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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13. 2022

항상 된 마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 마음을 가졌는가?

子曰: “南人有言: ‘人而無恒, 不可以作巫醫.’ 善夫!” “不恒其德, 或承之羞.” 子曰: “不占而已矣.”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남쪽 나라(지방) 사람들의 말에 ‘사람이 恒心이 없으면 무당과 의원도 될 수 없다.’ 하니, 좋은 말이다.” ‘그 德을 항상 하지 않으면 혹자가 부끄러움을 올리리라.’ 하였으니,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점쳐 보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이 장은 ‘항심(恒心)’이라는 워낙 유명한 개념을 떠올리게 만드는 용어의 언급이 나온다. 본래 ‘항심(恒心)’은 <맹자(孟子)>의 ‘양혜왕 상편(梁惠王上篇)’에 나오는 말로 ‘無恒産無恒心(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는 말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뜻)’이라는 용어로 이후 수많은 이들에게 인용되는 유명 구절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번역에서 ‘항심(恒心)’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뿐, 실제로 원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공자는 ‘항심(恒心)’이라는 용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한 적이나 언급한 적이 없다. 원문에 나온 그대로 ‘항(恒)’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게다가 공자의 말이 아닌 남쪽 사람들의 말이라며 인용하고 있다. 그 항심이 없으면 의원이나 무당도 할 수 없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 먼저 이 개념에 대해 주자가 어떻게 공자의 의도를 해석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南人(남인)’은 남쪽 나라 사람이다. ‘恒(항)’은 항상 하고 오래함이다. 무당은 귀신과 사귀는 사람이요 의원은 죽고 삶을 맡기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비록 비천한 일을 하나 더욱 恒心(항심)이 없어서는 안 되니, 공자께서 그 말을 일컫고 좋게 여기신 것이다.     


여기서 ‘南人(남인)’은 이후 발견된 통칭 ‘곽점죽간’이라고 불리는 ‘곽점초묘죽간(郭店楚墓竹簡;하북성 형문시 곽점(郭店)의 초나라 귀족 무덤인 고분에서 발견된 죽간)’이라고 하는 유적에 보면 이 문구는 ‘南人(남인)’대신에 ‘송인(宋人)’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확인된 바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용이 달라지는 주요한 차이는 아니다. 공자가 자신을 송나라를 유학의 종주로 생각하고 그 후예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같은 의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恒’에 대한 해석과 그것이 왜 무당과 의원에 비유되었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恒心이 없으면’을 ‘뻔뻔한 사람’이라고 의역한 현대 해설서까지 있는 것을 보면, 그 해석이 틀린 것은 차치하고 그렇게 많이 사용된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얼마나 제대로 된 개념의 정의가 정립되어 있지 않은지를 알 수 있다.      


먼저, ‘無恒’을 직역하면, ‘항상 붙잡아 지키는 바가 없음’이라는 의미가 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옛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원용된 이 말은, 정말로 옛날 사람들의 말이기 때문에 무당과 의원은 그 옛날의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샤머니즘이 사회를 지탱하던 그 시절에는 주술사와 아프거나 다친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의 존재였고, 그들은 그 사회의 어른이었고 리더였으며 모두의 존경을 받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이른바 사람에게 신(神)의 뜻을 전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주술사로서의 의미가 여기서 말하는 무당(巫堂)이자, 기도와 의술을 사용하여 아프고 병든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의원(醫員)이었던 것이다.     


위 주자의 주석에서, 무당이나 의원에 대해 주자 당시의 해석으로 천한 직업으로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나는 조금 의문을 가지고 있다. 샤머니즘 시대의 한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일차적인 근거는 바로 무의(巫醫)를 하나의 개념으로 보고 사용하는 경우는 그 시대의 지위를 지칭할 때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漢) 나라의 정현(鄭玄)과 다산(茶山;정약용)은 이 부분의 풀이를 ‘항상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무당과 의원이라 해도 그를 어찌할 수 없다’라고 풀이한 것이다.     

보다 깊이 있고 정확하게 공자의 의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말에 대해 훌륭하다고 평가하고 이어 ‘不恒其德 或承之羞(그 德을 항상 하지 않으면 혹자가 부끄러움을 올리리라.)’ 한 강조점이 어디에 가 닿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주자의 주석을 통해 공자가 바로 이어 설명한 그 말이 <주역(周易)>에 나온 효사임을 설명한다.    


이는 《周易(주역)》 〈恒卦 九三(항괘 구삼)〉의 爻辭(효사)이다. ‘承(승)’은 올림이다.     


이 부분의 해석을 오역을 버젓이 늘어놓는 현대 해설서들을 보게 되면, ‘한결같은 덕을 무시하고 이것저것 기웃거리니 하나도 제대로 되는 일 없고, 남 따라다니다 수치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그럴싸하게 뭉뚱그리며 넘어가는 내용을 보게 된다. 왜 정확하게 맞지 않는 해석을 통해 그저 그럴 것이라고 넘겨짚으며 사람들의 오인을 유도하는 것인지 나는 몇 번을 접해도 그 이유에 대해서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


앞서 샤머니즘 시대의 무의(巫醫)가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그 부분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주술사와 의사가 다루는 것은 인간의 생명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탁(神託)에 의해 사람의 생명을 고쳐주고 연장해줄 수 있는 특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 존재는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당연히 초연해야만 했다. 세속적인 것에 젖어 있는 상태에서 신성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신성한 신의 의지를 대신 전달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이가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두거나 마음이 흔들리게 되면 당연히 그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된다. 공자는 ‘항(恒)’이라는 개념으로 그것을 열어준 것이고 항심(恒心)과 항산(恒産)의 개념으로 확장시켜 공자가 일깨워주려는 개념을 확장시켜 상세히 설명한 것은 맹자인 셈이다.     

앞의 내용에서도 워낙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역을 남발한 부분이 많아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장이라 잔소리가 많긴 했지만 정작 가장 의문이 남으면서도 현대 해설서에서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못한 부분은 마지막 공자의 말이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 “점쳐 보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과연 이 말은 무슨 의미로 사용된 것인가에 대해 이 장과 유기적으로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현대 해설서의 오역의 정점은 이 부분의 해석을 심지어 ‘내가 무엇을 해 먹고살지 점칠 필요가 없다.’라고까지 해서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애매모호하게 ‘그런 내용은 점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라고 하는 해설서도 있다.      

주자마저도 이 마지막 언급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하여 의미가 모호함을 인정하고 있다.     


다시 ‘子曰(자왈)’을 加(가)하여 《周易(주역)》의 글과 구별하였으니, 그 뜻은 자세하지 않다.     


대신 이 부분의 의미에 대해 양 씨(楊時(양시))의 설명을 더하며 다음과 같이 공자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에 대해서 주자 자신의 해설을 풀이해준다.     


“군자가 《주역》에 대하여 만일 그 점괘의 내용을 음미해 보면 恒心(항심)이 없는 것이 부끄러움을 취하게 됨을 알 것이니, 항심이 없는 짓을 하는 것은 또한 점쳐 보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하였으니, 뜻이 또한 대략 통한다.     


다시 말해, 맨 마지막의 내용은 점을 쳐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역의 효사로 공자가 인용한 그 부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런 경거망동을 취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완곡 하지만 묵직한 공자 특유의 훅이고 그로기 펀치인 셈이다. 즉, 마지막의 점을 쳐보라는 것은 실제로 신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라는 의미가 아닌 바로 위에 공자가 인용했던 주역의 효사가 가진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반어식 죽비인 셈이다.     

굳이 항심(恒心)이 없는 사람을 뻔뻔한 사람이라고 번역한 이들이 돌고 돌아 결국 그 뜻이 그 뜻, 아니냐는 식으로 우겨대거나 공자가 굳이 샤머니즘의 신탁(神託)을 의미하는 시대에 맞춰 의미상 라임을 맞추는 식으로 언급한 <주역(周易)>의 알맞은 죽비에 해당하는 효사(爻辭)를 가지고 와서 해석한 것을 가지고 혹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 싶어서 마지막에, ‘<주역>의 그 내용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설명한 부분까지 깔끔하게 오역을 하는 것을 보면, 언제나 말한 사람의 의도나 가르치려는 사람의 상세하고 완곡한 의도가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항심(恒心), 항상 된 마음, 다른 것들에 흔들리지 않고 그저 자신이 목표 삼은 것에 꾸준함을 더하는 그 마음가짐. 별 것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니, 실제로 별 것 아닐 수 있다. 매일 같이 일정량의 원고를 쓰며 글쓰기로 자신을 수양하는 일이나 아침마다 <논어>를 읽고 그 뜻을 제대로 새기며 자신의 삶에 반추하는 일을 몇 주 몇 달 몇 년간 반복하고 꾸준히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당신을 바꾼다는 지극히 단순한 진리에 대해서 당신은 아직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유치원 때부터 수능 공부를 하는 이는 없다. 그리고 정작 부모가 원하는 최고의 대학에 합격시키기 위해 유치원 때부터 아이를 닦달하며 그렇게 원하는 최고의 대학에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가 성공된 삶의 첫걸음을 딛지 못했다는 사실은 의외의 장소에서 반증된다. 


최고의 대학에 들어왔다며 득의양양 캠퍼스를 누비는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정작 책에 나오지 않은 그들의 생각을 물었을 때 그들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쉬는 시간에 자신을 그 대학에 넣어준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묻고 상의하는 아이들을 직접 목도했던 내 경험을 비춰보건대, 항심(恒心)의 핵심은 단순한 꾸준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목표의 지향점에 자신의 목적의식이나 동기가 확실하게 부여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똑같은 성적을 얻고 똑같은 과정을 거쳐 지금 똑같은 위치에 서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을 보더라도 자세히 그가 그 과정을 이르게 된 동기나 그가 궁극적으로 그 위치에서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있으며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살펴보게 되면 결국 ‘항심(恒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된다.      

누구에게 이익을 줄지 눈을 똑바로 뜨고 확인하는 법비의 여신

같은 사법고시를 보고 법조인이 되었어도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인권변호사로 자신의 능력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누군가는 연수원에서 마담뚜의 손에 이끌려 돈 많은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그들의 사리사욕을 채워주며 자신의 욕망을 더 불태울 불쏘시개로 활용하여 불길로 온 몸을 던지는 부나방이 되어 그 추악함의 끝인 지옥의 나락으로 치닫게 된다. 물론 그들은 모른다. 그것이 자신을 포함한 자신의 부모님과 자신이 낳은 자식들에게 얼마나 추악하기 그지없는 부끄러운 인생의 오점으로 남게 될지를.      


명문 법대 출신은 고사하고 고졸이거나 지잡대 출신으로 법조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세우겠다고 노력했다가 조금 주목을 받고 정치권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거나 유명세를 타게 되면서 혹은 정말로 그렇게 자신이 뭐나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면서 오염되고 그 전의 바른 모습을 취하려던 모습보다 더 추해지고 더 악해지고 더 지저분해지는 이들도 우리는 수없이 봐왔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고 지극히 취약한 부분이다.     


지금까지의 현실을 비춰보건대 그들은 그렇게 살아도,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져 전 국민들한테 자신의 죄악이 생중계되어 포토라인 앞에 서는 것도 부족해서 법원에서 부부가 눈물을 흘리고, 공항에서 다른 나라로 도망가려다가 잡히는 모습이 전 국민들에게 공개되었어도 아무런 일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들이 이제까지 쌓은 성곽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며 자위하고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법에는 저마다 여러 가지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신이 아닌 다음에야, 아니 신이라 할지라도 어떤 삶이 단정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판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하늘이 알고 자기 자신은 안다. 자기 자신의 삶의 방향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말이다.     

뜻한 바가 있고, 그것이 올바르지 않은 것이 아님에도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고 되려 일이 꼬이고 당신을 힘들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지금 그렇게 꾸준히 하고 있는 ‘항심(恒心)’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라고 꼬옥 말해주고 싶다.     


그것이 지금 당장 당신이 그리는 해피엔딩처럼 되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당신의 마음가짐이나 그 노력이 결코 종국에 당신은 배신하지는 않을 것임을 내가 보장하고 하늘이 보장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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