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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14. 2022

나의 색을 유지하며 조화로운 색감을 만들 수 있는가?

군자가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군자인 것이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和하고 同하지 않으며, 小人은 同하고 和하지 않는다.”     

이 장은 저 유명한 ‘君子和而不同’이라는 문구를 담은 가르침이다. 많이 보고 들어는 봤을지언정 이 장의 핵심 개념인 和와 同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 만나보지 못한 듯하여 아쉽기도 한 부분이다. 늘 그렇듯이 아주 유명하고 많이 회자된다고 하여 그 의미에 대해서 모두가 명확하게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진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앞서 공부할 때도 설명한 바 있지만,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것은 설명하고자 하는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상대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가르침의 방법 중에 대표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해를 접근하기 시작하면. 똑같은 개념어 두 가지를 가지고 君子는 和하고 同하지 않는다고 하고, 小人은 同하고 和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당연히 和가 긍정적인 개념이고 同이 부정적인 개념일 것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和와 同이 어떤 개념인지에 대해서 명확해지는 것은 아니다. 주자는 공자가 말한 이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석으로 해설하고 있다.     


‘和(화)’는 거스르고 어기는 마음이 없는 것이요, ‘同(동)’은 阿比(아비, 아첨하고 빌붙음)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다소 극단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이 주자의 해설은, 현대어에서 사용되는 ‘조화로움’으로 和를 설명한 것이고, 同을 아첨하여 빌붙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同을 설명하는 데 있어 ‘자기 생각이나 주장 없이 남의 의견에 그저 동조한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인 ‘부화뇌동(附和雷同;우레 소리에 맞추어 천지 만물이 함께 울린다)’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주석의 영향이기도 하다.  

   

‘同’의 의미를 그렇게 이해하게 되면 ‘和’ 역시 단순한 조화로움만의 의미가 아님을 눈치채게 된다. ‘和’는 ‘부화뇌동(附和雷同)’의 ‘同’과 상대적으로 그저 같다고 동조하거나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따위의 행위가 아닌, 주체적인 판단을 심지로 가지고 있는 채 상대와 조화로움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과 공존의 개념인 것에 반해, ‘同’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인하는 지배와 흡수합병의 개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공자가 군자와 소인으로 구별 지어 사용한 것과 같이 ‘和’와 ‘同’은 분명한 대비적 개념인 것처럼 보인다. ‘~처럼 보인다’라고 내가 쓴 것은 그것이 절대적인 대비적 개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인식의 확장을 통해서만이 두 개념을 군자와 소인에 사용한 공자의 궁극적인 의도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군자와 소인을 대비적으로 설명한 비교방식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이해를 쉽게 돕기 위한 가르침의 아주 기본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군자와 소인을 언급하여 두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받았는가? 그것부터 해결해나야 그 설명방식을 꺼낸 이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을 것 아닌가?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많은 방식 중에서 앞서 <논어>에서 언급했던 가장 기본이 되는 방식의 차이는 바로 가치 기준의 척도가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목적을 두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맞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소인이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것은 뇌가 없거나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경우에만 그런 아첨과 빌붙는 행위를 하게 된다. 거기에 자신의 가치 주관이 없다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소인은 자신의 사리사욕만이 최우선이라는 명확한(?) 가치 지향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군자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어 다른 이와 쉽게 동일하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그들과 융합하려 하는 것일까? 그 행위의 목적지향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회의 안녕과 안정, 그리고 불화를 조성하는 위험요소들의 해소를 통한 올바름으로의 지향을 위한 준비과정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리사욕을 위해 무조건 같다고 동조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다르다는 것으로 인해 그것을 배척하거나 인정하지 않겠다는 몽니를 부려 불안을 조성하지 않으며 안정되고 조화로운 상황을 유지하면서 올바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배경과 조건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同’을 추구하는 소인들은 양적인 발전을 일시적으로나마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해지며, ‘和’를 통해 완성할 수 있는 질적인 발전의 기본이 되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세계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마련이다.     


다소 철학적인 이야기로 흘러 어려울 수는 있겠으나 개념의 이해보다 그것을 실천하고 실현시키는 것은 그것보다 몇십 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윤 씨(尹焞(윤돈))는 공자의 이 가르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한 마디로 정리한다.     


“군자는 의리를 숭상하므로 同(동) 하지 않음이 있고, 소인은 利(이)를 숭상하니 어떻게 和(화)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군자와 소인을 비교함으로써 지향하는 바를 들여다보라고 일러준 바로 그 지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 설명, 되시겠다.     


<논어>를 읽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독법 중에 최근에 공부하며 내가 강조한 것이 있다. 바로 이전장과 다음장의 유기적 관련성에 주목하여 연계하는 사고의 확장 방식이다. 바로 어제 공부했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는가? 그 옛날 선비들처럼 <논어>의 내용을 줄줄 외우고 무슨 편의 몇 장에 어떤 내용이 나왔는지까지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바로 하루 전에 자신이 공부했던 내용 정도는 기억하는 성의를 뇌에게 보이도록 노력하자.     

어제 공부했던 부분은 ‘항심(恒心)’으로 확장되는 ‘항(恒)’의 개념을 강조한 가르침이었다. 그 내용이 오늘의 ‘和’의 개념으로 확장되고, 그 반작용 내지는 부작용으로 ‘同’으로 가면 안 된다는 이야기임을 깨닫는 것은 고급 수련자들의 경지에서 나올 수 있는 사고 과정이기는 하지만, 부족하더라도 그런 공부의 방식을 끊임없이 노력하고 다시 곱씹어 생각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마음이 아닌 항상 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는가? 그리고 조화로움이자 다른 사람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가치 주관에 대해 명확하게 심지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和’와는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을 정리해보라.     


그렇다. 다른 사람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내 색깔을 도드라지게 강조하지도 않되, 그렇다고 내 색을 감추거나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그저 조화로움만을 강조하는 것은 군자 됨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어떤 색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의 수준에 있는 자가 다른 사람의 색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리 없다. 공자는 늘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읽기 전에 자신을 제대로 읽는 연습이 완성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 있다가 뭔가 공부를 하게 되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틀리게 혹은 다르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비웃게 되고 그의 무지 혹은 잘못됨을 말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단계를 겪게 된다. 그런데, 그 단계를 넘어서 내가 공부한 것과 다른 것이 절대적인 지식이 아닌 다른 생각이나 의견일 수 있다는 경지에 오르게 되면 함부로 다른 사람을 비웃거나 다그치는 경거망동을 삼가게 된다. 


혹여 아주 명확하게 틀린 부분을 강조하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비난하거나 지적하기보다는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부분이 전체적인 상황에서 왜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살피게 되고 그 사람이 민망하지 않게 일깨워줌으로써 그가 제대로 된 지식을 알게 되고 스스로 깨닫게 만들어주기 위해 방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에 대한 배려를 넘어선 자신의 수양 단계에서 거쳐 지나갈 수 있는 스스로의 훈련이고 단련인 것이며, 그렇게 배려하게 되는 과정에서 갈등이나 싸움으로 번지는 단순하고 어리석은 결과 대신 상대가 더욱더 고마워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그의 행실을 교정해주는 더 높은 단계의 고양된 결과를 배출해내기도 한다.     


처음 자신의 행동이 어디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아이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가르쳐주고 그 방향을 제시해주는 첫 교육은 늘 부모가 하게 된다. 그 부모의 교육은 그 아이의 미래를 결정짓는 아주 중요하면서도 평생을 가는 교육이기도 하다. 잘못한 것을 따끔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방식이 아주 틀렸다고만 비난할 수 없듯이, 무조건적으로 혼내는 것은 안 좋은 것이라며 오냐오냐하는 방식으로 아이를 가르치는 것 역시 정답이라고 볼 수는 없다. 


방식도 방식이거니와 아이가 어떤 성향을 가진 아이인지 그리고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그리고 무엇을 가르치는 것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어느 하나 동일한 상황이나 동일한 성향을 가진 인간이 없는 관계로 정답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和’와 ‘同’이 단순히 검은색과 흰색으로 딱 구분될 수 있는 대비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해준다.     

어제 항(恒)에 대한 개념을 공부하며 세속적인 사리사욕에 지향점을 두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지양해야 할 바인지에 대해서 확인한 바 있다. 그다음으로 이 장의 가르침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군자가 바라보는 지향점이 대승적인 차원에서 사회를 위한 것이고 전체를 위한 것이며 궁극적으로 자신의 수양을 완성하는 것에 있다는 것은 그가 군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꾸준한 노력으로 그것들을 지향하기 때문에 군자일 수 있는 것이다.     


슬기로운 사회생활을 한답시고 자기가 싫은 것도 그저 좋다고 하고,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웃으면서 하는 것이 ‘和’라고 착각하며 자위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슬기롭다’는 예쁜 우리말은 그런 데 가져다 붙이라고 있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닌 건 어느 상황에서건 물색없이 아니라고 목청을 높여 구호를 외쳐대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자가 스스로 군자라고 착각하는 일도 없기를 바란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신념이라고 굳게 믿는 것까지는 탓할 수 없겠으나 다른 이들이 그렇지 않다고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시도 때도 없이 목청을 높이는 것은 그저 머리가 나쁜 것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진정으로 잘못된 것을 바꾸고자 한다면 자신의 천성이 욱하며 일어나는 것에 반응할 것이 아니라 그 잘못된 것을 어떻게 바꾸는 것이 효율적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국회의원이 되고서 임기의 절반이 넘도록 어디서 뭐하는지도 모르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서울시장에 나오겠다고 했다가 해프닝처럼 중간에 그만둬버렸던 임팩트밖에 없는데, 뜬금없이 법사위의 캐스팅 보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명절 전후로 파란당의 특검법 제안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것을 보며 그야말로 정치는 타이밍이고 이런 식으로 그가 국회의원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가 구구절절 던지는 파란당의 후안무치한 정치쇼에 대한 생각이 잘못된 것도 아니거니와 그가 국회의원 임기 절반 동안 멍 때리고 있다가 이제사 철이 들거나 개과천선했을 수도 있겠으나 노란당의 비례대표들이 당원투표에 의해 짤릴 지도 모른다는 자체 퍼포먼스를 벌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비례대표로서 국회의원의 임기 절반 이상 현장에서 보여왔던 행태를 보면, ‘和’는 고사하고 ‘同’의 긍정적인 측면이라도 발휘한 적이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 의원실에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던 사람의 입장에서 그 안을 들여다보았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사회의 아주 작더라도 불합리하거나 잘못된 일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힘과 영향력으로 교정하고 바꿔나갈 수 있는 기회를 귀찮다고 걷어차고 그것은 자신의 사리사욕의 지향점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식의 행보를 하는 순간 그의 민낯은 여지없이 까발려지기 마련이다.      

정치를 한다는 이가 자기 가슴의 배지를 만지작거리며 돈을 벌기 위한 일자리로 여기거나 명예를 높이기 위해 정치적인 퍼포먼스를 해야 하는 정치꾼으로서의 자리를 확고하게 다지기 위한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정치를 잘못 배운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개딸들의 지원을 받네 어쩌네 하며 비대위원장에 올랐다 내쳐졌던 파란당의 젊은 처자나, 국민의 선택을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당대표라며 연일 SNS만 써대는 빨간당의 청년 모두가 자신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때에 지금처럼 거리의 시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뛰었다면 그들이 그렇게 쉽게 내쳐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위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후에야 고개를 쭉 빼고 위를 보며 으르렁거리고 목소리를 높일 뿐이다. 지금 당신이 그들과 과연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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