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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31. 2022

나라를 흥하게 만들기는 어려우나 망치는 건 한순간이다.

임금 노릇을 하는 게 그리 쉬울 줄 알았을 초보에게.

定公問: “一言而可以興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 其幾也, 人之言曰: ‘爲君難, 爲臣不易.’ 如知爲君之難也, 不幾乎一言而興邦乎?” 曰: “一言而喪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 其幾也,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 如其善而莫之違也, 不亦善乎?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     


定公이 묻기를 “한 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 하니, 그러한 것이 있습니까?” 하자, 孔子께서 대답하셨다. “말은 이와 같이 〈효과를〉 기약할 수 없지만, 사람들 말에 ‘임금 노릇하기가 어려우며 신하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하니, 만일 임금 노릇하기가 어려움을 안다면 한 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함을 기약할 수 없겠습니까.” 定公이 “한 마디 말로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다 하니, 그러한 것이 있습니까?” 하자, 孔子께서 대답하셨다. “말은 이와 같이 〈효과를〉 기약할 수 없지만 사람들의 말에 ‘나는 군주 된 것은 즐거워함이 없고, 오직 내가 말을 하면 어기지 않는 것이 즐겁다.’라고 하니, 만일 군주의 말이 善한데 어기는 이가 없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군주의 말이 善하지 못한데 어기는 이가 없다면 한 마디 말로 나라를 망하게 함을 기약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술한 바와 같이 공자라는 인물을 정식으로 등용했던 유일한 위정자는 바로 정공(定公)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공자가 시간이 지나면서 정공의 우유부단함에 자신을 담을 수 없는 그릇이라 실망한 나머지 노나라를 떠나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나마 우리가 공부했던 내용에서와 같이 공자가 당시 실권자였던 삼환(三桓)의 견제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공(司空) 벼슬직이나 법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 벼슬직에 임용될 수 있었던 것은 정공(定公)이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공자를 등용하겠다고 밀어붙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참고로 정공(定公)은 이 장과 ‘팔일(八佾) 편’ 19장의 두 번만 등장한다.     


이 장에서는 바로 그 정공(定公)이 공자에게 ‘한마디 말만으로 나를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지 않느냐?’며 파격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에 스스럼없이 답변하는 공자의 답변이 담겨 있다. 이 대화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는 공자가 노나라에서 벼슬하고 있을 때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아마 정공 9년에서 정공 13년 사이의 일로 공자가 51세에서 55세 즈음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천하 주유를 떠나기 전, 실제적인 정치에도 자신의 학문을 적용하려고 했던 당시의 공자가 품었던 정치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다소 파격적인 정공(定公)의 질문에 대해 공자가 답변을 시작하면서 ‘그것을 기약할 수 없다’라고 완곡하게 설명한 것에 대해 주자는 먼저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풀어준다.     


‘幾(기)’는 기약〔期(기)〕함이니 《詩經(시경)》 〈小雅 楚茨(소아 초자)〉에 ‘如幾如式(여기여식, 기약함과 같고 법과 같다.)’이라 하였다. 한마디 말의 사이에 이와 같이 반드시 그 효과를 기약할 수는 없다고 말씀한 것이다.     


다소 과장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나왔을 그 표현에 대해, ‘한마디 말’이라는 표현에 천착할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새기라는 의미에서 바로 정공(定公)이 어디선가 들어서 인용하는 그 말에 대한 형식을 그대로 받아 ‘임금 노릇하기가 어려우며 신하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는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와 그의 눈높이에 맞춰 대답을 시작한다. 

대답의 핵심은 한 가지 정말로 그 임금 노릇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안다면 나라를 흥하게 하는 것을 기약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없다는 ‘자각’의 문제임을 역설한다.     


이 대답의 의미를 주자는 다음과 같이 풀어 설명한다.     


이 말로 인하여 임금 노릇하기가 어려움을 안다면 반드시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이,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조심해서 한 가지 일도 감히 소홀히 함이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이 말이 어찌 반드시 나라를 흥하게 함을 기약할 수 없겠는가. 정공을 위해서 말씀하셨으므로 신하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임금 노릇하는 일의 어려움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라를 흥하게 만들 여지가 크다는 말은 사실 이렇게 간략하게 해설하는 것만으로 끝낼 간단한 과정의 이야기는 아니다. 당시 사람들이 임금 노릇을 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 내용과 여기서 공자가 하는 말이 지향하는 방향이나 그 말이 갖는 무게의 차이가 완연히 다르다는 것쯤은 학도들도 인지할 것이라 본다.     


주자의 간략한 설명에서 핵심은 그 일이 진정으로 어려운 것임을 깨닫게 된다면 항상 그 일을 함에 있어 조심스럽기 그지없을 것이니 소홀히 하거나 가벼이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극히 조심스럽고 두려워만 한다고 잘할 수 있다는 설명으로 오독하는 이들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지극히 높기 때문에 유의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자가 설명하는 그것이 어렵다고 느끼는 경지는, 단지 어렵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과 의미를 온전히 습득한 단계에 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수학을 풀어보지 않아서 처음 보는 것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어렵다’고 말하지만, 멋모르는 사람의 경우 수학의 세계가 얼마나 넓고 깊으며 높은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한 가지를 알게 되면 ‘수학 이거 되게 쉬운데?’라고 경망스러운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데, 수학에 대해 점점 더 공부하고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부족하고 수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고 자신의 배움이 얼마나 얄팍하고 지극히 작은 부분인가에 대해 겸허해지며 수학이 쉽다고 함부로 말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심오하기 그지없는 수학의 세계에 대한 경외감에서만 오는 깨달음이나 두려움이 아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만 한다는 마음가짐의 바탕이 마련되는 계기가 된다는 의미이다. 또한 자신의 결정이나 해법이 반드시 맞다고 자부하거나 확신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복기하고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라는 아집을 갖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학을 예로 들기는 했지만, 모든 분야와 인간의 전반적인 삶에 이 원칙은 어김없이 적확하게 적용된다. 젊다고, 수영을 이제 막 배워서 접배평자 네 가지 영법을 수영장에서 막 배우고 같은 래인에서 수영하며 속도가 느리다며 할머니를 밀치고 앞으로 쭉쭉 나가며 수영이 빨리 늘었다고 뽐내던 자는 결국 자신의 앞에서 느리다고 하며 평생을 매일같이 1킬로씩 수영했던 그 느림보 할머니와 함께 유람선을 타다가 전복사고가 났을 때, 바다에서 수영을 해서 살아 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 짝을 지은 듯이 정공(定公)이 다시 반대의 경우를 묻는다. 이치에 맞지 않는 듯 하지만, ‘한 마디 말로 나라를 망하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은 것이다. 역시 당시 사람들의 말을 빌어 공자는 다시 대답한다.      


“나는 군주 된 것은 즐거워함이 없고, 오직 내가 말을 하면 어기지 않는 것이 즐겁다.”     


이 말은 앞서 인용했던 사람들의 말보다는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어 주자가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설을 곁들인다.     


다른 것은 즐거울 것이 없고 오직 이것만이 즐거울 뿐임을 말한 것이다.     


자신이 권력을 쥐게 된 그 상황이 가장 즐겁고 그것만이 즐겁다는 것은 권력을 잡은 이가 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은 내팽개쳐둔 채 자신이 누릴 것만을 즐거움이라 여긴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사실 이 장에서 가장 깊이 있는 가르침의 핵심은 다음 마지막 문장에 오롯이 담겨 있다. ‘군주의 말이 善하고 그것을 어기는 이가 없다면 가장 좋겠으나, 군주의 말이 善하지 않음에도 어기는 이가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나라를 망하게 할 충분한 요인이 된다.’는 일침이다.     


공자의 일침이 어떤 부분을 지적하고 일갈하는 것인지에 대해 지금 당신과 같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배우는 이들을 위해 범 씨(范祖禹(범조우))는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풀어준다.     


“만일 善(선) 하지 못한데 어기는 이가 없으면 충성스러운 말이 군주의 귀에 이르지 않아서 군주는 날로 교만해지고 신하는 날로 아첨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나라를 잃지 않는 자가 있지 않다.”     

이 부분은 앞에서 정공(定公)이 정치를 행하는 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던 신하 노릇이 하기 어렵다는 점을 기본 전제로 깔되, 결국 신하가 신하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이 임금 노릇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군주가 이미 선하지 않은 명령으로 잘못된 생각으로 그릇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신하가 있다면 당연히 군주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간언해야 하고 그것을 바로잡아주어야 한다. 엄연한 인사권자이자 리더는 군주이지만 그 군자가 제대로 된 군주 노릇을 하는 데 있어 신하가 행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얼마나 무게가 있는지를 반어적으로 표현한 말이 바로 이 마지막 문장의 핵심이다. 만약 그 악화가 구축되는 순간 신하들은 그저 군주의 비위만을 맞추는데 전력을 다해 자신의 권력과 사욕을 유지하는 것에 힘쓸 뿐, 진정한 올바름에 대한 간언 따위는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게 될 것이니 그 나라가 망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가 될 것이 자명하다. 당대의 상황이 그리고 천하의 상황이 그와 크게 다르지 않기에 공자의 일침은 질문을 던진 정공(定公)에게도 그렇고 그 일화를 전해 들은 모든 이들에게 가슴 뜨끔한 가르침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공자의 그러한 의도를 읽어낸 사 씨(謝良佐(사양좌))가 이 장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공경하고 삼가서 유지할 것이요, 오직 말함에 자신의 말을 어기지 않는 것만을 즐거워하면 참소하고 아첨하고 면전에서 아부하는 사람들이 이를 것이니, 나라가 반드시 대번에 흥하고 망하는 것은 아니나 흥하고 망하는 근원이 여기에서 나누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幾微(기미)를 아는 군자가 아니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임금 노릇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신분이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던 중세에는 아주 당연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른바 역성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쿠데타를 통해 신분을 뒤집고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전례가 생기고 실제로 천하가 혼란에 빠진 이래 수천 년이 지나고 난 현대에 보면 임금 노릇을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이들이 우후죽순처럼 많아졌다는 현실을 부인할 수만도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된 자들이 모두 감옥에 간다는 말을 스탠딩 코미디의 재료감으로 들으며 그야말로 웃펐더랬던 기억이 있다. 순진하게 13살이 되도록 장래희망란에 ‘대통령’이라고 적어 넣었던 순진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내 장래희망이 설마 감옥에 갇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직업군인을 하다가 총부리를 들이밀며 대통령을 하고, 기업에서 거액의 연봉을 받으며 장사꾼을 하다가 나라도 그렇게 부유하게 만들겠다며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려던 사람이나 그 옛날 자기 아버지의 영광을 기억하는 TK공화국을 기반으로 2대째 기어코 대통령직에 올라 그 옛날부터 자신의 뒤에 앉아 있던 아무것도 아닌 여자가 휘두르는 것이 임금이라면, 말 그대로 아무나 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서인가? 검사를 하다가 수사에서 배제되고 한직으로 밀려나 눈물까지 보였던 덩치만 비대한 검사가 다시 돌아온 정권의 정치적인 신데렐라로 다시 지지를 받으며 중앙지검장이 되고 파격적인 서열파괴를 하며 검찰총장까지 올랐으니 그 임기를 때려치우고 자신도 임금 노릇을 해보겠다고 나서서 정작 당당히 대통령이 되지 않았나?     

이 장에서 수천 년 전 공자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듯이 말한다. 자신의 말이 선하지 않은데도 자신의 말에 호응하는 자들만을 측근이라고, 자신이 함께 일하고 술 마시고 했던 사람들만을 신뢰할 수 있다며 요소요소에 그들을 꽂아 넣으며 자신에게 불편한 말을 하는 사람이나 거슬리는 사람들을 솎아내는 것, 그것은 그가 사기업을 운영하는 자라 하더라도 기업을 말아먹게 될 것이라고 지적받을 부분일진대, 나랏일이라면 더 일러 무삼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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