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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01. 2022

정치인은 결코 직업이 아니다.

정치를 사리사욕을 채우는 최상의 직업이라 여기는 자들에게.

葉公問政, 子曰: “近者說, 遠者來.”     
섭공(葉公)이 정치를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가까이 있는 자들이 기뻐하며, 멀리 있는 자들이 오게 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 공자의 가르침은,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할 때 글을 좀 읽었다고 하는 이들이 곧잘 인용하게 되는 구절로 유명하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구절을 내놓았을 정도이니 질문을 한 이의 수준도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을 것임을 추측해볼 수 있겠다.      


섭공(葉公)은 글자의 의미대로라면 ‘초(楚)나라 섭(葉)지역을 다스리는 공(公)’이란 뜻이다. 그래서 후대에 가서야 복잡한 성(姓) 이름(名) 자(字)를 부여받는다. 이름은 심제량(沈諸梁)이라 하였고 자(字)는 자고(子高)라 했는데,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던 시기 가장 멀리까지 가서 만난 사람이 섭공이다. 이 장에서 등장한 섭공(葉公)에 대해 주자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한 줄로 설명을 해두었다.     


〈葉公(섭공)의〉 音(음)과 뜻은 모두 제7편(述而(술이))에 보인다.     


우리는 앞서 ‘술이(述而)편’의 18장에서 섭공(葉公)이 자로에게 ‘당신 선생은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는 말에 공자가 ‘발분망식(發憤忘食)’이라는 말로 자신을 설명한 일화로 공자의 새로운 모습을 들여다본 바 있다. 섭공(葉公)은 <논어>에 총 3번 등장하는데 마지막 한번은 바로 뒤에 배우게 될 본편의 18장에 나온다. 섭공(葉公)도 나름 그 시대를 바로잡겠다고 마음을 품었던 이였다. 그래서 초(楚)나라의 작은 채읍(采邑)으로 만족을 못하고 자신을 섭공(葉公)이라 참칭(僭稱)하고서 초나라에서 독립(?)하여 작은 나라라고 만들기는 했지만 자신의 이상을 펼치지는 못하고 그렇게 사그러든 인물이었다.     

이 장에서 孔子가 다스림의 요체라고 설명한 부분은 사람들이 기뻐하고 멀리 있는 이들이 스스로 오게끔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설명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그 은택을 입으면 기뻐하고 그 소문을 들으면 오게 된다. 그러나 반드시 가까이 있는 자가 기뻐한 뒤에야 멀리 있는 자가 오는 것이다.     


주자는 공자가 말한 문장을 인과관계로 설명하면서 그 과정이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제대로 정치를 하게 되면 가장 측근에 있는 자들이 그 은택을 입어 실질적으로 기뻐하게 되고 사람들의 본능적 특성상 그 소문이 퍼지게 되어 멀리 있는 이들까지도 찾아와 그의 백성이 되어 은택을 입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조금 생뚱맞은 설명일 수 있겠으나 이 주석의 방점은 ‘은택을 입다’에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에는 별다른 이유가 있다. 주자가 두 가지 문장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강조한 이유이기도 한데, 권력자의 가까이에 있는 이들이 기뻐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여지를 하나로 줄여주기 위함이 바로 그 이유이다.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않더라도 권력자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기뻐할 수 있다. 자신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모든 것을 제공해주는 권력자의 곁에서 기생하는 자들이 어찌 아니 기쁠 수 있겠는가? 또한 자신의 측근이 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제공하고 권력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방만한 정치를 하는 이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만 한다면 세상 모든 권력욕을 가지고 사리사욕을 채우겠다는 자들은 저마다 자신이 가장 아부를 잘하고 비위를 맞출 수 있다면서 모여들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게 설명하고 다시 이 글을 본다면, 과연 어떤 이유로 가까이 있는 이들이 기뻐하고, 그 소문을 듣고 멀리 있는 자들이 찾아오게 만든다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목적어나 지향점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굳이 구분하자면, 공자는 부러 말을 애매모호하게 하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게 말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공자는 위와 같이 말을 해서 후대의 공부하는 이들이 혼란을 갖게 만들었을까? 자세히 살펴보면, 주자의 주석에서 방점을 찍은 ‘그 은택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것도 은택을 다양한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여전히 존재한다.     


내가 이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공자의 시대에도 타락한 군주상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는데 왜 그렇게 말했을까를 의아해하며 보긴 했었다. 그런데, 결국 그 생각들은 지극히 단순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부정적인 것을 많이 접한 일종의 트라우마같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심각하게 생각할 거리조차도 되지 않는 문제였던 것임을 깨닫고는 허탈해진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공자의 시대, 왕을 곁에서 직접 모시고 본 적이 많은 사람들보다 단 한번도 왕의 얼굴을 접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그 마을이, 혹은 그 나라가 불안해서 살 수 없다면서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가장 단순하게는 도적과 외적이 들끓어 생사를 위협받아 도저히 살 수 없어서 그러했고, 과도한 세금과 학정(虐政)에 못 이겨 살기좋은 나라로 이주해가겠다고 자신이 나고자란 고국을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왕의 정치를 곁에서 본 적도 없고 그 왕이 어떻게 정치하는지에 대해 평가할만한 수준도 아닌데 무슨 근거에서 나라를 떠나고 또 새로 정착할 나라를 정했을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소문이었다. 지금처럼 가짜뉴스에 해당하는 헛소문이 돌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싶겠지만, 그 당시의 소문은 오히려 아주 치명적이었다. 당시의 가짜뉴스나 헛소문은 정치꾼들이 만들어낸 그들만의 리그에서 돌고도는 찌라시였을 뿐 국민들이나 천하에 돌고도는 소문들은 그야말로 민심 그 자체였다. 정치행위의 정점에 있는 권력자에서부터 정치는 고사하고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버거운 서민들에 이르기까지의 거리는 그야말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서민들이 살기에 퍽퍽하다 느끼면 그 나라는 살기 힘든 나라였고, 자신들이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데 편안하다 느끼게 되면 그것은 모두 나랏님이 정치를 잘하기 때문이라는 아주 단순한 논리였다.     


전쟁이 나면 전문적인 군인이 아님에도 농번기든 그렇지 않든 군역으로 불려나가 전쟁을 하고 성을 쌓아야만 했던 입장에서는 군역에 불려다니지 않으며 과도한 세금을 내느라 먹고 사는 문제에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만으로도 나랏님이 나라를 참 잘 다스려서 살기가 좋다고 여기던 시대였던 것이다. 당시에 민주주의에 의한 투표로 군주를 결정하는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자를 비롯한 다양한 성현들이 목청을 높이는 선정(善政)의 지향점은 그렇듯 백성들에게서 자연스러운 콧노래를 나오게 하는 것에 있었다.     

앞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간신배들에게 둘러싸여 학정(虐政)을 펼치며 간신배들만 즐거운 정치는 그들은 기쁘고 즐거울지 몰라도 대다수의 백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만 했고, 삐뚤어진 군주와 그의 곁에서 온갖 감언이설로 아부를 떨고 부화뇌동하던 소수의 정치꾼들이 즐겁고 기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다수의 백성들이 희생당해야만 하는 구조가 악순환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한 내용은 두 가지로 해석될 여지 자체가 없다. 언젠가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대학원 내내 도제방식을 추구하는 상아탑에서 이른바 ‘방돌이’를 하며 공부했었기에 가장 가까이에서 교수들의 모습을 보아왔다. 학부생들이 그들의 저서나 그들의 방송에서 비친 모습을 보며 혹은 강의시간에 보이는 그 꾸며진 모습을 보며 동경하거나 대단하다고 여겼던 이들이 함께 밥 먹고 일상적인 일처리를 하고, 전화를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갖는 것을 보면서 그야말로 지근거리에서 그 사람에 대한 여러 가지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선생’이라고 부를만한 이를 지금껏 마음에 두지 못하였다.  

   

단순히 내가 청결벽이 지나치게 강하던가 도덕적 잣대가 엄격하여 그런 것이 아님을 대부분의 사람들도 공감할 것이라고 본다. 나 역시 나이가 먹고 그들의 위치가 되고 나를 그렇게 지켜볼 제자들이 있을 것임을 알기에 조심스럽게 행하게 되고 말하게 되긴 했지만, 나 역시 어쩌면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였기에 제자들에게 좋지 못한 모습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금 매번 하며 반성하게 된다. 자신의 본모습은 그런 것이라며 대놓고 막되먹은 모습을 보이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라면 겸연쩍은 모습을 보이게 되면 부끄러워할 줄이라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배운 자가 취해야할 기본이라고 배웠고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굳이 내 경험을 통해 내가 지근거리에서 봐왔던 이른바 석학이라 불리고 선생이라 불리고 싶었던 이들의 민낯에 대해 다시 언급한 것은 그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이들이 그들의 집안에서 상사(喪事)가 생겼을 때 스스럼없이 찾아가지 않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른바 정승집의 개가 죽었을 때는 정승집에 문상을 위해 사람들이 가득하지만 정작 정승이 죽었을 때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면 그 정승은 평생을 자신의 권력으로 인해 곁에 사람을 두었을 뿐, 정작 죽어서 그 권력을 행세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을 때 단 한 사람에게도 진심어린 문상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인생 낙제점이 찍힌 통지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 논리에 의해 이 장을 다시 읽어보면 공자는 섭공(葉公)을 비롯하여 정작 정치에 대해서 요체를 묻지만 그 대답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심지어 행하지도 않는 위정자들에게 반대로 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 반대라 함은, 공자의 가르침을 지향점으로 삼아 멀리 있는 자들이 자신의 소문을 듣고 그 은택을 받고 싶어 몰려들게 실천해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그러기 위해 가장 가까운 자들의 인정을 받아내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회의원은 고사하고 시의원, 구의원을 하겠다며 정치꾼으로 발을 내딛겠다는 자들 중에는 대개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시작하여 공천을 받아내고 자연스럽게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었다며 정치인이 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뭐 인지도를 말하며 아나운서 출신이나 기자출신으로 방송에 얼굴을 많이 내민 자들도 그러하며, 시의원이나 구의원따위는 쳐다보지도 않고 고위직 관료로 공천을 받거나 검사, 판사 출신으로 정치계에 끈을 내밀어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금은 다들 잊혀진 듯 하지만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대부분의 국회의원을 했더나 또 떨어지고서도 그 언저리에서 자신의 본업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다시 올드보이 이름표를 붙여놓고 여의도를 배회하는 좀비같은 이들의 정치계 데뷔를 보면 대개 공천이라는 이름의 자천(自薦)을 통해 머리를 들이밀고 낑겨서라도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보겠다고 권력에 침을 질질 흘렸던 이들이다.     


그런데, 정작 정치를 처음부터 차근히 배웠다며 누군가의 비서관 혹은 보좌관을 했다는 정치꾼들의 면면을 보면, 그들이 그 직에 있을 때 과연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만한 혹은 그들을 기뻐하게 할만한 일을 했었는가를 묻게 된다. 그들은 늘 자신이 보좌해야하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그의 일을 도왔을 뿐, 정작 정치의 기본에서 했어야할, 국회의원이라는 이름으로 일일이 민원인들을 만나지 못하는 자신의 상관을 대신하여 직접 움직였어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위를 보며 지내왔고 그것을 자신의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처음부터 입봉하는 드라마 피디가 없는 것과 같이 처음 조연출을 하고 밤샘 촬영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드라마 일을 배우고 그 밑에서부터 잔일을 배워 입봉하고 드라마 피디가 되는 과정과 정치꾼이 되는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들 역시 직업으로서의 비서관이나 보좌관을 하면서 정치를 배웠다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간 <논어읽기>를 통해 시대를 바로 읽는 공부를 함께 해온 학도들이라면 알 것이다. 직업적으로 도제방식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비슷할지 모르겠지만 정치인는 결코 직업이 아니다. 수천년전부터 공자가 그렇게 말했고, 민주주의라는 것이 세상에 나온 이래 모든 정치학을 공부하고 가르친 이들은 정치는 결코 직업이어서는 안된다고 말해왔다. 그 말은 드라마를 만드는 일을 비롯하여 직업이라고 하는 것들의 수련과정은 결국 최상의 효율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정치가 직업일 수 없는 이유는 최상의 효율이라는 것 자체가 국민을 위한 봉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그것을 누가 모르나?’라고 반문할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제대로 행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에 수천년전부터 공자가 시작해서 오늘날의 발검무적에 이르기까지 그 한심한 세태에 대해서 이렇게 아침마다 죽비를 들고 비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후려치는 것이다. 

그렇게 강조하고 외치면 무엇하는가? 정치꾼들에게 정치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희생과 노력으로 인해 국민들이 행복해지는 것에 있지 않고 결국 자기 주머니 불리고 자기가 행복하기 위한 직업으로 전락해버린 현실 앞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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