 그 긴 시간 동안 천하에 공자의 이름과 그 명성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그를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이하며 중용하겠다고 나서는 위정자는 없었다. 아니, 제대로 그의 그릇을 알아보고 인정해줄 수 있는 자조차도 찾기 힘들었다. 물론 간혹 그의 탁월한 능력을 알아보고 그것에 감탄하며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이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들의 곁에 있던 부족하고 시기심이 들끓던 그 작은 그릇의 소유자들은 공자를 영입함으로 인해 자신의 그 작다 못해 깨진 그릇의 바닥을 여지없이 드러낼 것을 두려워하며 어떤 식의 공작도 마다하지 않으며 공자를 몹쓸 자로 만들었고, 허수아비 군주가 공자를 등용하게 되어 나라가 굳건해지면 자신의 권력이 사그라들 것을 두려워한 실권자들이라는 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공자가 중책을 맡아 나라를 바로 잡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 장의 주석 맨 끝에 주자는 공자가 이 장의 말을 하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고증된 내용을 설명한다.      


내가 살펴보니, 《史記(사기)》 〈孔子世家(공자세가)〉에 공자의 이 말씀은 衛 靈公(위 영공)이 등용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라고 하였다.     


본문에서 가정법을 구사하기 위해 공자가 사용한 한자 ‘苟’는 실제 고문의 문법에서는 단순히 가정법인 ‘만약에’로 해석이 끝나는 글자가 아니다. 이 글자는 현실적으로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경우를 의미할 때 사용하는 글자이다.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따르면, 이 장의 대화가 이루어진 상황은 공자가 포(蒲) 땅에서의 고난을 겪고 난 이후에 위나라에 겨우 다시 돌아왔다가 늙은 영공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미 끝나버렸다는 판단하에 다시 위나라를 떠나면서 탄식하며 나온 말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자면 애공 2년, 공자의 나이 59세 때의 일이다. 실제로 공자가 그렇게 위 나라를 떠나자 위령공은 바로 세상을 뜨게 되고 위 나라는 혼란에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1년만 시간을 할애해주더라도 기본은 갖출 것이고, 3년이라면 완성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공자의 탄식은 그저 그것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예순을 눈앞에 두고서도 공자는 자신이 아직까지도 쓰임이 있다면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미망(?)을 놓지 않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칠순이 넘어 모든 것을 놓고 죽기 전에 자신의 교육과 저술에 힘을 쓰겠다고 하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을 더 힘겹게 보낼 것이라는 아픈 예감은 하고 싶지도 않았을지 모르겠다.     


이 가슴 아픈 공자의 탄식에 대해 주자는 행간의 의미나 공자의 마음을 읽어주는 대신 아주 건조하게 글자의 의미만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朞月(기월)’은 1년의 12개월을 一周(일주)함을 이른다. ‘可(가)’는 ‘겨우’라는 말이니 紀綱(기강)이 베풀어짐을 말하고, ‘有成(유성)’은 다스리는 공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심정이 어떠했을지에 대해 윤 씨(尹焞(윤돈))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그 의미를 정리한다.     


“공자께서 당시에 자신을 등용해 주는 자가 없음을 한탄하셨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가 이 장에서 사용한 ‘苟(만약에)’를 그대로 받아서 상황을 가정해본다. 공자가 만약 알아주는 위정자를 만났더라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까? 공자를 알아봐 주는 나라에서 공자가 자기 정치를 실현했다면 중국 천하는 변모할 수 있었을까? 아니, <논어>라는 공자의 말씀은 나올 수 있었을까? 공자는 대학자이자 성현으로 지금처럼 기억될 수 있었을까?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논어>는 공자의 평생에 걸친 수난 과정이 알알이 박혀 보석처럼 연마되는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고, 그 과정과 교육과정, 그리고 저술을 통해 공자는 대학자이자 성인(聖人)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통과 시련과 고난을 겪는다고 누구나 성인(聖人)이 되거나 대학자가 되거나 세상이 우러르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존재가 된 이들에게 고난과 시련과 고통은 언제나 수반되었다. 어떤 고통도 없이 고난과 굴욕적인 과거를 딛지 않고서 갑작스럽게 세상에 주목받는 존재로 우뚝 서는 사람은 없다. 내가 굳이 필요조건일 뿐 필충조건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이 문장을 시작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하면서 그저 일이 안 풀린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행여 자신의 뻘짓으로 인한 고생을 성현(聖賢)이 되기 위한 수행과정인 양 포장할까 싶어서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어제 버젓이 단독 인터뷰에 나와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던 빨간당 전 당대표라는 젊은 친구를 들 수 있겠다.     

그는 기자회견을 하면서도 그렇고 내내 억울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실제로 눈물을 마스크에 찍어냈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그와 이익의 지향점을 함께 하는 소수의 인물들이나 그가 일으킨 분란이 정치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여겨 그를 응원하는 척하는 반대편에 있는 자들을 제외한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에 대해 측은지심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이전에 언급했던 최순실의 딸이 던진 짱돌처럼 ‘니가 나 힘들 때 그렇게 되도 않는 말까지 퍼트려가며 방송에서 낄낄거리더니 정작 니가 그런 처지에 처했다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들 너를 긍휼히 여겨줄 수 없다.’라는 선동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최순실의 딸이 던진 짱돌이 대단한 파문을 일으킬 정도의 공론(公論)은 아닐지라도 그 단순하고 직선적인 일갈에는 아주 중요한 생각할 거리가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부와 명예와 권력을 모두 쥐고 있을 때는 몰랐던 서러움과 힘겨움이 결코 지난 시기에 자신이 보였던 후안무치에서 진하게 우러나온 사골국물 같은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엊그제 단독 인터뷰를 하며 그가 했던 수많은 헛소리 중에서도 길지 않은 그의 영광스러웠던 그 대표 시절의 회한이 담긴 목소리가 몇 가지 있었다. 예컨대, 그가 기자회견에서 했던 말처럼 ‘그래도 빨간당이 정치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 정의를 바로잡을 것이라고 믿고 민원을 들고 찾아 올라왔던 호남의 당원을 생각하면...’이라면서 울컥하고 눈물을 찍어냈던 그의 하소연이 헛소리라는 비난을 받는 것은 그가 당대표였을 때 혹은 그가 방송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전할 수 있을 때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잘못되고 삐뚤어진 것을 바로잡는데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과 지금 와서 마치 그 진실을 깨달았다는 사람처럼 구는 데 있다.     

그는 말했다. 자신이 다시 당대표를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나서지 않더라도 ‘윤핵관을 모두 처리해버리겠다’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당대표로 추대될 것이며, 자신 역시 그 사람을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그 허무한 말장난과 같은 헛소리는 그가 여전히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일 뿐이었다.      


국회의원도 떨어지고 중앙정치에서 몸값이 바닥까지 떨어질 대로 떨어져 겨우 고향에 가서 도지사를 하다가 다시 장관직을 받고 득의양양해하는 이나, 같은 처지로 데모 한번 해보지 않았던 곱게 자란 판사 출신의 여자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자신들의 정의를 위해 불법을 자행한 것이니 그것은 불법도 아니고 처벌 대상도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 뻔뻔함으로 복지부 장관의 물망에 올랐다고 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국회의원직에서도 외면당하고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나와 알바비 받고 광화문에 모인 노인들 앞에서 연거푸 경례를 붙이며 어떻게 해서는 정치의 마약 같은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해 도지사직을 꿰찬 이가 버젓이 다시 중앙 정치권으로 다이빙할 준비를 하며 숨을 고르는 상황이 지금이고 현실이다. ‘올드보이의 귀환’이라고 보기에는 그저 퇴행이고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말이다.       

지금은 서류상으로 감옥에 있어야 함에도 버젓이 사회에 나와 감옥에 있다는 표현 자체가 뻘쭘해버린 대통령 당시 인지도 있는 기자 출신 앵커라는 이유로 청와대 대변인을 했고, 그 전관예우의 혜택으로 굴지의 기업에 임원까지 달며 승승장구 하다못해 분당에서 국회의원을 했다가 자신의 그릇 크기는 생각하지도 않고 버젓이 경기도지사 직에 도전했다가 전업주부로 돌아가야 했던 그녀 역시 다시 버젓이 홍보수석으로 그것도 기레기 언론들에게 ‘구원투수’라는 표현까지 들어가며 그 독한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돌아왔다.     


어차피 자신들이 권력을 잡았고, 남은 기간이 근 5년 중에서 100여 일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렇다 손 치더라도 결국 그 권력을 유지하는데 국민들의 마음이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된다는 것에 그들은 동의하지 않는 듯한 제멋대로의 행태를 여전히 해나가고 있다.      


입장은 다르지만 여전히 권력을 이용해서 자기 밥벌이에 활용하는 것은 다를 바 없는 파마머리 털보 음모론자가 내내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떠들어댔던 것처럼 윤 모 씨를 대통령으로 뽑게 되면 여지없이 10년 전으로 퇴행할 것이고 퇴보하고 말 것이라며 협박성 선거 캠페인을 하던 것이 그가 대통령이 된 지 불과 100일도 되지 않아 모두 현실이 되고 말았다.     

엊그제 단독 인터뷰를 하며 마약 같은 정치무대에서 떠나기 싫어 눈물을 내내 글썽이는 그가 자신은 떳떳한 듯 물었다.     


“지금 윤핵관이라고 하는 3선 4선 의원들이 자기 정치라고 뭔가 법안을 발의하거나 사회를 바로잡았던 건이 단 하나라도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까?”     


단 한 번도 국민의 선택조차 받지 못해서 국회의원 배지조차 달아보지 못했다면 자기도 보궐선거라도 좋으니 배지라도 한번 달아봤으면 좋겠다고 키득거리며 방송에서 당당히 떠들어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눈살이 지푸려졌었다. 이유는 아주 명확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그에게 혹은 그의 주변의 인식은 아예 국회의원 배지가 국민을 대변하거나 국민의 민원을 해결하는 봉사직이 아닌 우러러 받는 ‘직업 정치인’을 의미하는 것이 명확하였기 때문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 민원 때문이거나 오고 가는 회의나 세미나 등등을 통해 많은 국회의원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런데 이제까지 내가 만나봐 왔던 국회의원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지역구의 민원은 고사하고 일부러 그 회의장이나 세미나장에 안건과 관련되어 사안을 들고 온 간절한 민원인들에게 다가가 자신이 책임지고 그 문제에 대해서 듣고 해결하겠다며 나서는 이들을 본 역사가 없다.     

이제까지 공부했던 <논어>의 가르침에 의거하자면, 그 작자들의 그러한 행태는 고스란히 그들을 수행하는 보좌관에게 이어진다. 국회의원에게 있는 두 명의 보좌관들 비례대표를 제외하면 한 명은 수행비서 역할을 또 한 명은 지역구에서 지역구 사무실을 맡는 사무국장 역할을 한다. 그들에게도 그것도 권력이랍시고 자신의 가족 인친척 하다못해 함께 밥 먹고 술 먹는 사이의 민원은 잘 듣는다.     

함바 사건으로 세간을 시끄럽게 하며 검찰까지 드나들었던 의원이 유튜브 방송에서 버젓이 말했던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저는 원래 지역구 주민들의 민원을 직접 듣고 그렇게 발로 뛰고 해결해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 모습을 보며, 그 의원실에 민원을 제기했다가 그의 보좌관에게 잘려나간 이의 통화녹취를 들으며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떨올랐다. 엄청난 뒷돈을 댔다고 방송까지 나와 자백성 커밍아웃을 했던 함바 사장은 검찰에 잡혀 들어갔다. 그리고 그 의원은 여전히 여의도 국회에 출몰한다. 당신은 그들과 다르다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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