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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30. 2022

바른 소리를 할 수 없다면 그 자리에 왜 붙어있는가?

그 자리가 요구하는 자리의 자격에 대하여.

冉子退朝, 子曰: “何晏也?” 對曰: “有政.” 子曰: “其事也. 如有政, 雖不吾以, 吾其與聞之.”

冉子(冉有)가 私朝에서 물러 나오자, 孔子께서 “어찌하여 늦었는가?” 하고 물으셨다. 대답하기를 “國政이 있었습니다.” 하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대부의 집안일이었을 것이다. 만일 國政이었다면 비록 나를 써주지 않으나 내가 참여하여 들었을 것이다.”  
   

<논어>에 참람되이 공자의 제자였던 염유(冉有)에게 ‘子’를 붙여 극존칭을 한 것을 보면 아마도 <논어> 편집에 참여했던 자가 염유(冉有)의 후예이거나 제자였을 확률이 높다. 이 장 외에도 앞서 ‘옹야(雍也) 편’ 3장에서도 염유(冉有)는 염자라고 극존칭으로 표현되어 있으니 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두 장 모두 염유(冉有)의 훌륭한 점을 칭찬하거나 올려 세우는 것이 아닌 공자에게 지적받아 혼나고 있는 장면이라는 점이다.  

   

이 장에서 대부라 함은, 공자가 노년에 천하 주유를 끝내고 노나라로 다시 돌아왔던 시기에 계강자(季康子)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증된다. 당시 계강자(季康子)의 가신으로 있던 염유(冉有)는 제대로 된 가신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스승 공자에게 연일 꾸지람을 듣게 된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은 ‘팔일(八佾) 편’ 6장과 ‘선진(先進) 편’ 16장, 그리고 뒤에서 배울 ‘계씨(季氏) 편’ 첫 장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저마다 상황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공자의 지적은 하나였다. 위정자의 보좌역인 가신으로의 가장 주요한 임무는 위정자의 정치가 바르지 않을 때, 삐뚤어졌을 때 바른 간언(諫言)을 통해 자신이 모시는 자가 실정(失政)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을 등용해줄 사람을 찾은 것은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찾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결국 자신이 직접 정치를 펼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면 자신의 능력과 배운 학문과 경험을 토대로 위정자가 완성된 정치를 이룩할 수 있도록 돕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자신은 실제로 그런 정치를 펼치지 못했지만, 공자의 많은 제자들은 스승 공자의 위명(偉名)과 공자 학단 출신의 학자라는 보이지 않지만 큰 추천서를 등에 업고 여러 나라의 위정자들에게 등용된 바 있다.      


그때마다 공자가 강조했던 가르침은 결국 이 장을 비롯하여 염유를 꾸짖고 있는 그 하나의 메시지. 제대로 된 간언을 하지 못하는 가신은 가신으로서의 존재가치를 갖지 못하고 그렇다면 굳이 정치행위를 하겠다고 세상에 나서 등용된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자는 이 장의 공자의 가르침이 담고 있는 내용과 스승의 질문에 대해 마치 공무(公務)가 바빠서 그랬다는 뻔한 거짓말에 대해서 공자가 어떻게 그 상황을 알고서 그에게 꾸지람을 내렸는지에 대한 배경에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염유가 이때 계씨의 가신이 되었으니, ‘朝(조)’는 계씨의 사사로운 조정이다. ‘晏(안)’은 늦음이다. ‘政(정)’은 국정이요, ‘事(사)’는 집안일이다. ‘以(이)’는 등용함이다.     


禮(예)에 “전임 大夫(대부)는 비록 정사를 다스리지 않더라도 국정에 참여하여 들을 수 있다.” 하였다. 이때 계씨가 노나라를 專橫(전횡)하여 국정에 있어 同列(동렬)들과 公朝(공조)에서 의논하지 않고, 혼자서 가신들과 자신의 私室(사실, 私朝(사조))에서 도모하였다. 그러므로 夫子(부자)께서 모르는 체하고 말씀하시기를 “이는 반드시 계씨의 집안일이었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국정이었다면 내 일찍이 대부가 되었으니, 지금은 비록 등용되지 못하나 그래도 당연히 참예하여 들었을 터인데, 이제 이미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국정이 아니다.”라고 하신 것이다. 말씀한 뜻이 魏徵(위징)의 獻陵(헌릉)의 대답과 대략 서로 비슷하니, 명분을 바로잡고 계씨를 억제하여 염유를 가르치신 뜻이 깊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장에서 공자는 염유(冉有)를 꾸짖는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비난이나 일갈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는다. 왜 늦었냐는 스승의 질문에 대해 감히 국정(國政)이라고 말했던 부분에 대해 공자는 단호히 그것은 그저 대부의 개인적인 집안일이었을 것이라 팩트를 체크하는 것으로 꾸지람을 대신한다. 마지막 문장에서 자신이 그렇게 단정 짓는 근거를 말해주는 것으로 염유의 양심에 비수를 꽂으며 가르침을 대신할 뿐이다.     


공자는 당시 대부의 위치를 인정받아, 비록 직접적인 행정관리 직분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정에 해당하는 큰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반드시 고문의 입장에서 조언을 구한다는 차원으로 그 자리에 초청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관계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염유는 물론이고 그가 모시고 있는 계강자(季康子)에게도 죽비를 함께 내려치는 효과를 거두는 방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가신이 자신이 모시는 위정자를 제대로 정치할 수 있도록 간언 하지 못하고 보좌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일갈을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반대로 가신이 가신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하는 리더 역할은 어디까지나 인사권자에게 있음을 동시에 지적한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리해서 보면, 만약 정말로 중요한 국정(國政) 때문이었다면 계강자(季康子)가 나라의 큰 어름이라면서 대부 벼슬을 하고 있던 공자를 그 자리에 부르지 않았으니 그것 자체가 참람되기 그지없는 일이었을 것이고, 만약 공자의 지적대로 국정(國政)과 상관이 없는 대부의 개인적인 집안일 때문이었다면 고작 그런 일을 위해 늦어놓고 국정을 입에 올리는 염유가 참람되기 그지없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누군가의 잘못이 발생한 상황임을 콕 짚어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할 때 가장 뼈 때리는 아픈 지적은, 그의 평가에 대한 것이 아니다.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그가 잘했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는데 아무리 내 기준으로 그를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들 그가 그 평가를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확률은 지극히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장에서와 같이 대놓고 꾸짖거나 비난하는 것은 아닌데 그 행동에 대한 사실관계를 그대로 적시하는 것만으로 뼈 때리는 것 이상으로 아픈 지적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사실관계만을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여지가 거의 없기에 더더욱 반론의 여지도 없다.     


그렇게 놓고 보면, 염유는 공적일 일 때문에 바쁜 것도 아니면서 대부의 사사로운 일에 그저 바쁜 가신일 뿐이고 무엇보다 스승의 질문에 거짓말로 대답하며 감히 국정(國政)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를 댄 참람되기 그지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그리 크지도 않은 노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천하를 십수 년 주유했던 공자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문하에서 자신에게 교육을 받고 수학했다고 하는 염유가 가신으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강자(季康子)의 참람됨은 공자가 노 나라를 떠나던 그의 이전 세대에 비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관련이 아주 없으면 모르겠으나 그의 가신으로 승승장구하는 제자가 있다는 점에서 공자 역시 그 비난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자신의 후예에 의해 염자라는 대단한 호칭으로 등장한 염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저 고지식하게 진리만을 추구하고 올바른 것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스승의 가르침과 지적이 시대에 유리된다고 여겼을 수도 있겠다. 수천 년 전의 공자의 시대에도 그러했는데 수천 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위정자라고 하는 이들이 <논어>를 통해 공자의 가르침을 받아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고 하는 점을 쉽사리 동의할 것인가에 대한 자괴감도 적지 않아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나이가 들면 한문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면서 왠지 동양고전이 끌리고 <논어>를 통해 고전의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본능적으로 이끌려 차마 원문을 해독하지는 못할지언정 해설본이라도 읽으며 그 의미를 공부하고 싶어 졌던 이들은 강연을 통해 혹은 자신의 논설이나 기고문을 통해 다양하게 공자를 들먹인다. 그리고 그 가르침이 결코 수천 년 전의 고리타분한 것이라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자폭성 발언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대가 그렇게 지났지만 사람의 삶과 사고와 사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서 그 가르침이 현대에 주고 있는 시사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멋들어진 척 역설한다.     


며칠 전 공부에서 언급했던 대통령의 아내에 대한 논문으로 시끄러웠던 모 대학의 교수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도 나름 대학교수라고 선생님 소리를 듣고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논문이라는 것을 계속 쓰고는 있을 것이다.(그나마도 하지 않으며 정치적인 놀음에 푹 빠진 자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들이 벌인 블랙 코미디를 보면서 내가 가장 한심하면서도 먼저 기본적으로 든 의문은 하나였다. 왜 반대하나?     

저마다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처음 문제를 제기했던 소위 학자적 양심을 가진 교수들의 항변에 따르면, 투표가 진행 중이던 전날 학교 교무위원인 교학부총장과 법과대학장을 비롯한 각 보직교수들이 교수회 회원 전체에게 안건 투표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설사 그런 정치적 압박 메일을 받았다 치자. 반대표를 던진 자들이 학생들의 논문을 심사할 때, 혹은 학회지의 논문을 심사할 때 이건 영부인의 가짜 논문이 아닌 진짜 학자들의 진짜 논문이니까 경우가 다르다며 이원화하여 평가할 것인가? 그들이 학생들의 앞에서 학자의 양심을 논하려고 할 때 올바른 정신을 가진 학생의 일갈에 뭐라 변명할 것인지 정말로 궁금하다.     

분명한 것은 이제 그들을 '학자'라고 불러줄 이들은 없다는 것이다.


어제 출범한 파란당의 최고위원 중에 당대표가 된 인물의 뒷줄에 서지 않은 이는 아나운서 출신의 여자 국회의원 하나라고 한다. 그녀는 분교 출신이면서 본교 출신이라고 적당히 얼버무려 자신의 프로필을 덧씌웠다는 지적을 국회의원으로 뽑히던 당시 받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공중파 아나운서 출신이라는 인지도를 등에 업고 대통령에게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며 연일 SNS를 통해 자신이 아이들의 엄마로서 그리고 메이저 학벌이 아닌 전형적인 흙수저로서 할 수 있는 말을 한다며 자신이 현 서울시장을 국회의원선거에서 박살 낸 것을 은근히 강조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녀의 간략한 설명을 통해 눈치챘겠지만, 나머지 현 당대표의 뒤에 줄을 서며 최고위원이 된 자들의 가식과 후안무치에 대해 굳이 일일이 논하기 전에 그들과 다르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란당이 구태의연한 정치꾼들에 의해 획일화되어서는 안 된다며 다양성이 어쩌고 떠들어댔던 다른 파의 유일한 최고위원인 그녀의 민낯을 나는 여실히 목도한 바 있다.     


아이 엄마로서 아동학대등의 범죄에 눈물을 흘린다고 SNS에 연출된 사진과 글을 올렸던 그녀의 사무실에 현역 목사 아동학대 사건에 대해 도움을 청했을 때, 어렵게 연결된 그녀의 보좌관은 당당하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건 경찰에서 할 일이고, 국회에서 그 사건에 대해 어떤 도움도 드릴 수 없습니다.”     


유치하게 내게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쓰레기 정치인이라고 매도하려는 흑백논리가 아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국회의원실에 연락하여 자신의 일이 아닌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일에 대해 도움을 청할 경험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쏟아가며 사회를 바꾸려고 하는 자들은 어느 사이엔가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인 도약 발판으로 여기거나 그것으로 인해 얻은 인지도로 자신이 운영하는 변호사 사무실의 홍보로 사용하거나 하는 또 다른 숨겨진 목적에 부합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금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 밥의 그 나물인,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인지하고서도 자신의 위치에서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국회의원 나부랭이들에게 한정 짓고자 함이 아니다. 국회의원은 고사하고 국민들의 투표나 지지도 선출직에 한 번도 당선되어보지 못했던 빨간당 전 당대표라는 젊은 친구는 자기가 그 위치에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귀 기울이며 직접적인 힘을 행사하지 않았던 주제에 뜬금없이 밑에서부터 국민의 목소리를 듣겠다며 전국을 배회한다. 그의 전국 배회가 공자의 천하 주유에 도저히 짝퉁으로도 비할 수 없는 이유이다.     

오늘 주석에 언급된 인물 위징의 초상화

윤핵관이든 어재명파이든 혹은 그 반대파들이든 그게 누가 되었든 간에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리더 역할을 하는 이의 존재가치만큼이나 그에게 간언을 통해 바르지 못한 것을 일깨워주고 그것에 더 힘을 써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어야만 한다. 연일 24시간 케이블을 통해 중계되는 정치꾼들 중에서 자신의 인지도를 위해 방송에 나와 그 추한 민낯에 화장을 떡칠하고 떠들 시간은 있으면서 그들이 민생을 위해 국민들의 민원을 위해, 사회적인 부조리가 흘러넘치는 사례들을 들고 그 잘못을 저지른 자들을 벌줘야 한다고 법안을 만들고, 인터뷰를 통해 사건을 이슈화하는 것을 우리는 본 적이 없다.


그들만 그렇다고 생각하나? 당신은 당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하루하루를 충실한 노력이라 말하며 당신이 속한 사회의 잘못을 바로잡는데 어떤 목소리를 낸 적이라고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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